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서울 종로에는 명인촌(明人村)이란 마을이 있었다. 지금의 연지동 1번지에 소재한 이 마을은 명·청(明·淸) 교체기에 중국에서 조선으로 망명한 산동 지난(濟南) 출신 유민과 그 후손이 대대로 거주했던 곳으로,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백여 세대가 살았다고 한다. 개중에는 명나라에서 큰 벼슬을 했던 유신들도 있었다. 일컬어 구의사(九義士)라고 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제남 왕씨’의 시조인 왕이문(王以文) 또한 그중 한 명이다. 경기도 가평에 가면, 이들을 모시는 사당이 하나 있다. 조종암대통묘(朝宗巖大統廟)가 그것이다.
이 사당은 처음에는 임진왜란 시절 조선에 파병을 해준 명나라에 대한 보은의 차원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구의사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자신들의 선조에 대한 제를 지내게 되면서 대통행묘(大統行廟), 구의행사(九義行祠)란 이름을 얻었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이른바 ‘구의사종친회’란 이름으로 이곳에서 선조들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어찌 보면, 과거 명나라 유민들은 근대개항과 함께 산동에서 한반도로 대거 유입된 지금의 한국화교의 앞선 조상쯤 된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국 산동의 지난은 우리와 전혀 연이 없는 곳이라 볼 수 없다.
그런데 지난에 대한 우리의 인상은 4박5일짜리 관광패키지 상품 중에 잠시 들렀다 가는 기착지쯤으로 남아있는 게 사실이다. 산동 연해에 위치한 칭다오(靑島)나 옌타이(煙台)는 차치하더라도 심지어 웨이하이(威海) 만큼도 주목받지 못하는 도시가 바로 지난이다.
지난성 북부에 위치한 대명호는 많은 샘물이 모여 이루어졌다. 대명호의 존재로 성벽의 북문은 만들
필요가 없게 되었다. 표돌천과 더불어 ‘천성(泉城)’ 지난의 주요 명승지 중 하나이다.
표돌천의 지하수가 용출되는 모습
표지석은 명나라 가정(嘉靖)16년(1537) 제남부 지부가 건립했다.
산동내륙에 위치한 지난은 72개의 명천(名泉)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도시이다. 지난을 ‘천성(泉城)’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지난 제일의 물맛이라며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이란 이름을 하사한 표돌천(豹突泉)이 제일 유명하다. 이 표돌천은 샘물기둥이 1m 높이까지 용출하는 장관을 이루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19세기 말까지 지난 최대의 정기시장이 형성된 상업중심지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어찌되었든, 이런 등등의 명성 때문인지 표돌천은 현재 중국정부가 지정한 5성급 관광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지난은 지금도 산동의 성도(省都)이지만, 산동의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된 것은 꽤 오래되어 멀리 금(金)이나 원(元)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북송(北宋)시기까지만 해도 산동경제의 중심은 칭저우(靑州)란 곳이었다. 하지만 이후 지난이 운하를 통해 직접 바다로 연결되어 소금집산지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명나라 이후로는 칭저우를 아래로 밀어내고 산동 제일의 도시가 된 것이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중국은 이른바 해금(海禁)의 시대가 종결되고 개항(開港)의 시대를 맞이했다. 상하이(上海), 닝보(寧波)를 비롯한 창장(長江) 이남의 연해도시들이 제국주의열강에 의해 강제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내륙의 지난은 이들 개항장과는 달리 1904년 스스로 문호를 개방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자오저우(膠州)와 지난을 잇는 자오지철도〔膠濟鐵路〕가 개통된 때였다. 지난이 정치의 중심이자 무역의 요충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철도의 개통 덕분이다. 철도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지난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염상(鹽商)의 몫이었고, 상업네트워크의 핵심은 톈진(天津)이었다. 그러나 철도가 개통되면서 지난은 톈진이 아닌 상하이와 주로 연결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국제무역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04년 지난 상부(商埠)와 구성(舊城) 지도
오른쪽 구성 북쪽에 대명호가 보이며, 진포철로와 산동철로(교제철로)가 나란히
구성 북쪽에서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지점에 상부가 설치되어 있다.
사실, 지난의 개항은 19세기 말 칭다오에 진출한 독일세력을 견제할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개항을 통해 지난에는 외국계기업뿐만 아니라 각국의 영사관들이 속속 진입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개항장 일대를 중심으로 서양식 상업건축이나 서양식 위락지역이 들어섰다. 개항 당시, 20여개에 불과했던 외국계기업이 1926년에는 210여 개로 증가했고, 지난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수도 3천 명이 넘을 정도로 계속해서 증가세를 보였다. 그 결과, 1920년대 지난은 옛날의 삼류 상업도시에서 산동내륙의 상업중심지이자 근대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15년에 걸친 독일의 산동식민사는 정지되었지만 곧바로 산동은 일본의 차지가 되었다. 독일이 보유하고 있던 산동에서의 모든 권익의 대체자가 되고자 했던 일본은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에 ‘21개조 요구’를 강요했다. 또 내친 김에 일본은 지난을 무력으로 점령함으로써 중국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굴욕적인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고, 이 소식이 중국 전역에 알려지면서 오사운동이 촉발되었다. 당시 지난에서도 일본에 항의하는 집회와 청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결국 지난은 일본의 주요 침략지의 하나로 전락하는 비극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결정적 사건이 바로 1928년 5월에 일어난 ‘지난사건(濟南事件)’이었다. 당시 중국은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각지에서 이른바 군벌(軍閥)들이 준동하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이에 국민당(國民黨)은 1926년부터 장제스(蔣介石)를 중심으로 국민혁명군을 조직해 군벌을 몰아내기 위한 이른바 북벌(北伐)을 개시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북벌군이 산동에 이르렀을 때, 일본도 이 지역에 거주하는 2천 명에 달하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지난과 칭다오에 출병했다. 일본의 산동출병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2차, 3차의 출병으로 이어졌다. 결국 일본은 중국의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포함해 3천 명의 사상자를 낳는 대참사의 악역을 자임했다. 어쩌면 이 지난사건은 1931년 9·18 만주사변에서 1945년 일본 패망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일본의 산동침략사의 전초전 성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로부터 지난은 일본의 식민도시가 되었다.
지난사건(5·3지난참안) 추도비.
1928년 5월 3일 목요일(星期四)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28년 지난사건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사십 가구 중에 열세 가구도 각종 약탈 등 피해당사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약탈의 주체가 중국인인지 일본군인지는 기록만으로는 특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이를 기화로 지난의 조선인들은 자체적으로 제우회(濟友會)를 조직해 구제대책을 마련했다. 조선의 각 신문사에 참상을 알리고, 각 단체에 구호를 요청하는 것도 제우회에서 할 일이었다. 이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수많은 조선인 이산(離散)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사촌인 윤동주와 함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젊은 독립운동가 송몽규도 한때 지난과 연을 맺은 바 있다. 민족시인 윤동주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송몽규는 근래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통해 재조명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송몽규와 지난의 인연은 1935년부터 시작되었다.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윤동주와 함께 은진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송몽규는, 독립의식에 감화되어 1935년 초 백범 김구가 국민당 장제스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하던 난징(南京)의 중앙육군군관학교 특설 한인반(韓人班) 2기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고 있던 국민당 정부의 한인반에 대한 재정지원이 중단되어 반이 해산하게 되자, 송몽규는 그해 11월 난징을 떠나 지난의 조선독립 단체를 찾아가게 된다.
마침 지난에서는 독립운동가 이웅이 활동하던 시기였으므로 송몽규는 그의 휘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1936년 지난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풀려난 송몽규는 이때부터 요시찰인물 딱지가 붙어 다녔고, 급기야 1943년 교토제국대학 학생시절 조선인 독립운동 학생 주동자로 체포되어 해방되기 몇 개월 전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지난에서 활동했던 시절은 실질적으로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첫 시기로 그의 일평생에 중요한 시점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송몽규 외에는 지난에서 활동했던 제우회나 조선인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명나라 유민 제남 왕씨 일행이 망국의 한을 품고 타국인 조선에 정착해 살면서도 명의 신민(臣民)이라는 의식을 버리지 않은 것처럼, 근대시기에는 반대로 조선의 유민들이 망국의 한과 독립의 열망을 품고 지난을 무대로 활동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국도시이야기 11】
김두현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김지환·손승희 엮음, 『중국도시樂』, 학고방, 2017에 수록된 글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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