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공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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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자랑의 관행도 이렇게- '관족도서관(關族圖書館)'에서 _ 유장근

중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 무궁무진하고 다양한 역사의 현장을 만나게 된다. 중국 남부에 위치한 광동 여행에서도 그 다양성은 여지없다. 홍콩이 광주의 일부라고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를 발전시켰고, 광동 남부 지역 역시 사읍(四邑)이라 해서 광동중심부와는 언어, 관습 등에서 또 다른 특색이 있다. 신회나 남해로 나가면 끝도 보이지 않는 사전(沙田)이 이어지는 일망무제의 지평선을 보게 된다.


사진 1  개평시 적감진 시내에 위치한 <관족도서관>.

지역 명망가문인 관씨가 지역 사회의 문화부흥을 위해 지은 최고 수준의 도서관이다. 1931년에 완공하였다.


여하튼 중국 최남단에 자리한 이 지역은 북경에서 볼 때 머나먼 변경이지만, 동남아시아나 서양과의 관계에서는 오히려 교두보에 해당한다. 그런 까닭에 이 지역에는 중원문화 뿐만 아니라 동남아문화 및 서양문화의 요소 등이 켜켜이 남아 있는 셈이다.


사진 2  개평시 적감진 시내에 있는 <사도씨도서관>.

적감진의 명망가문인 사도씨네가 지역사회의 문화부흥을 위해 지역내 사도씨들과 해외 화교의 헌금 등을 모아 최고의 기술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다. 1925년에 완공하였으며,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글에서 주제로 삼은 것은 중국 광동성(廣東省) 개평시(開平市) 적감진(赤坎鎭)에 위치한 '관족도서관'이라는 공공시설이다. 2012년 2월에 광동성 광주시(廣州市)  일대의 역사유적을 답사하는 중에 보게 되었다. 이 도서관은 1929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31년에 낙성한 것이니 벌써 86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건물의 외형은 말 그대로, 당시 유행하던 중서절충식이다. 특히 서양의 로마식 건축 양식을 모델로 삼아 만든 것으로, 중국인들은 이를 '교향(僑鄕)의 특색'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광동이나 복건의 연해 지역은 특히 19세기 이후 들어 해외화교를 많이 배출한 곳이고, 그 덕에 이들을 통해 해외의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화시킨 까닭이다.


이 도서관은 적감진에서 위세를 떨치던 두 종족 사이에 진행되었던 오랜 경쟁의 관행과 서양문물이 비교적 일찍 도입된 지역의 특색이 결합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관씨와 사도(司徒)씨는 이 지역의 명족이었던 바, 이 중 관씨들은 적감진에 있는 두 개의 부두 중에서 상부 지역은 관씨가, 아래쪽 부두는 사도씨가 본거지로 삼으면서 오랫동안 경쟁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 종족들은 지역 사회에서 부를 축적하고 엘리트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청대 초기부터 지역 내에서 공공부분에 대한 투자를 꾸준히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청말부터 민국 초기에 걸쳐 해외에 나간 족인들이 현지에서 보고 들은 문물 중에서 도서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지역 사회의 부흥에 접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사도씨측에서 먼저 족인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해외 족인들의 자금 등을 지원받으면서 공공도서관을 짓게 된 까닭이다. 사도씨 도서관의 외양은 서구식으로서, 1923년에 시작되어 1925년에 완공하였다. 3층과 종루로 구성된 이 도서관은 1층에 열람실, 2층에 장서실과 대출실, 3층은 회의실과 귀국화교클럽 용으로 설계되었다. 정중앙에 우뚝 솟은 종루는 1926년에 다시 첨가한 것으로, 시계는 미국의 보스톤에서 제작된 명품이라고 한다. 그 아래에 '사도씨도서관'이라는 도서관 편액이 걸려있다.


사진 3  관족도서관 부근의 적감진 시가지와 부두.

관족들은 자신들의 본거지인 이곳 부두 부근에 도서관을 지었다. 적감진 시내의 건축물은 저와 같이 동서절충식의 건물들로 채워져 있어서 독특한 역사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관씨네도 사도씨네에 뒤질세라 1925년에도 바로 관족도서관건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지역내의 관족 뿐만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관족 출신 화교들, 특별히 캐나다에 진출하여 성공한 화교들까지 이 사업에 포함시켰다. 이들 위원회는 도서관 건축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 예컨대 건축양식, 내부도서, 비용, 운영 등에 관한 논의를 하면서 도서관 신축 문제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소요 비용은 대략 4만위안 정도로 예상하였고, 반년 만에 이르러  이 목표를 거의 달성하였다고 할 정도로 열의가 불타올랐다고 한다. 또한 설립 위치는 관족의 발상지인 곳으로 정하였다. 설립과정에서 관씨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지파들의 갈등으로 인해 논란이 있었지만, 최종적인 낙성까지 2년여를 소모한 결과 예정대로 1931년에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5층으로 구성된 이 도서관의 최상부에는 종루를 두었다. 당시로서는 귀한 독일산 시계를 걸었는데 현재까지도 잘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 아래층에는 저명한 인사들의 글과 서법가가 쓰고 새겨 넣은 도서관 편액을 세로로 배치하였으며, 그 아래쪽의 3개 층 건물에는 도서관의 용도에 맞게 공간을 구성하였다. 곧 1층에는 열람실과 관씨족의 신문인 『광유월보』 편집실이, 2층에는 수장도서 문물을, 3층에는 귀국한 관족들의 모임공간으로 구획하였던 것이다. 수장도서실에는 주로 사고전서나 24사와 같은 사서, 1만여 권의 도서 및 잡지 신문 등을 소장하였다.


당시 청화대 건축과 교수인 진지화(陳志華)는 이 도서관을 일컬어 도서관의 건축기술 수준이 놀랄 정도로 높고, 그 정교함이나 품질에서 원명원의 기술과 비교된다고 할 정도로 극찬하였다.


두 도서관은 당시의 건축기술을 총동원하고, 도서관의 규모나 운영에 있어서도 해외의 그것들을 본 뜬 탓에 가장 규모 있고 짜임새 있는 도서관으로 명성이 높았다.  지금도 그 때에 정성을 들여 만든 장서실 뿐만 아니라 종루, 바닥, 수평설계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며, 해외의 화교들이 양질의 자료들을 보내준 덕에 높은 수준의 도서관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현재 두 도서관은 국가 소유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지역 사회의 중요 문화기구로 기능하고 있다. 두 도서관 모두 1983년에 개평현의 중점문물보호 단위로 지정되었다.


사진 4  1920년대 개평 지역에 지어진 조루들.

토비 등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성채 형식으로 지어졌으며, 이런 건물들이 모여 하나의 동네를 이루고 있다. 극단적인 치안불안과 화교의 귀국 등과 같은 요소들이 결합하면서 새로운 경관을 만들어냈다.


이와 관련한 유네스코문화 유적으로 개평시의 조루(碉楼)가 있다. 조루란 방어형 주택으로서 외벽은 성벽처럼 구성하였고, 출입문을 봉쇄하면 어느 누구도 이 건물에 출입하기가 어려웠다. 내부에서는 외부의 공격에 오랫동안 잘 견딜 수 있도록 각종 물자를 비축하였고, 방어하기 알맞은 위치에는 공격용 시설을 두어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건설하였다. 이 조루 역시 이 지역 출신 화교들이 귀국한 이후에 지은 것이  다수이고, 형식 자체가 서양의 성탑과 유사하기 때문에 광동이 받은 서양문물의 영향이 물씬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개평시나 적감진이나 두 곳 모두 광동성에서도 변방의 가난한 동네에 속한다. 적감진이 비록 대내외 교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약간의 융성함을 누렸다고는 하지만, 그 교역의 규모나 융성함이 광주와 같은 중심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특히 1920년대는 북경의 중앙 정부의 통치가 제대로 미치지 않아 비적들이 횡행하였고, 개평의 조루는 그 불안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개평은 그만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낙후'된 곳이었다.


그럼에도 지역의 명망가들은 지역 내에서 혹은 해외에서 돈을 벌어 도서관 짓기 등, 지역의 공공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거금을 투자하였다. 말하자면 지역사회내의 경쟁이 집단간의 무장투쟁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저와 같은 문화적 자존심을 건 싸움으로도 승화되는 것이다.


이 건물을 보면서 나는 중국이 계속 강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게 된 요소는 바로 이러한 지역 엘리트들의 공공 의식에 대한 열망과 그에 따른 경쟁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발전은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에 좌우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지역 내 엘리트의 수준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오랫동안 근대 중국의 지역 사회에 대해 연구해온 까닭이며, 잠정적으로 내리게 된 결론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7】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