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푸(曲阜)는 공자(孔子)의 고향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산동(山東) 내륙에 위치한 탓에, 공자의 얼을 느껴 보겠다는 어지간한 다짐이 없다면 선뜻 찾아 나서기 어려운 도시가 바로 취푸이다. 더군다나 철도가 지나지 않아 교통도 썩 좋지 않고 그렇다고 몇날 며칠을 머물며 관광할 만큼 그럴싸한 대도시도 아니다. 그 옛날 한때 노(鲁) 나라의 도읍이었다고 하니 그 영화로움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련만, 지금도 취푸는 중국의 여느 농촌과 다름없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는다.
산동 내륙에 철도가 건설될 당시만 해도, 사람들의 머릿속엔 공자의 성지인 취푸에 철도가 들어오면 성스런 지맥(地脈)을 해할 수 있다는 조금은 고루한 생각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태산(泰山, 타이산)이 위치한 타이안(泰安)에서 아래로 내려오던 철도는 ⊐자 모양으로 취푸를 피해가고 말았다. 취푸의 경제가 여의치 않았던 것도 그 탓이리라. 요즘처럼 신속과 편리를 중시하는 시대에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현대문명을 포기하면서까지 공자의 가르침과 정신을 지켜내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이 가상하다는 생각도 든다.
산동의 성도(省都) 지난(濟南)에서 두어 시간 버스를 타고 가면 취푸에 닿는다. 원래는 아담하고 조용한 마을이었지만, 얼마 전부터는 공자를 찾아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넘쳐나는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반드시 가보아야 할 필수코스가 있다. 이른바 삼공(三孔)이라 불리는 공묘(孔廟, 콩먀오), 공부(孔府, 콩푸), 공림(孔林, 콩림)이 바로 그것이다.
공자의 천하주유
공자의 위패가 모셔진 공묘는 공자가 죽고 1년 뒤에 세워졌다고 한다.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세 칸 남짓의 작은 사당이었지만, 유교를 나라의 근간으로 한 각 황조들이 거쳐 가면서 그 규모는 갈수록 커져갔다. 1961년 중국정부에 의해 국가중점보호문화재로 지정된 공묘는 199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사당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공묘는 베이징(北京)의 자금성(紫禁城, 쯔진청), 청더(承德)의 피서산장(避暑山莊, 삐슈산좡)과 더불어 중국의 3대 고건축 중의 하나로 꼽힌다. 개인의 사당이 황제가 거하는 자금성에 비견될 정도이니 중국에서 공자가 차지하는 위상을 새삼 가늠케 한다. 중국에서 황색은 곧 황제를 뜻하는 색깔이다. 때문에 황색은 아무나 혹은 아무데나 함부로 쓸 수 있는 색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중국에서 자금성을 제외한 단 한 곳, 바로 공묘의 지붕에는 황색 자기로 된 기와가 얹혀있다. 이것만도 아니다. 공묘의 정전(正殿)인 대성전(大成殿) 지붕은 황궁에만 사용했다는 ‘겹침 지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때문인지 높은 곳에서 공묘를 굽어보면, 마치 자금성의 일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공묘 대성전
공묘 입구에서 차례로 여섯 개의 문을 통과하면 공묘의 정전인 대성전에 이른다. 대성전을 받치고 있는 전면 열 개의 돌기둥에는 흡사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역대로 열두 명의 황제가 이곳에 들러 공자에게 제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이 돌기둥을 붉은 천으로 가려놓았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본래 용이란 황색과 마찬가지로 황제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동물인데다가 그 석주(石柱)의 조각이 중국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했기 때문이란다. 아무리 황제들이 공자를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한다 할지라도, 자금성에도 없는 화려한 돌기둥을 보고 혹여 마음이나 상하지 않을까 하는 신하들의 우려와 배려였던 것이다.
대성전 기둥과 옹정제가 쓴 ‘생민미유’ 편액
‘백성이 있은 이래 공자만한 이가 없다’는 뜻으로, 공자의 위상이란
가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할 만하다.
강희제가 쓴 ‘만세사표’, 광서제가 쓴 ‘사문재자’.
‘만세의 모범’이요, ‘세상이 모든 지식과 문화가 여기 있다’고 하여
스승으로서의 공자를 추앙하고 있다.
공부(孔府)는 공자의 직계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했던 집이다. 본래 ‘부(府)’란 고관 벼슬아치들의 관저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의 공자에 대한 존경은 그의 후손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역대 왕조들은 공자의 후손을 연성공(衍聖公)으로 봉하고 각별히 대우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자신이 늦은 나이에 얻은 금지옥엽 막내딸을 공자의 72대손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공자 집안과 사돈을 맺기도 했다.
역대 황제들이 공자의 제를 지내기 위해 취푸를 찾으면서 제사를 주관한고 황제 일행을 대접하던 공자 가문의 음식문화도 함께 발전했다. 송(宋)나라 때 처음 시작된 공자 집안의 음식인 이른바 ‘공부채(公府菜, 콩푸차이)’는 천여 년 동안 공자의 후손들에 의해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과거 취푸를 찾는 이들은 비단 황제만은 아니었다. 중국 각지에서 공자를 기리는 추모객들로 넘쳐났다. 이에 이들을 대접해야 하는 공부 역시 항상 붐볐고 자연스레 공부의 요리도 나날이 그 깊이를 더해갔다. 공부채의 발전이 정점에 달했던 건륭제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음식의 종류가 무려 196가지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2015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신청하기까지 했으니, 취푸를 찾는 이들이 한번쯤은 직간접적으로 공부채를 접했을 것이다.
공부의 옛 우물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부에는 더 이상 공자의 후손이 살지 않는다. 물론 시끌벅적한 화려한 연회도 없다. 역대 왕조를 거치며 유지되었던 연성공이라는 세습작위도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공자의 77대 마지막 직계 후손인 공덕성(孔德成, 콩더청)은 공부의 대대적 정비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만든 장본인이다. 하지만 1949년 국민당정부와 함께 타이완으로 옮겨간 이후, 영영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중국에서는 황제인 천자(天子)의 무덤은 능(陵)이라 하고, 제후의 무덤은 총(塚) 그리고 공자와 같은 성인의 무덤을 림(林)이라 한다. 공림(孔林)은 곧 공자의 무덤이다. 원래 ‘림’이라 불리는 무덤은 딱 두 개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공림이고 나머지 하나는 관우(關羽)를 모신 관림(關林)이다. 공자는 유교문화의 창시자로 문(文)을 대표하고, 관우는 의리와 충절을 지닌 훌륭한 장수로 무(武)를 대표한다. 사실, 공자나 관우는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속하니 ‘총’을 써야 맞다. 하지만 일반 왕후장상과는 구별되는 성인으로 추앙되는 인물들이기도 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황제처럼 ‘능’을 쓸 수도 없는 입장이라 새로운 용어인 ‘림’을 사용했던 것이다. 역대 황제조차도 이 두 성인의 문무지도(文武之道)를 따르고 존숭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무덤을 림으로 불렀다.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두 성인은 이렇게 해서 신성화되었다. 물론, 후대에 와서 왕공이나 제후들 사이에서 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고 중화민국시기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무덤에도 림을 붙이기도 했지만, 그 의미는 분명 다르다고 할 것이다.
수많은 봉묘를 지나 공림의 깊숙한 곳에 도달하면 공자의 묘를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 경주에 있는 구릉지처럼 거대한 무덤을 상상했다면 가히 실망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봉분이 숲에 둘러싸여 있다. 공자의 무덤 앞에는 큰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다. 황색으로 새겨진 비문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맨 마지막 글자가 방패 간(干)으로 끝난다. 가까이 가서 비석의 끝을 내려다보면 ‘간’자는 실제 ‘왕(王)’자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 새겨져 있다. 하지만 ‘왕’자의 중간 획이 지나치게 위쪽으로 향해 있어 경배를 하는 이들은 난간에 가려진 왕자의 마지막 획을 보지 못한다. 이는 공자에 제를 지내러 오는 황제에 대한 공자 제자들의 배려였다고 한다.
대성지성문선‘간’
공림은 측백나무를 비롯한 10만 여 그루의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가족묘지라기보다는 설핏 공원을 떠올리게 한다. 공묘와 공부를 둘러보느라 힘들었던 심신에 잠시나마 휴식을 줄 수 있는 공간이다. 공림에 앉아 있노라면, 혼란의 시대를 극복하고자 했던 공자의 고민이 새삼 느껴지기도 한다.
공자나 논어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애주가에게 취푸는 남다른 곳이다. 2천 년 넘는 역사를 머금고 있는 공부가주(孔府家酒, 콩푸자주) 때문이다. 술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질 리 없는 우리에게도 꽤나 알려진 중국의 고량주 즉, 백주(白酒)이다. 굳이 술의 이름을 풀이하자면 ‘공부에서 만든 술’쯤 될 터이다. 본래는 공자 후손들이 공자의 제를 지낼 때 올리던 술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중국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는 일반적인 술 브랜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삼공을 둘러보느라 허기진 배를 공부채로 채울 요량이라면, 공부가주 한 잔 곁들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물론, ‘양껏 마시되, 흐트러지지 말라(唯酒無量不及亂)’는 공자의 말씀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취푸는 루난(魯南)의 구릉지와 루시(魯西)의 평원이 만나는 지점으로, 고래로 밀이나 옥수수 등의 곡물작황이 좋은 곳이다. 공부가주 역시 이 작물을 이용해 빚어냈음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편, 현재 공부가주를 생산하고 있는 ‘공부가주양조유한공사(公府家酒釀造有限公司)’는 취푸에서 가장 큰 기업 중의 하나로, 공부, 공묘, 공림 등의 관광자원과 더불어 지역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중요 재원이다.
이처럼 취푸는 공자가 먹여 살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길거리 행상들까지 스스로를 공자의 후손이라 일컬을 정도이니 여기서 더 부언해야 무엇 하겠는가.
오늘날 관광객들로 붐비는 취푸도 한때는 파괴의 대상이었던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의 공자에 대한 비판은 특히, 문화대혁명시기에 극에 달했다. 농민·노동자 중심의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고자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입장에서, 공자와 그의 사상은 우선적으로 척결해야 했던 대상이었던 것이다. 당시, 공자의 무덤은 홍위병들에 의해 마구 파헤쳐졌고, 공자를 기리는 각종 비석들은 철 생산에 필요한 용광로 가마재료로 쓰였다. 공묘나 공림을 둘러보면, 비석들 곳곳에 시멘트로 덧발라진 흔적들이 보이는데, 대부분은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빚어낸 상흔들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피해 유가 경전을 숨겼다는 노벽
문혁 기간 훼손된 공묘의 비석
공자 비판 내용을 담은 그림책
일반적으로 중국역사에서 공자는 위대한 스승이자 사상가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간혹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때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평가에 따라 취푸의 인기도 흥할 때가 있고 쇠할 때도 있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 또 미래의 시대는 처한 환경에 따라 가치관이 다르기 마련이다.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현인의 사상을 시대정신에 맞게 재해석하고 재활용하는 것은 후대의 몫이다. 오늘도 동서양을 떠나 공자의 가르침을 되새기고자 취푸를 찾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공림 남쪽에 세워진 패방
공자의 가르침이 만고에 전해지라는 바람을 담아 옹정제가 썼다.
【중국도시이야기 11】
윤성혜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김지환·손승희 엮음, 『중국도시樂』, 학고방, 2017에 수록된 글임.
참고문헌
가란 저, 채영호·정연호 역, 『공자 家 이야기』, 선,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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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명문당, 2003.
노정환, 『중국 대륙의 심장으로 들어가다』, 나무와숲, 2005.
조창완, 하경미,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 여행지 50』,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베텔스만 유네스코 편집위원회, 박영구 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북스캔,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