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전북 익산시 인화동의 주단골목. 고급비단과 이불을 판매하는 상점 20여개가 집중된, 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주단포목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 주단포목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가게가 유성동(裕盛東)이다. 유성동은 지금의 자리에서 1935년 중국 산둥(山東)성 푸산현(福山縣) 출신의 추립곤(鄒立崙, 1900~1982)에 의해 설립돼 83년을 이어오고 있다. 아들이자, 2대 사장인 추본기(鄒本沂, 1925~2016)는 중국에서 태어나 거주하다 18살 때 한번 아버지 가게에 왔다. 그는 포목상 경영 수업을 받기 위해 다롄(大連)의 대형 주단포목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추본기는 해방 직후인 1948년 모친을 모시고 중국의 국공내전을 피해 익산으로 이주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추립곤 일가족은 만경의 화교 지인의 집으로 피란을 갔는데, 그곳에서 태어난 이가 현재의 3대 사장인 추적민(鄒積敏, 1950~현재)이다.
유성동 주단포목상점의 추적민 사장과 부인 류국아씨
추적민 사장의 가족사에는 이처럼 중국과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추적민 사장은 1974년 충남 온양 출신 화교인 류국아(劉菊娥, 1951~현재)씨와 결혼하고 지금은 둘이 유성동을 경영하고 있다. 류씨는 “1970년대와 80년대 종업원을 10여명이나 둘 정도로 장사가 매우 잘 됐다”면서 “익산뿐 아니라 삼례, 김제, 부안, 대야, 함열 등에서도 손님이 많이 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결혼할 때 신혼부부는 물론이고 가족, 친지에게 한복 등을 선물로 했고 환갑이나 칠순 잔치 때 주단포목의 수요가 대단했다”고 전했다.
익산의 주단거리에는 유성동뿐만 아니라 같은 화교 경영의 협승창(協勝昌), 덕순흥(德順興), 고려주단(高麗綢緞), 사해주단(四海綢緞)이 있었다. 정읍, 부안, 군산에도 화교 주단포목점이 성업 중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결혼 예물과 환갑·칠순 잔치 때 주단포목을 선물로 하는 경우가 급격히 줄어들고, 한복 대여가 등장하면서 이 장사는 급격히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류씨는 “요즘은 장사가 되지 않아 점원을 둘 수가 없다. 예전에는 주단만 판매했지만 지금은 이불도 팔고 한복도 대여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해 화교 상점은 거의 문을 닫고 저희 가게와 협승창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북 익산의 주단거리
유성동이 3대에 걸쳐 80년을 넘는 역사를 지속하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저희 아버님은 신용을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나쁜 상품을 좋은 상품이라 절대 속이지 말라고 하셨어요. 손님이 제일이니 정성을 다해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류씨는 추본기 2대 사장으로부터 소중한 것을 배웠다고 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화교 주단포목점 '유성동'
화교 주단포목상점의 장부는 한국인의 장부와 다른 점이 있다. 금액과 수량을 표기할 때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지 않고 중국 전통의 소주숫자코드(蘇州碼子)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숫자 ‘五’는 ‘〥’로, 四는 ‘〤’로 표기하는 식이다. 추적민 사장은 “장부를 기록할 때 이전에는 소주숫자코드를 많이 사용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면서 “그러나 저희 아버지는 그 숫자코드만으로 장부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익산의 화교 주단포목상점은 유성동 이전에 이미 있었다. 1918년 화교 주천충(周天忠)이 경영하던 홍순동(鴻順東) 주단포목상점이 설립된 것이 확인된다. 1920년대는 소명신(蕭銘新)이 경영하는 신화흥(新和興) 주단포목상점도 등장한다. 이 두 상점은 신용조사기관에 등재될 만큼 규모가 꽤 컸다. 익산의 화교 주단포목상점의 역사는 100년이나 되는 것이다. 류씨는 “내가 시집왔을 때인 1970년대 중반 주단거리에는 4~5곳의 화교 경영 상점만 있었고, 그 이후 한국인 상점이 생겼다”고 부연했다. 화교 주단포목상점이 주단거리의 역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화교의 주단포목상점 역사는 중국인의 조선 이주 초기인 18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과 인천에 광둥(廣東)성과 산둥성에서 진출한 화교 주단포목상점이 잇따라 개업했다. 이들 주단포목상점은 대부분 중국 현지의 상업자본이 자본을 투입해 설립됐다. 조선의 대표적인 주단포목상점으로 명성을 날린 서울과 인천의 유풍덕(裕豊德), 덕순복(德順福), 영래성(永來盛), 금성동(錦成東)은 산둥성 옌타이(煙台)에 본점을 두고 있었다. 주단포목상점은 상하이(上海)에서 영국산 면직물, 중국산 비단과 삼베를 대량 수입해 판매했다.
조선 시장 진출이 빨랐던 일본인 주단포목상점을 맹렬히 추격, 점차 시장을 빼앗아 갔다. 1930년 전국의 화교 주단포목상점은 2116개에 달해 일본인 상점 714개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한국인 상점은 8302개가 있었다. 화교 주단포목상점은 조선 전체의 상점 가운데 약 20%, 연간 판매액은 조선 전체 판매액의 30%를 차지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2대 상업은 의(衣)와 식(食)을 담당하는 주단포목상과 곡물상이었다. 상업의 양대 축의 하나인 주단포목상 시장의 20~30%를 화교가 장악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화교가 주단포목상의 상권을 장악한 원인은 크게 2가지다. 먼저 확실한 수입 네트워크이다. 서울과 인천의 대형 주단포목상점은 상하이에 지점을 설치하거나 출장원을 파견해 중국인 경영 상점에서 중국산 삼베와 비단을 값싸게 독점적으로 수입했다. 반면, 일본인과 한국인 주단포목상은 그러한 네트워크에 참가할 수 없었다. 둘째는 국내의 거미집 같은 화교 판매망이다. 서울과 인천의 대형 주단포목상을 정점으로 각 지역의 주요 도시에 화교 도매상, 각 군 지역에 화교 소매상이 포진해 있었다. 상점들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하면서 상호협력시스템을 구축했다.
화교 주단포목상점은 면 단위까지 침투했으며 산간지역은 화교 행상을 통해 판매했다. 대형 주단포목상점인 유풍덕은 일본산 면직물을 수입해 중국에 재수출하기도 했다. 유풍덕의 연간 매상액은 당시의 화폐로 1000만원, 현재의 시가로 환산하면 수천억 원에 달해 조선의 대표적인 주단포목상점의 지위를 차지했다. 유풍덕이 고용하는 점원은 30~40명이나 됐으며, 상점의 지배인을 ‘장꾸이(掌櫃)’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이 중국인을 비하해 말할 때 쓰는 ‘장께’는 다름 아닌 주단포목상점의 ‘장꾸이’에서 와전된 말이다.
1938년 2월 발표된 김정구의 ‘왕서방연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 한테 반해서,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퉁퉁 털어서 다 줬소.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도 띵호와. 명월이하고 살아서 왕서방 기분 좋구나. 우리가 반해서 하하하 비단이 팔아서 띵호와.” 주단포목상을 하는 화교 왕씨가 기생 명월에게 반해서 돈을 다 날렸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는 화교 주단포목상이 많고 그들이 부자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이 노래로 ‘왕서방’은 화교의 대명사가 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1925년 1월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에 등장하는 부유한 화교 채소 재배 농민도 ‘왕서방’이다.
그런데 ‘비단이 장사 왕서방’은 1930년대 들어 쇠퇴의 길에 들어선다. 조선총독부는 화교의 주단포목상점이 크게 번영하자 이를 경계했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중국산 비단과 삼베에 높은 관세를 부과해 조선 시장에서 구축하고, 대신 일본에서 생산한 일본산 비단이 시장을 독점했다. 왕서방연서가 발표된 당시 화교 주단포목상은 중국산 비단이 아니라 일본산 비단을 판매했다. 높은 관세가 부과되기 전 중국산 비단 수입은 1912~1924년에 연평균 324만원이었고, 이는 당시 조선에서 소비되는 비단판매총액의 40%를 차지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1924년 중국산 비단에 100%의 관세를 부과하자 중국산 비단은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중국산 삼베도 마찬가지다. 중국산 삼베의 수입액은 1912~1928년에 연평균 426만원으로 조선의 삼베연간소비총액의 40%에 달했다. 조선총독부는 삼베의 관세율을 점차로 인상하고 중·일전쟁 직후 100%의 관세를 부과하자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또 하나의 원인은 1931년 7월 발발한 ‘만보산 사건’의 영향이다. 흔히 만보산 사건을 만주 거주 조선인에 대한 중국 관헌의 압박과 탄압으로 기억하지만, 사실은 조선 내 200여명에 달하는 화교를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화교 주단포목상점은 문을 닫고 상점주는 중국으로 귀국했다. 화교 소매상은 화교 도매상과 수입상에 외상 거래를 하기 때문에 소매상의 귀국은 도매상과 수입상에 큰 자금 압박을 초래해 연쇄도산이 일어났다. 그리고 중·일전쟁 시기 조선총독부는 전쟁 수행을 위해 철저한 통제경제정책을 실시했다. 화교 주단포목상점은 총독부가 배급하는 직물만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영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해방 후, 유성동과 같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1970~1980년대 성수기를 누린 점포도 있었지만 이전과 같은 세력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추적민 사장은 “딸이 3명 있는데 모두 시집가고 이 장사는 우리 대에서 끝날 것 같다”고 했다. 화교 주단포목상 135년의 역사가 이대로 끝난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은 '아주경제'와 인천대 중국학술원이 공동 기획한 『아주차이나』 [仁차이나 프리즘] 8월 17일에 게재된 것을 수정한 것임.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