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사회는 독재사회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이든 공산당 독재이든 스스로가 독재임을 천명한다. 그러다 보니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의사결정이 지도자에 의하여 독단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시진핑 1인체제에 대한 논란은 결국 중국의 정치체제가 최고지도자 1인에 의하여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체제라는 가정과 관련된다. 중국 CCTV가 전국으로 방송하는 7시 연합뉴스(新聞聯播)가, 1980년대 우리의 “땡전 뉴스”처럼 “시진핑 총서기”로 시작하는 것도 중국이 권위주의체제임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같은 최종적 의사결정권을 갖는 강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게다가 민주사회인 우리도 대통령이나 기업총수는 물론 기관의 우두머리가 한마디 하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고 따르는 처지인데, 중국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할 리가 없다는 심리도 있을 것이다.
실제 문화대혁명기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의견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요즘 중국에서도 지도자가 한마디 하면 이견을 제기할 수 없다는 의미의 ‘일언당(一言堂)’이라는 표현이 공공연히 사용되는 것도 지도자의 독단적 전횡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에서의 의사결정이 지도자의 독단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마오쩌둥 시대 중국의 당내 정치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꼽는 것은 1959년 발생한 루산(廬山)회의이다. 펑더화이(彭德懷)는 루산회의에서 대약진운동을 비판하였다가 반당으로 몰려 숙청되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루산회의를 중공의 정치국에서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비판할 수 없게 된 당내 정치의 비정상화의 계기로 평가한다. 실제 루산에서는 마오쩌둥의 비판에 대하여 펑더화이는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펑더화이의 정상적인 비판과 반박이 반당으로 몰리면서, 중공의 최고위층에서도 더 이상 최고지도자의 결정에 대한 이견이나 비판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1959년 루산회의 현장
루산회의는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중공에서 최고위층에서도 더 이상 자유로운 논쟁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중공 고위층 정치의 비정상화의 시점으로 보는 것은 최소한 그 이전에는 내부의 논쟁과 비판이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루산회의 이후 마오쩌둥 1인이 절대적 결정권을 갖는 체제가 형성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부에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1964년 말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류샤오치를 비판하면서 “당신이 얼마나 대단해! 내가 손가락 하나면 당신쯤은 타도할 수 있어!”라고 하는데, 그러한 비판 자체가 내부적 논쟁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혁 시기에는 말 그대로 비로소 누구도 찍소리 못하고 마오쩌둥의 말이 ‘최고지시’가 되었다.
그러나 문혁이 끝난 후 문혁 적폐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집단지도체제가 제기되었다. 집단지도체제의 핵심은 의사결정을 1인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1표를 갖는 위원들의 투표를 통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 각급 당 위원회에서 모두 그렇게 결정한다.
물론 집단지도체제에서 반드시 1인1표에 의하여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개혁초기 중대한 문제는 덩샤오핑이나 천윈같은 원로들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도 1인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3차 당 대회의 인사 결정이다. 덩샤오핑은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물러나면서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7인으로 구성하려고 했다. 덩샤오핑의 원래 명단은 완리(萬里)와 톈지윈(田紀雲)을 포함한 7인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대로 결국 5명으로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자신의 뜻을 실현할 수 없었던 덩샤오핑은 완리에게 “당신이 도대체 관계를 어떻게 했기에 인사가 그렇게 어렵냐”고 힐난했다. 덩샤오핑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최종적인 의사결정에 대한 것이었다면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더 극적인 이야기가 있다. 1988년 5월 가격 개혁 과정에서 발생한 자오쯔양 총서기와 경제전문가들 사이의 논쟁이 그것이다. 가격개혁은 1988년의 핵심적 문제였다. 자오쯔양은 가격개혁 문제를 결정하여 위하여 10여명의 장관들과 협의를 하면서 경제학자인 류궈광(劉國光)과 우징롄(吳敬璉)을 참석시켰다.
급진적인 가격개혁을 주장했던 자오쯔양에 대하여 학자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10여명의 장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서기와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격렬한 논쟁을 했다. 결과적으로 자오쯔양의 의견이 채택되어 가격개혁을 진행하였지만 극심한 물가상승으로 실패하였다. 그 후 1988년 12월 자오쯔양은 류궈광과 우징롄 및 쉐무차오(薛暮橋)를 불러 최근 1년간 인플레이션 문제에서 과오를 범했다며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이에 대하여 쉐무차오는 1년이 아니라 최소한 3년은 잘못했다고 말한다.
의사 결정 과정에서 최고지도자와 학자들과의 논쟁도 놀랍고 정책의 과오에 대한 최고지도자의 인정은 더더욱 놀랍다. 물론 이런 일이 통상적인 일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중국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지도자가 결정하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논쟁이 있는 체제라는 것이다.
중국이 권위주의체제이자 폐쇄사회이기 때문에 ‘내부’에 대한 온갖 억측이 난무한다. 그러나 가끔 예외적으로 드러나는 가려진 ‘내부’가 억측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놀랍다. ‘내부’는 음모와 술수의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논쟁이 있다. 당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결정된 의사의 권위의 배후에 있는 의사결정과정에서의 자유로운 논쟁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중국에서 ‘내부’가 가려진 이유가 소수의 독단적인 결정이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범위의 이너서클 내부의 자유와 합리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국 사회가 아직은 그러한 자유와 합리성이 보편화되는 것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와 합리성을 제한된 범위의 ‘내부’로 제한하는 지도 모른다. 현재 중국을 소수의 지배자가 결정하고 그것을 집행하는 ‘꼭두각시’들로 운영되는 체제라 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안치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 중국학술원 중국자료센터장
* 이 글은 '아주경제'와 인천대 중국학술원이 공동 기획한 『아주차이나』 [仁차이나 프리즘] 9월 14일에 게재된 것을 수정한 것임.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ifutian.sznews.com/content/2012-12/26/content_7547862_2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