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시기 약 3만 명의 북한화교가 중국으로 귀국한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서술한 바가 있다. 그런데 그 대부분(2.8만여명)의 귀국시기가 1952년부터 전쟁이 끝나는 1953년 6월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중국정부가 화교들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라고만 언급하였다. 본문에서는 그 원인의 또 다른 하나로서 귀국 당시 북한화교들이 ‘휴관증’(携款證)이라는 화폐 휴대반출증명서를 발급받아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 측의 자료에 따르면 이 시기 중국 주조선대사관이 북한 귀국화교에게 발급한 휴관증의 액수는 인민폐 295.5억 원에 달했고, 그 외에도 금, 은, 자전거, 미싱, 라디오, 축음기, 인력거 등이 휴대반출 되었다. 중국 주조선대사관이 귀국화교들에게 정식으로 귀국증명서를 발급한 것은 1951년 4월부터였다. 그런데 그 당시 귀국하는 화교들이 북한세관에서 가지고 가던 인민폐(중국화폐)를 몰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조선대사관은 북한정부와 교섭하여 귀국화교들에게 휴관증을 발급할 것에 대하여 합의를 보았다. 당시 휴관증은 귀국증명서를 취득한 화교들 중에서 인민폐 반출이 필요한 화교들에게 한 세대 당 1장씩 별도로 발급되었다. 그러나 1951년 4월부터 8월까지 발급된 휴관증의 수는 37장에 불과했다.
이전 글에서 본 바와 같이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중국정부는 북한에서 생활이 가능한 화교들의 귀국신청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1952년 4월까지 귀국한 북한화교들은 그 대다수가 북한에서의 생활유지가 곤란한 가족들이어서 그들이 휴대 출국하는 인민폐의 액수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52년 5월 이후 중국정부가 북한화교들의 귀국신청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정책을 펼치자, 일정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화교들도 귀국증명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이 북한으로부터 반출하는 인민폐의 금액 역시 급증하게 된다. 금액이 커지자 신의주세관에서는 종래의 휴관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화교의 재산을 압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귀국화교들은 주조선대사관에 이를 급속히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다.
대사관측은 이 문제를 중국정부에 보고 하였고, 해결방안으로서 이미 실시되고 있던 휴관증의 재발급이 적합하다는 소견을 첨부했다. 중국정부의 중재위(中財委)와 외교부는 귀국 화교들이 소지하고 있던 인민폐 문제에 대하여 네 가지 방안을 논의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종군 전문상점에 일임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종군 전문상점의 인민폐 환전 업무는 중국지원군 부대 내부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민간에서 유통되는 인민폐까지는 책임을 질 수 없으므로 이 방법은 실행이 불가능했다.
둘째, 국경지역에 환전소를 설치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이미 단동(丹東)에 환전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셋째,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조중 양국 간의 은행을 통해 송금하는 방법이 있지만, 북한정부가 조선 역내에서 인민폐의 합법적 송금을 인정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합의는 어려운 상황이며, 또한 이 방법을 추진하려면 조선은행 측과 상의해야 하므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넷째, 위의 여러 방법의 실시가 어려운 현 상황을 고려하여 중국정부는 주조선대사관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즉, 귀국화교들이 자신의 재산으로서 인민폐의 반출을 허가해줄 것을 북한정부와 교섭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중국정부가 북한화교의 인민폐 문제에 대하여 협의하고 있을 때, 주조선대사관은 귀국을 서두르는 화교들을 위하여 북한정부와 교섭을 계속하였으며, 1952년 5월부터 6월까지 휴관증 163장(반출금액 10억2,847만원)이 발급되었다. 또한 휴관증의 발급이 늦어진 23억 원에 대해서는 임시조치로 화교연합회가 직접 신의주세관과 교섭하여 휴관증 없이 중국으로 반출되었다.
1952년 8월 4일 중국정부는 북한화교의 인민폐 휴대 귀국을 받아들이며, 이에 대하여 북한정부와 교섭할 것을 주조선대사관에 전달했다. 이에 따라 대사관 측은 북한 외무성과 문제를 상의했고, 이후 발급되는 모든 휴관증은 북한 외무성의 서명을 받는 것을 의무화했으며 북한 외무성장의 동의를 받았다.
1952년 9월 11일 중국 세관총서(稅關總署)는 “중조국경지역 각 세관에게 귀국 화교들이 휴대 입국하는 인민폐에 대하여, 주조선대사관에서 발급한 휴관증과 위조화폐가 아니라는 국내 지방 인민은행의 감정 보고가 있으면 반입을 허가한다”라는 지시문을 하달했다. 즉, 1952년 9월 중순 귀국화교들의 인민폐 휴대 입국이 합법화된 것이다.
실제로 1952년 하반기의 통계를 보면, 북한화교들이 취득한 귀국증명서의 수는 4,072장으로 최대의 규모였고, 휴관증도 3,407장이 발급되었다. 그 금액은 196억 1,261만 원에 달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기 처음으로 귀국화교들이 금 12kg을 휴대하여 중국으로 귀국했다는 것이다. 이듬해에는 화교가 귀국할 때 휴대할 수 있는 재산의 종목이 더욱 다양해졌다. 1953년 3월부터 5월간에 화교들이 휴대 반출한 재산은 현금 66억 원, 금 13.9kg, 은5.25kg, 인력거 108대, 자전거 305대, 미싱 485대, 라디오 62대, 축음기 22대에 달했다. 이처럼 한국전쟁시기 북한화교는 중국정부의 적극적인 교섭으로 그들의 재산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진 1 평양 1천명 화교의 중국 국경절 경축 사진
출처: 북한의 중국어신문 『전우(戰友)』 1951년10월1일자
사진 2 조국보위후원회 중앙위원회 발급의 조국보위복권
출처: 북한의 중국어신문 『전우(戰友)』 1951년10월8일자
【북한화교와 한반도 13】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