디지털 미디어는 분명 현대의 한 특성이다. 광고 시장에서도 디지털 미디어는 무서운 속도로 기존 출판물을 밀어내고 있다. 계량화하기 쉽지 않지만 입간판도 출판물과 비슷한 운명을 겪을 것 같다. 마치 공묘(孔廟) 비림(碑林)의 석비들처럼, 모바일 시대에 움직이지 않는 것들은 뭔가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을 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입간판은 몸체가 서 있을 뿐 그 화면은 이미 디지털화 되었다. 이른바 ‘구시대의 유물들’도 생존의 기로에서는 나름대로 영민하다. 특히 중국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형식을 고수하면서도 디지털 시대와 공존하는 광고 분야가 있다. 특히 변경에서는 이 분야는 당분간은 불황을 모를 듯한데, 바로 거리의 표어(標語)이다. 표어의 기묘한 사회적인 생명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회적인 생명력이 정치적인 자리 잡기에 달려 있다면, 표어 자체도 정치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
2017년 가을 신장 자치구 변경으로 돌아가 보자. 우루무치 역으로 들어가는 임시 회랑은 형형색색의 표어판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역사학의 눈으로 보면 단연 출구 쪽의 ‘덕과 법을 결합시키자(德法結合)’가 눈에 띈다. 한 칸 건너 있는 두 글자짜리 열두 개 표어 무더기는 조형미가 좋다. 전통 ‘종이 오리기(剪紙)’ 작품처럼 깔끔한 문양이 덧붙으니 저으기 현대적이다. (사진 1 참조) 간판에 배열된 표어를 그대로 지면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부강, 민주, 문명, 화해
자유, 평등, 공정, 법치
애국, 경업(敬業), 성신(誠信), 우선(友善)
사진 1 우루무치 역의 표어판
이 표어는 전국 공통이라 성급 구호들보다는 좀 더 추상적이고, 음의 배열이 자연스럽다. 변경 성급 이하로 가면 ‘민족대단결’, ‘분열주의타도’ 등의 훨씬 구체적인 구호들이 눈에 띈다. 성급 이하 단위에서 필자가 가장 강렬한 느낌을 받았던 표어는 카쉬가르 시내 어떤 이슬람 사원의 정문 꼭대기에는 ‘애당(愛黨)’과 ‘애국(愛國)’ 이라는 두 문구였다. 붉은 바탕에 커다랗게 쓴 글씨는 멀리서 봐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시내를 돌아다니며 확인해 본 결과 사원마다 크기마저 똑 같은 문구가 적혀 있으니, 이 표어는 통일적인 기획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방인이라면 당장 질문할 수 있다. 이런 표어란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행동인가? 요즘 누가 표어를 거부감 없이 읽을까? 특히나 소수민족 구성원들이 저런 명령어투에다 식상한 구절들을 보면서 공감할까? 좀 나이든 분들은 시뻘건 바탕 위의 애당/애국 문구를 보고 완장을 차고 설치던 홍위병을 떠올리지 않을까? 내가 만난 사람들도 맥주라도 한 잔 들어가면 대개 표어에는 손사래를 친다. 넘치는 표어를 대하다가 대개 무관심의 지경에 이르렀고, 심지어 일부 젊은이들은 격한 반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나의 경험상 어떤 지역에 일주일 이상 거주하면 표어들을 자연스럽게 읽힐 정도가 되고, 일주일이 지나면 그냥 지나친다.
왜, 각급 선전단위는 여전히 공간만 발견하면 표어로 채울까? 혹시 지난날의 관성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오직 관성 때문이라면 근래 가속도가 붙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렇다면 표어 정치를 추동하는 어떤 기획과 힘이 있을까? 의문에 접근하기 위해 먼저 쓰촨 출신의 지인 왕(40세, 여)에게 어린 시절 생각나는 표어를 순서대로 나열해보라고 부탁했다.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아무런 우선순위도 없이 그저 먼저 떠오르는 것부터 말하기. 그녀가 불러준 것들을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하나만 낳는 것이 좋다(只生一个好). 레이펑 동지를 본받아 학습하자(向雷锋同志学习). 즐겁게 일하고, 편안히 귀가하자(高高兴兴上班,平平安安回家). 마오주석 만세, 만세, 만만세(毛主席万岁,万岁,万万岁)!
둘은 길가 담벼락, 하나는 학교 표어란, 하나는 공장 벽에 쓰여 있던 것이라고 한다. 나는 내친 김에 몇 가지 더 물어보았다.
“당신 학창 시절 때는 개혁‧개방 이후인데, 그 때도 마오 주석 만세 같은 표어가 있었나요?”
“그 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담벼락에 써 놓은 것을 아무도 안 지웠으니까요.”
“어린 시절 표어를 볼 때 뭔가 특별한 느낌이 있었나요? 예를 들면 감동 같은 거요.”
“아뇨, 표어 덕분에 한자를 많이 익혔지요.(웃음) 엄마는 항상 표어를 읽게 하면서 한자를 가르쳤어요. 매일 보니까 잊어버리지 않잖아요. 왜 거기에 표어가 있는지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 때(80년대 말-90년대 초) 표어는 그냥 공기와 같은 것이어서, 특별한 감정은 없었어요.”
우리는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눴지만 사실 결론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지금껏 내가 표어를 오해하고 얕잡아본 이유는 원래 표어가 구호(口號)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호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 구호는 여러 주장을 싣고 있지만, 그 형식은 단순히 누군가를 부르는 것이다. 안녕 하든 않든, 우리는 ‘안녕하세요’라고 부른다. 부름에 일단 화답하면, 그 내용을 알든 모르든 상관이 없는 것이 구호다. 사람은 부름에 응하지 않고 살 수 없다. 부름에 응하는 순간 바로 그 울타리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매일 보는 사람의 부름에 더 잘 응답한다. 그러므로 ‘시대착오적으로’ 가만히 서 있는 입간판 위의 구호가 인격(人格)을 얻기에 유리하다.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공기처럼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다. 뜻을 관철시키려 하면 사람들은 피곤해한다. 그러므로 한자를 읽히듯이 그냥 재미로 외우도록 하는 것이 낫다.
그렇다면 내용은 어떤 것이라도 좋고 전달되지도 않는가? 저기 열 두 개 표어 무더기의 제일 앞에 선 글자, 다른 글자들보다 언제나 먼저 발음되는 두 글자는 ‘부강(富强)’이다. 글자 크기는 같지만 ‘부강’과 ‘우선(友善)’은 평등하지 않다. 형식적으로는 ‘부강’이 나머지 표어들을 이끌어 간다. 그리고 ‘자유’는 ‘법치’로 마무리 된다. 그 법치란 서구에서 말하는 법이 아니라, 덕과 법의 변증법, 멀게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이미 성행하여 마오 시절에는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유(儒: 덕)와 법의 대결 선상에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덕법결합’이라는 커다란 표어를 먼저 배치한 것이다. 종합하면, ‘말걸기’라는 형식과 그 말의 배치를 통해, 스며들듯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표어의 정치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표어의 잔상이다. 예컨대 마오 생전에 쓰인 표어는 마오 사후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담벼락이 철거되지 않는 한 누구도 함부로 철거할 수 없다. 표어는 오랫동안 한곳에 서 있으면서 인격을 얻은 것이다. 마오의 이름이 들어간 표어는 마오의 인격을 얼마간 갖춘다. 시대가 조금 변했다고 해서 누가 감히 마오의 이름을 지운단 말인가? 현실에서 표어의 인격은 자연인의 인격보다 큰 권력을 가진다. 우연인지, 예로 든 열 두 표어 중에 외국인에게는 뭔가 생소한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화해다. 화해(和諧)란 전 정권(후진타오 정권)의 대표 표어였다. 교묘하게 화해를 첫 열에 배치하되, 다만 끝에 두었다. ‘첫 열의 마지막’은 존중과 의미격하의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혹자는 필자가 신경증에 걸려 과잉 해석을 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사실 예전 마오 시절의 권력투쟁은 대개 단어의 선택이나 문장의 배열에서 시작되었다. 푸코가 말했던가? ‘배치는 권력이다.’ 자잘한 배치에서 권력을 찾지 못하겠다면 이슬람 사원의 표어와 그 바탕색을 보라. 이슬람의 상징색인 녹색과 청색을 압도하는 붉은 색, 정문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는 ‘애당’ ‘애국’의 두 표어의 위용을 부정하지는 못하리라. 내용과 형식이 거슬리더라도 그 누구도 감히 떼어내지 못하기에 표어는 거기 의연히 붙어 있다. 완강하게 말을 걸지만 대답하지는 않는 일방적인 인격 표어. 변경의 유랑자는 표어라는 꼭두각시 인격에 벌써 기가 질린다. 기획자에게 다가서기도 전에.
사진 2 카쉬카르 무슬림 사원
【변경에서 바라본 중국 6】
공원국 _ 작가 / 중국 푸단대 인류학과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