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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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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기업과 관리(官利) 관행 _ 김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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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상해 와이탄의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 건물


1872년 상해에 설립된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은 전근대시기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근대적 기업(公司)이라 할 수 있다. 이 기업은 경영 체제를 국영과 민영의 혼합형식(官督商辦)으로 전환한 이후, 일반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자본을 모집함으로써 근대적 주식회사(股份公司)의 효시로 평가되고 있다. 일반인들이 주식(股票)을 매입하여 주주(股東)가 되는 방식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을 서구의 주식회사 제도와 완전히 동일하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오히려 서구의 주식회사 제도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중국 현지의 전통 및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중국 특유의 기업제도(公司制度)로 변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식회사에서는 주식을 매입함으로써 주주가 되고, 비로소 주주와 기업 사이에는 이익과 손실을 공유하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이러한 상호 관계는 이윤의 분배로 이루어지는데, 당해 연도 이윤의 다과에 의해 배당이 결정된다. 그러나 근대 중국에서는 독특하게도 관리(官利)를 분배하는 제도가 존재했으며, 이는 서양의 주식회사에서 이윤을 분배하는 것과는 다소 성격을 달리한다.


관리(혹은 官息, 正息, 股息, 股利)는 기업 경영의 회계 연도가 끝날 때에 자본의 출자(股本)에 대해 선이자격인 지분을 우선적으로 배분하는 것이다. 이윤의 유무, 다과와 관계없이 반드시 지급해야 하는 항목이기 때문에 관리의 지급 이후에 비로소 기업의 영업이익을 결산하게 된다. 주주가 자본을 투자하여 주식을 구매하게 되면 그날부터 계산하여 관리를 지급하게 된다. 관리의 이율은 일반적으로 연리(年利)로 계산하며, 기업의 형편과 직종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1870-80년대에는 1분(分), 청말에는 8리(厘), 1920-30년대에는 6리 정도의 수준이었다. 관리를 지급한 이후 수익이 부족하면 결손을 내는 것이고, 수익이 발생할 경우 비로소 투자액에 비례하여 분배하게 되는데, 이를 홍리(紅利, 餘利)라 불렀다. 따라서 주주는 단순한 투자자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채권자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갖게 된다.


근대 중국에서 관리는 관행적으로 시행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장정(章程) 안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었다. 심지어 어떤 기업은 주식에 관리의 규정을 명확히 기재하기도 했다. 청대이후, 기업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부에 등록을 신청해야 했는데, 이 때 반드시 기업의 장정을 첨부하게 된다. 기업의 등록은 남양대신과 북양대신 등 관방의 비준을 얻은 이후에 비로소 효력을 갖게 된다. 심지어 중요 기업의 경우는 황제의 비준까지도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관리’라는 명칭의 유래는 ‘관방의 심사와 비준을 얻은 이율’이라는 의미를 내포함으로써 붙여진 명칭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미 1872년에 윤선초상국이 발행한 주식에는 “자본 은(銀) 100만 량을 모집하며 1천 고(股)로 나누어 1고는 1천량으로 정하며, 매년 1분(分)의 이자를 지급한다”라고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윤선초상국을 시작으로 이와 같은 관행은 보편적으로 확산되었다. 관리의 규정을 기업의 장정이나 심지어 주식에 기재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공개 선포함으로써 관리의 이율과 배분이 국가권력의 법률적 보호를 받고 있음을 환기하고, 이를 통해 제도의 공식성과 수익의 안정성을 보장하려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만청 시기와 북양군벌정부 시기, 그리고 남경국민정부 시기에 걸쳐 정치체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관리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으며, 연속성을 가지고 시행되었다. 예를 들면, 중국교통은행은 1907년 설립되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까지 약 42년 동안 청조의 우전부(郵電部), 북양정부의 재정부(財政部)와 남경국민정부 재정부의 비준을 통해 총 5차례에 걸쳐 공사 장정의 내용을 개정하였다. 매번 개정된 장정은 내용에 다소 변화가 있기는 하였지만, 관리의 배분 규정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민국시기에 들어서면서 관리제도는 국가의 법률 속에도 반영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를 들면, 1914년 북양정부가 반포한 ‘공사조례(公司條例)’ 제186조는 주주의 투자에 대한 관리의 배분을 명문화하였으며, 1929년과 1946년의 공사법(公司法) 역시 관리 규정을 두었다. 관리가 기업의 장정뿐 아니라 국가권력의 법률적 보호 하에서 보장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중국기업에서는 왜 이와 같은 선이자 지급과 유사한 관리가 관행적으로 존재했을까? 관리의 출현은 중국 근대 사회자본의 부족과 고리대의 보편적 존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전통 중국사회에서 자본은 주로 공채와 토지, 고리대 등에 투자되었다. 특히 예산의 부족으로 각 정부는 높은 수익을 보증하는 공채를 발행하였다. 공채의 수익률은 8% 정도로 규정되었으나, 발행 시 할인을 통해 선이자를 지급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20% 정도의 높은 수준이었다. 공채와 고리대의 높은 수익률이 존재하는 이상 금융기관으로서는 위험성이 상존하는 기업에 대한 투자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출의 경우에도 고리(高利)로 위험을 보상하려 하였다. 기업에 대한 상해, 천진 등 은행의 대출 이율은 낮게는 12.5%, 높게는 15-16%에 달하였다. 대출을 위해서는 공장건물, 토지, 기계설비 등을 담보로 설정해야 했으며, 더욱이 타인이나 타 기업의 보증을 요구하는 가혹한 조건이 부가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기업으로서는 투자에 대한 이자를 명확히 기재하여 영업상의 이익과 손실에 관계없이 반드시 지급한다는 장정을 마련한 것이다. 고리대의 보편적 존재 속에서 사회로부터 자본을 근대 산업에 대한 투자로 유인하기 위해 만들어 둔 장치가 바로 ‘관리’였던 것이다. 청말 이래 사회자본이 고리대와 토지에 집중되고 유휴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기 어렵게 되자, 투자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투자에 대한 이자의 안정성을 보장함으로써 자금을 기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마련해 둔 장치였다. 기업투자로 이끌기 위해서는 당연히 높은 이윤을 보장해야 할 뿐만 아니라 관리관행의 실행을 통해 자본가의 이윤을 안정적이고 제도적으로 보장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관리는 기업을 창립할 때는 사회자본을 근대적 기업에 대한 투자로 전환시킨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경영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중국기업은 관리를 우선 배분한 이후에 비로소 생산을 위한 적립과 감가상각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경영자금의 부족은 기계설비의 적절한 유지, 보수를 저해하였으며, 결국 생산비의 제고와 제품의 품질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열악한 설비로 말미암아 기계의 파손, 마모 등의 결함이 종종 발생하였고, 성능이 낮은 구식 기계의 사용은 낮은 생산성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생산된 제품을 가능한 한 단기간 내에 신속히 판매하여 자금을 회수함으로써 관리와 차입금을 충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생산 제품 역시 시장의 수요에 급급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생산의 전문화를 어렵게 만들었으며, 제품의 완성도와 통일성을 저해하였다. 대생사창의 경우 1916년도 97,097원의 적자가 났고 생산을 위한 준비금도 적립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원인은 관리로 먼저 16만 원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만일 관리를 지불하지 않았다면 같은 해 대생사창은 적자가 아니라 오히려 62,920원의 흑자를 달성한 셈이다.


관리는 근대기업의 창설과 발전의 과정에서 일정 부분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일단 불황의 시기에 접어들게 되면 관리의 부담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중국경제 전반의 불황을 심화시키고 나아가 기업의 연쇄 도산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1930년대 초 세계공황의 여파가 중국에 파급되면서 수많은 중국기업이 도산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외국자본에 매각되었던 상황은 바로 관리관행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았다.

 

관습과 중국문화 2


김지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www.360doc.com/content/14/0830/22/9874889_405908637.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