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공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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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의 천주교당에 반하다 _ 유장근

여행은 자유롭기 위해 집을 떠나는 것이 주된 목적이므로, 꼼꼼하게 계획하지 말고 떠나는 것이 진짜 여행답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아무데도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행정이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빡빡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결국 시분을 쪼개가며 여행길에 오르게 되니, 가면 갈수록 몸도 마음도 지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심신의 피로를 씻어주는 볼거리가 우연히 눈에 띄는 경우가 있다. 대리시내에 있는 천주교당이 그런 경우로서, 정말로 우연히 보게 된 '보물'이었다. 대리의 옛 시가지와 얼하이 관광을 끝내고 곤명으로 돌아가려던 우리 부부는 대리시의 한복판에 있는 양인가 사거리에서 아래쪽에 나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길가에서 '대리천주당'이라는 안내문을 보았던 것이다. 관광 안내 팜프렛에도, 그곳에서 산 관광안내지도에도 없었기 때문에 멋진 행운이자 대리여행의 대미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안내문을 따라 찾아간 건물은 멀리서 바라본 것보다 더 멋있었다. 특히 정면의 구성에서 이 교당은 지역의 향토적 특색이 뿜어져 나왔고, 건물 전체에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거기에 건물에 칠한 다양한 색이나 배경으로 자리한 푸른 하늘 등은 한마디로 경이로웠다. 토착사회의 전통적 건축양식에 교당의 의미를 가미해서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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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대리 시내에 있는 대리천주교당.

현지 사회의 오랜 건축 관행과 새로 전래된 천주교 양식이 융합되어 등장한 20세기 초의 독특한 종교건축물이다.

 

천주교당 정문에 쓰인 설명문에 따르면, 이 예배당은 1929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교당으로 출입하는 대문과 교당에 이어지는 통로, 그리고 문루와 예배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루와 예배당은  3체식(三體式) 건물이라고 설명하였다.

 

운남의 대리 지역에 천주교가 들어온 시기는 함풍 연간(1851-1860)으로서, 당시에는 교당만 임시로 서 있었을 뿐이었고 소속은 프랑스의 성심회파였다. 반세기가 지난 1924년에 이르러 예메이장(葉美章, Pierre Erdozaincy Etchard)이 주임으로 부임한 뒤, 이곳에 새로운 교당을 건립하면서 교세가 확장되었고 그 덕에 '대리교구'를 개설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갔다. 이후 이 천주교당은 이 일대 천주교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대리 지역의 본당이 되었고, 아울러 포교, 예배, 학교와 진료소 운영 등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이곳에서 운영하던 학교는 새 정부로 이관되었고 교당만이 남아 근근이 활동하다, 문화대혁명 때 교당 문마저 닫게 되었다. 그러다가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된 1983년 12월 24일에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1984년에 전면적으로 개수하였고, 1985년에 대리시 인민정부에서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였으며, 그해 9월 20일에 이를 공포하였다. 

 

이 건물은 세 개의 문이 달린 문루와 2층으로 구성된 예배당, 그 위에 종루가 놓인 3층식의 목조건축으로 실제 정면에서는 예배당의 정문 위에 별도의 지붕을 두어 2층은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루의 아치형 정문은 옆에 있는 쪽문보다 훨씬 크고 색도 붉은 계통의 갈색으로 처리하여 두드러질 정도로 이를 강조하였다. 게다가 문루 위의 지붕과 1층, 2층의 지붕, 그리고 종루의 지붕과 처마는 모두 날아갈 것 같이 날렵하게 구성하여 일체감을 강조하였다. 3층에 놓인 4각형의 종루는 사면이 모두 동일한 면적의 정방형 창문으로 짜여 있는데, 창문에 푸른색을 칠하여 종루 전체가 시원한 느낌을 준다. 이 창들은 네 모퉁이에 세워진 4개의 붉은색 기둥으로 인해 더 밝고 빛이 나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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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대리 천주당의 내부 모습. 1980년대의 보수 때 안팎으로 손을 대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측면에서 본 본당 2층과 종루는 정면에서 볼 때와 다른 인상을 주었다. 본당 2층의 측면은 7칸이어서 통상의 교당처럼 긴 장방형이었으며, 각 칸의 창문은 격자창을 썼고, 색깔도 종루의 창과 같은 하늘색으로 처리하였다. 이 역시 창을 구분한 붉은 색 기둥과 잘 어울렸다. 아마도 흰색의 용마루와 푸른 하늘이 어우러져 더 빛나는 모습으로 비쳐졌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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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대리 천주교당의 측면 2층 모습.

측면에서 이 교당을 보면 기존의 천주교회 내부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구성하였다. 흰 용마루와 푸른색의 창, 붉은 갈색의 창문 기둥 등이 푸른 하늘과 잘 어울린다.

 

사실, 종루 위에 노란색 십자가나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천주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지 않았다면, 이 건물을 천주당으로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이 지역의 토착민인 바이족의 전통적 건축 양식을 존중하면서 지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절충형 건물의 뿌리는 대리 지역에서 볼 수 있었다. 얼하이 관광 때 마주했던 관음각의 지붕과 대문도 이와 유사하였던 것이다. 처마와 지붕선, 그리고 아치형으로 만든 정문의 구성이 대리천주당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이것은 대리 일대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바이족의 종교건축물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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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얼하이 부근에 자리한 관음각 건물.

2중의 지붕 처리와 처마의 곡선, 무지개형의 정문 형태, 붉은 갈색의 기둥 처리 등에서 지역사회가 발전시켜온 종교건축의 특색을 보여준다.

 

전통건축의 절충적 변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운남성 삼강병류 명승지 부근의 노강주 공산현 병중락향 백한락촌(怒江州 貢山縣 丙中洛鄕 白漢洛村)에 있는 천주교회당의 건물에도 주목한다. 대리 천주교당의 양식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 교회는 본래 광서 24년(1898)에 프랑스 선교사인 렌안(任安)이 세운 것으로 이 지역의 토착인인 독룡족(獨龍族)의 건축양식과 서양식을 결합한 목조 건축이다. 1층의 문은 패루 형식으로서 윗부분은 부챗살 모양으로 처리하였다. 2층에는 중앙에 방형, 좌우에 원형의 격자창을 사용하였다. 3층은 종루이며, 그 위에 흰색의 십자가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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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운남성 노강주 백한락촌에 있는 천주당. 이 역시 이 지역의 전통적 건축양식과 교회건물의 특징을 절충하여 만들었다.

 

이 건물은 1905년에 교회를 공격한 사건으로 훼손되었다가(이른바 敎案) 청정부에서 배상하여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이 교회당은 운남의 중서부 지역에 자리한 천주교당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기본 구성은 대리 시내의 그것처럼 문루와 2층 본당, 3층의 종루, 장방형의 예배당, 그리고 십자가가 맨 위에 배치된 형식이란 걸 알 수 있다. 다만 대리의 건물은 화려하기 그지없으나, 이 교회당은 꾸밈이 거의 없어 매우 소박한 느낌을 준다.

 

아쉬운 것은 문루 위의 지붕이 원형이 아닌 듯하다는 점이었다. 문화대혁명 때 이 건물도 홍위병에 의해 많이 파손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훼손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남 지방의 천주교회당은 해당 지역에서 오랫동안 발전해 와 이미 그 사회의 특색으로 굳어진 건축양식에 서양의 교회 스타일이 가미되어 현지의 풍토에 맞는 종교 건물로 재탄생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현지의 오랜 건축 관행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셈이다. 그 점에서 대리의 천주교당은 현지 전통의 건축을 잘 이어나간 대표적인 건물이라고 할 만하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11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