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베이(河北) 동북부에 자리한 청더(承德)는 수도 베이징에서 약 25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우리에겐 ‘청더’보다는 러허(熱河) 즉, ‘열하’가 훨씬 더 친숙한 이름일 게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 박지원의 연행록(燕行錄)인 『열하일기(熱河日記)』의 바로 그 열하 말이다. 연행록이란 조선시대에 쓰인 일종의 중국기행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때의 연(燕)은 베이징의 옛 이름인 연경(燕京, 옌징)을 뜻한다. 그런데 박지원은 왜 자신의 연행록 제목을 ‘연경일기’가 아니라 ‘열하일기’라 정한 것일까.
박지원은 1780년 팔촌형뻘 되는 박명원을 따라 만수절(萬壽節) 사절단의 비공식수행원 자격으로 연경에 갔다. 만수절은 중국의 황제나 황태후의 생일을 일컫는데, 그해 8월 13일이 바로 청나라 황제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이었던 것이다. 사절단이 연경에 도착한 것은 압록강을 건넌지 40여일만인 음력 8월1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열하로 이동해야 했다. 남쪽지방으로 순행(巡幸, 황제의 지방순시)을 떠났던 건륭제가 마침 이즈음에 열하에 머물고 있었고, 내친 김에 이곳에서 자신의 칠순잔치를 치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절단은 여독이 채 가시기도 전인 8월 5일 다시 연경을 출발해 나흘만인 9일에 열하에 닿을 수 있었다.
당초 박지원은 연경에 그대로 남아 시간을 두고 천천히 청나라 수도를 돌아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열하는 처음이니 한번쯤은 가보는 게 좋겠다는 주위의 권유도 있고 해서 열하 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열하일기』 중에서도 명문으로 회자되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와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는 모두 열하로 가는 노정에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만일 박지원이 열하에 가지 않고 연경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 글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열하 즉, 청더는 옌산산맥(燕山山脈)의 고지대에 위치해있어 한여름에도 섭씨 20도를 넘지 않는다. 명나라 이후 줄곧 황제의 피서지로 애용된 것은 이 때문이다. ‘뜨거운 강’ 즉, ‘열하’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온천수 탓에 강의 수온이 높아 겨울에도 잘 얼지 않는 데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청나라 황제들은 펑톈(奉天, 지금의 瀋陽으로 청나라 초기 수도)으로 제를 지내러 가는 도중에 종종 청더에 머물렀다. 풍광도 아름다웠지만 무엇보다 여름에 시원했기 때문이다. 강희제(康熙帝)는 1703년 이곳에 아예 피서산장(避暑山莊)이란 행궁을 짓기까지 했다. 이때부터 황제들은 여름(대개 음력 단오부터 중추절까지)이 되면, 이곳에 머물며 정무도 처리하고 외국의 사신도 접견했다. 이른바 청나라의 여름수도(淸朝夏都)였던 셈이었다. 피서산장이 완공된 것은 건륭제 때인 1790년이었다.
강희제 친필 피서산장 현판
피서산장 내의 열하비석과 주변
박지원 일행이 그랬듯, 피서산장에는 중국의 황제를 알현코자 하는 사신들이 무시로 드나들었다. 1793년 피서산장에서 치러진 건륭제의 83세 수연(壽宴) 때에는 영국 최초의 특명전권대사로 유명한 매카트니(G.L. Macartney)사절단이 이곳 청더를 찾기도 했다. 당시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과 중국시장 개척을 모색하고자 청나라를 방문한 매카트니 일행은 비록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청나라의 다양한 인사들과 접촉하며 중국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수집해갔고 그 결과, 향후 중국침략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다시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돌아가 보자.
박지원은 당시의 청더를 ‘천하의 두뇌’라고 했다. 제2의 수도로서 자리매김했던 청더의 역할을 잘 파악한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청더는 북쪽으로는 몽골과 조선, 서쪽으로는 티베트를 통제할 수 있는 지리적·군사적 요충지였다. 또한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발상지인 만주와도 연결되는 지점이었다. 이런 이유로, 청더는 청나라 황제들이 매우 중시하는 지역이었고 강희제와 건륭제는 순행 때마다 어김없이 이곳을 들르기도 했다.
청더 북쪽의 웨이창현(圍場縣)에는 옛 황실의 사냥터였던 무란웨이창(木蘭圍場)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사냥은 물론 대규모 군사훈련까지 가능했다고 한다. 박지원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썼다.
황제가 북쪽 변방에 머물며 사냥을 다니면, 여러 오랑캐들이 감히 남쪽으로 내려와 목축을 하지 못했다. 황제가 가고 오는 날짜는 풀이 푸르고 마르는 것을 기일로 삼으니, 이름을 피서라고 붙인 까닭은 이 때문이다. (『熱河日記·漠北行程錄序』, 김혈조 역, 『열하일기』 참조)
‘풀이 푸르고 마르는’ 기간이 여름철과 겹쳐 피서라고는 했지만, 황제들의 청더 행은 단순히 피서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박지원은 열하에 머무는 기간 동안의 소회를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내 평생 기이하고 괴상한 볼거리를 열하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 그 이름을 알지 못했고, 문자로는 능히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모두 빼고 기록하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熱河日記· 山莊雜記』, 김혈조 역서 참조)
황제의 칠순이니만큼 특별히 준비된 행사나 볼거리가 꽤 많았을 게다. 그렇지만 특별히 박지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각종 과학기술과 새로운 문물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청나라의 선진문명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작은 중화〔小中華〕’라 칭하며 청나라를 무시하는 당시 조선의 유림들이 박지원에겐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으리라. 박지원이 누구던가. 청나라의 발전된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북학파(北學派)의 태두 아니던가.
박지원은 여전히 ‘열하’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열하, 즉 러허는 옹정제(雍正帝) 때 청더로 이름을 바꾸었다. 우리가 통상 서경(書經)으로 알고 있는 중국의 고전 『상서(尙書)』 「주관(周官)」 편에 보면 ‘승수덕택(承受德澤, 윗사람이 베푸는 은혜를 받든다)’이란 글귀가 나온다. 옹정제는 부왕 강희제가 살았으면 팔순이 되었을 1733년, 부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청더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민간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돈다. 강희제가 죽기 전에 남긴 유조(遺詔)에는 그가 아끼던 열넷째 왕자(十四子)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쓰여 있었는데 옹정제가 십(十)자에 가필을 해 글자를 바꾸고 넷째 왕자(四子)인 자신이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부왕의 은혜를 입어 계승한 것임을 널리 알리고자 러허의 이름을 청더로 바꿨다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청더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바로 피서산장과 외팔묘(外八廟, 와이빠먀오)이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지금도 중국 국내인은 물론,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피서산장은 궁궐과 호수 그리고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총면적이 564만 제곱미터로 베이징 이허위안의 약 2배에 이르고, 내부에는 100여개의 건축물이 있다. 이를 둘러싼 성벽의 길이도 약 10킬로미터나 된다.
피서산장 조감도
피서산장 정문 앞에 서면, 문의 이름인 여정문(麗正門, 리정먼)이 오른쪽부터 차례로 만주어, 몽골어, 한자, 티베트어, 위구르어로 표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5족(만주족, 몽골족, 한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일체주의에 따른 것으로, 이민족에 대한 청나라의 포용과 유화정책을 상징한다.
피서산장의 정문인 여정문
피서산장 남쪽에 위치한 궁궐구역은 황제가 국사를 처리하는 집무실과 거주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향나무의 일종인 남목(楠木)으로 지어진 이 목조건물들은 대체적으로 소박한 건축양식과 실내장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열하일기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피서산장 전체면적의 80%를 차지하는 정원구역은 호수, 평원, 산지 등으로 되어 있다. 주로 황제가 산책을 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이 정원은 쑤저우(蘇州)의 졸정원(拙政園, 줘정위안)과 유원(留園, 류위안) 그리고 베이징의 이화원(頤和園, 이허위안)과 함께 중국 4대 정원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화원의 탄생 역시 이 피서산장과 관련이 있다. 제2차 아편전쟁 당시 황제였던 함풍제(咸豐帝)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1860년 피서산장으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그곳에서 병사했다. 그러자 함풍제 사후 권력을 잡은 자희태후(慈禧太后) 즉, 서태후(西太后)는 자신의 아들인 함풍제가 개시한 피서산장의 보수공사를 모두 중지하고 베이징에 따로 이화원을 만들었다. 함풍제가 죽지 않고 피서산장의 보수공사를 계속했다면, 베이징을 대표하는 황실정원 이화원은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서산장의 정전인 담박경성전(澹泊敬誠殿)의 내부
피서산장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외팔묘는 피서산장의 성벽 밖에 있는 8개의 사원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인사(溥仁寺)와 이미 없어진 부선사(溥善寺), 보녕사(普寧寺), 안원묘(安遠廟), 수미복수지묘(须彌福壽之廟),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 수상사(殊象寺), 광연사(廣緣寺) 등이 그것이다. 외팔묘는 한족(漢族)은 물론, 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 소수민족의 건축양식이 한데 어우러져 이국적이면서도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 또한 청나라의 5족 일체주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청 조정은 소수민족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고 국가적 통일을 공고히 하고자, 통치기간 내내 이들에 대한 유화정책을 실시했다. 몽골과 티베트 민족의 정신적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라마교를 허용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들 가운데 특히 왕래가 활발했던 것은 몽골이나 티베트의 사신들이었다. 청 조정에서 이들의 종교 활동의 장소인 사원(寺廟)을 건립해주었을 정도였다. 1711년부터 1828년까지 청더와 그 외곽에 무려 43개의 사원이 들어선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자주 청더를 드나들었는지 알 수 있다.
외팔묘 가운데 수미복수지묘는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해 열하에 온 티베트의 판첸라마 6세를 위해 건립된 것으로, 티베트의 타시룬포를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 박지원 일행도 건륭제의 주선으로 판첸라마를 만났던 모양이다. 『열하일기』를 보면, 당시 판첸라마와 조선사절단과의 만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수미복수지묘
외팔묘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보타종승지묘는 1767년에 세워졌다.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전을 모방해 만들어졌다 해서 작은 포탈라궁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티베트의 달라이라마가 청더에 왔을 때, 바로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보타종승지묘
이렇게 볼 때, 단순히 더위를 피하는 곳처럼 들리는 이름과 달리 피서산장은 당시 청나라가 변경의 소수민족에 대해 어떠한 정책을 펼쳤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외팔묘는 그 자신이 이민족으로서 중원으로 진출해 제국을 건설한 청조의 개방성과 자신감을 잘 보여준다.
이 정도면 청더를 청나라 제2의 수도라 할 만 하지 않을까.
【중국도시이야기 10】
허혜윤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김지환·손승희 엮음, 『중국도시樂』, 학고방, 2017에 수록된 글임.
참고문헌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열하일기』 전3권, 돌베개, 2009.
張羽新 張双智, 『清朝塞外皇都:承德避暑山莊和外八廟研究』, 學苑出版社, 2013.
杜江, 『清帝承德离宫』, 紫禁城出版社,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