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방부가 8년 만에 핵태세 검토 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를 발표했다.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보고서에 대한 우리의 관심도 북한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실제 언론들은 북한이 요약문과 본문에서 각각 두 번씩 언급되었던 2010년 보고서와 비교해 이번 보고서에서는 약 50번이나 언급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러시아보다는 못하지만 이란보다 많고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더구나 처음으로 공식 외국어 요약본에 한국어가 포함되었다. 북한에 대한 경고이겠지만 한국에 대한 압박도 담았을지 모른다. 내용도 훨씬 강경하다. 북한이 미국과 동맹국에 대해 핵 공격을 하면 체제를 종결시킬 것이라고 명시했다. 우리 정부 관계자는 확장억제, 즉 '핵우산' 제공을 재확인한 점을 높게 평가한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부담으로 작용할 부분도 많다. 아시아에 대한 억지 강화책으로 북핵 위협에 대응하는 미사일 방어(MD)에 대한 투자 지속과 동맹국과의 연합훈련을 뽑고 있다. 사드 배치로 풍파를 겪고 한미 군사훈련을 북한에 대한 카드로 활용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로서는 곤란해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한반도와 관련된 내용에만 집중하면 미국 핵전략의 전환과 이로 인한 전지구적 차원의 변화를 놓칠 수 있으며 여기에서 파생되어 우리에게 미칠 영향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보고서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한국어 요약문에 '맞춤식'이라고 번역된 'tailored'일 것이다. 이 단어는 2010년 보고서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tailor', 'tailoring'까지 포함하여 삼십 번 가까이 언급되었다. '두루 적용되는 한 가지(one size fits all)' 방법이 아니라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억지 정책을 사용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언뜻 당연한 말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핵무기와 관련된 논쟁을 배경으로 깔고 있으며 근본적인 변화로 가는 입구일 수도 있다.
미·소 냉전 시기 핵전략의 기본 논리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핵무기에 대한 공포 때문에 역설적으로 핵무기 보유 국가들 사이에서 평화가 유지된다는 상호확증파괴(MAD, Mutual Assured Destruction)였다.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핵무기의 위력 때문에 역설적으로 아무도 먼저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상대방을 확실히 파괴시키기 위한 적절한 수준의 핵무기를 유지하고 1차 공격을 받더라도 보복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져야 했다. 이 논리는 오늘날까지 핵무기의 원칙이자 윤리 아닌 윤리로 작동하고 있다. 실제 2차 대전 이후 핵무기 시대에 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사망자 비율은 크게 줄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자 이 '고전적 억지(classic deterrence)' 개념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이란, 북한 등 핵무기를 새롭게 보유하거나 보유하려는 국가들이 증가하고 테러 단체로 핵무기가 확산될 우려가 커졌다. 이들은 충분한 핵능력을 갖추지 못해 오히려 상호확증파괴의 논리에 따라 핵무기 보유가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가정에서 벗어난다. 또한 거대한 핵보유국을 주요 대상으로 설정한 현재의 핵무기 체계로는 이들을 핵으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대상과 상황에 따라 '맞춤식 억지(tailored deterrence)'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기존의 핵능력도 유연하게 변화해야만 한다. 핵무기를 더 쉽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핵무기의 위력과 종류도 다양화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번 보고서는 이러한 맞춤식 억지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특정한 입장에 기반했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맞춤식 억지는 더 쉽고 다양한 핵무기 사용이라는 현실의 전략과 연결된다. 미국의 변화는 전지구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당장의 반응은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 등 맞춤식 전략의 대상으로 지목된 국가들의 반발에 머물고 있다. 중국 국방부는 이번 보고서에 대해 ‘선제 핵공격을 하지 않고 핵무기가 없는 국가를 핵으로 공격하지 않으며 억지를 위한 최소한의 핵전력만 유지한다’는 전형적인 고전적 억지의 논리에 기반한 자신의 공식적인 핵무기 정책을 반복하면서 미국을 비판했다. 그러나 미국이 정말 맞춤식 억지의 논리에 따라 핵전략을 바꾼다면 중국과 러시아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에 기술적으로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고전적 억지의 논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미 맞춤식 억지를 위한 다양한 무기들을 개발 중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거대한 핵전쟁의 공포에 떨었던 냉전의 핵시대와 달리 조그만 전투에서도 핵이 사용되는 새로운 핵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미국 국방부는 홈페이지에 이번 보고서를 게재하면서 기자회견 영상과 함께 뜬금없이 'On Deterrence'라는 제목을 가진 억지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축약 영상 하나를 추가로 링크했다. 이 영상은 샌디아 국방과학연구소(Sandia National Labs)가 작년에 제작한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담았다고 했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앞서 언급한 맞춤식 억지를 옹호하고 2010년 핵태세 보고서를 비롯한 오바마 행정부의 핵무기 정책을 비판했다. 이번 보고서는 놀라울 정도로 이 다큐멘터리와 이것이 기반한 맞춤식 억지를 지지해 온 일부 학계의 주장과 단어들을 담고 있다. 좀 오래된 용어이지만 샌디아 국방과학연구소가 사실상 핵무기를 개발하는 '군산복합체'의 일원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는 다른 영역에서도 그래왔듯이 과거 정책과의 연속성을 고려하거나 기존 주류 학계의 입장을 골고루 참고하기보다는 고의로 이전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학계의 주장 중에서 자신의 입맛에 들어맞는 매우 협소한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번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핵무기 없는 세계’를 표방하며 핵무기의 역할을 축소하려고 했던 오바마 행정부에 정확히 정반대되는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대상과 상황에 따라 더 쉽게 핵을 사용할 수 있도록 운용방식을 변경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핵무기를 더 많이 생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또한 맞춤식 억지의 논리는 개별 대상에 대해 더 공격적인 전략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고전적 억지는 상대방이 핵무기를 사용해 공멸하려고 할 만큼 미친 놈은 아니라는 가정 위에서 수립된다.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행위자를 상정하기 때문에 적조차 나만큼 이성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맞춤식 억지는 대상과 상황에 대한 개별적 분석과 인식이 중요하다. 이에 따라 행위자들에게 개별적인 특성이 부여된다. 누구는 제정신이지만 누구는 아닐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고전적 억지의 지지자들은 연역적, 논리적 사고를 통해 전략을 도출하는 고전적 논리와 달리 맞춤식 억지가 귀납적 경험과 주관적 평가에 따르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비판한다. 실제 2010년에는 요약문과 본문에서 한 차례만 언급되었던 '인식(perception)'이 이번 보고서에서는 '오인(misperception)'까지 포함하여 19차례 언급되었다.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쉽게 말하자면 맞춤식 억지의 논리는 북한도 자멸한 만큼 비이성적이지 않다는 가정보다 북한이라면 자멸을 각오하고 핵을 먼저 쏠 수도 있는 '미친 놈'이라는 판단에서 핵 전략을 수립할 가능성이 기존의 고전적 논리보다 높다는 것이다.
'맞춤식'이라는 단어가 정말 새로운 핵시대를 열게 될까? 미국의 맞춤된 핵전략의 가장 중요한 대상인 중국과 가장 시급한 문제인 북한의 바로 옆에 있는 우리로서는 '맞춤식'이라는 단어가 더욱 두려울 수밖에 없다.
조형진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은 『아주경제』 2018년 2월 7일자 동명의 칼럼을 수정한 것이다. 본문의 고전적 억지와 맞춤식 억지에 대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Paul D. Schumacher, "Does one size fit all?", Adam B. Lowther and Stephen J. Cimbala eds. 2016. Defending the Arsenal: Why America’s Nuclear Modernization Still Matters. Routledge, pp. 3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