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조선화교 중화요리점의 실태: 1927-1945년의 시기를 중심으로」, 『경제사학』 제41권 제3호(통권 제65호), 경제사학회, 215-247쪽.
본고는 1927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 조선화교의 중화요리점에 관해 고찰한 것이다. 필자는 이미 188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의 시기 조선화교의 중화요리점에 관해 검토한 바 있다(「화교의 중화요리점 연구: 1880년대〜1920년대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제114집, 2017). 일찍이 서울과 인천 지역에 세워지기 시작했던 1880년대 조선화교 중화요리점은 주로 화교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들어 중화요리점은 급속히 증가하여 1930년에는 2,774개로 급증했으며, 대도시는 물론이고 전국 각 군청 소재지까지 침투하여 중화요리가 호떡을 중심으로 대중화 시대를 맞이했다.
조선총독부는 중화요리점을 크게 3가지로 분류했다. 먼저 호떡집은 1인 혹은 가족 경영으로 각종 빵과 과자 종류를 판매하는 곳이었다. 이보다 규모가 큰 중화요리음식점은 종업원 4-10명을 두고 우동, 잡채, 양장피 등을 판매했다. 고급 중화요리점은 10명 이상의 종업원을 두고 2층 건물의 넓은 공간에서 광동요리, 북경요리의 고급 중화요리를 판매하고 요정의 역할도 했다. 본고에서는 이 3가지를 통칭할 때는 중화요리점이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선화교의 중화요리점은 1927년과 1931년에 발생한 2차례의 화교배척사건, 그리고 1930년대 중일간의 마찰로 인한 민족갈등 그리고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과 전시통제경제로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1927년 화교배척사건 때 중화요리점은 전국적 규모가 아니라 전라북도, 충청남도, 인천부 일원을 중심으로 군중의 습격을 받아 유리와 기물이 파손되거나 일시적으로 영업을 하지 못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중화요리음식점이 감소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1931년 화교배척사건은 전국적인 규모로 발생했으며 피해의 정도가 보다 심각했다. 중화요리음식점의 경우 전국적으로 약 600개소가 감소했다. 경성의 경우, 중화요리점 점포 가운데 전체의 약 4할이 피해를 입었으며 투석 및 유리창과 문 등의 기물파손이 전체의 5할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귀국한 화교가 조선으로 점차 돌아왔으며 새롭게 중화요리점을 시작하는 화교도 증가, 1936년 말에는 1930년 수준까지 거의 회복했지만, 호떡집은 그렇지 못했다. 중일전쟁은 1931년 화교배척사건 때보다 더 높은 중화요리점 감소율을 초래했다.
전쟁 발발 이후 점차 중화요리점의 개수가 증가하지만 1931년 화교배척사건 때보다는 완만했으며, 1943년에는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전시통제경제의 강화 및 밀가루 배급제 실시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감소 추세는 조선인과 일본인 경영 요리점 및 음식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화교 중화요리점 만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