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 중국의 동남 연해지역을 강타한 태풍이 지나간 이후 절강성 태주시 황암구에 있는 오래된 건물의 무너진 담 속에서는 이상한 물건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종려나무 껍질로 포장된 몇 개의 덩어리였는데, 종려나무 껍질을 벗겨보니 그 안에는 붉은 색 도장이 찍혀있는 오래된 문서들이 엉겨 붙어있었다. 이후 전문가들의 복원을 거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문서들은 바로 청대 절강성 황암현의 소송과 관련된 문서들이었다. 청대는 소송사회라고 불릴 만큼 소송, 그중에서도 현대의 민사사건에 해당되는 소송이 주를 이루었다. 청대 지방관청의 소송문서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연히 발견된 황암현 소송문서들은 시기와 지역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청대 혼인과 가족, 토지 등과 관련된 민사안건은 자리(自理) 소송의 범주에 속했다. 자리소송이란 주현(州縣) 단계의 지방관이, 상급관청의 심리를 기다릴 필요 없이 재판을 종결할 수 있는 소송이다. 이 경우 담당 지방관은 형벌을 선고하거나 심지어는 선고 대신 재판 당사자들 간의 화해와 협의를 권유하는 결정만 내리고 재판을 종결시키기도 하였다.
황암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모두 청말 황암현청의 소송문서들로 모두 100여건에 이르렀고 비교적 완전하게 복원된 것이 84건이며 나머지는 복원에 실패했다. 84건중 78건에는 구체적인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가장 이른 것은 동치 13년(1874년), 가장 늦은 것은 광서 15년(1889)이다.
문서의 내용은 모두 황암현에서 접수 처리한 소송관련 문서로 소송장, 증거 목록, 판결 후 원고 피고가 작성한 감결(甘結; 서약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소송장에는 황암현청에서 결재한 비어(批語; 판결문이나 지시사항)가 적혀있다. 황암소송문서의 소송 내용은 민사안건이 대부분으로 전체의 약 85%를 차지한다. 주로 혼인, 토지와 건물, 채무 등과 관련된 내용이며 이외에도 폭행, 절도 등도 포함되어 있다.
58 光緒十一年(1885)三月十三日 陳盧氏呈爲奉批斥駁叩求查理事 附批單一件
위 사진은 『황암소송당안과 조사보고(黃岩訴訟檔案及調査報告)』에 수록된 제58호 안건의 고소장으로 광서11년 (1885) 진노씨(陳盧氏)와 관련된 재산권 분쟁 안건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진노씨의 남편 진법금이 병사하면서 집안의 사업을 그의 동생인 진법근이 맡았는데 진법근이 욕심이 생겨 재산을 독차지하려 하면서 분쟁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진법근이 형수인 진노씨를 폭행하고 집안의 기물을 파손했다는 내용이다.
청대의 고소장은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그 형식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명청대에 고소장을 작성하는 규칙을 송장형식 조례라고 부르는데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그 기본적인 취지는 비슷하였다. 황암소송문서에 나타난 청말 황암성의 송장형식 조례는 20여 항목으로 비교적 복잡하였다. 여기에는 고소장 작성의 형식뿐만 아니라 고소내용의 범위, 증거와 증인 등 소송 전반에 걸쳐 중요한 항목들을 모두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형식면에서는 사진과 같이 인쇄된 동일한 양식의 고소장에 글자 수 또한 300字를 넘지 말아야 하고 고소내용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소장의 형식과 내용이 위의 조례에 맞지 않을 경우 현청에서는 고소장의 접수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명청대의 소송형식 조례에서는 반드시 관대서(官代書) 자격이 있는 사람이 고소장을 써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관대서를 거치지 않고 쓴 고소장은 관청에서 접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관대서란 관청에서 지정한 대서인으로, 고소장을 대신하여 써주는 것으로 비용을 받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관료와 결탁하는 현상도 발생하여 명청대의 사법 부패 원인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관습과 중국문화 3】
허혜윤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참고도서
田燾 許傳璽 王宏治 主編, 『黃岩訴訟檔案及調査報告 傳統與現實之間―尋法下鄕』, 法律出版社, 2004年.
田燾 著 김지환 등 역, 『외면당한 진실-중국 향촌사회의 제도와 관행』, 學古房,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