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겨울, 카자흐스탄으로 들어가는 열차를 타고 알라샨 변경지대(阿拉山口)에 내렸을 때, 영하 20도의 강추위에 입김마저 얼어붙었다. 열차에서 내리자, 흘러내린 물과 사람의 입김까지 모조리 얼어붙어 시커먼 객실이 눈과 꼭 같은 색으로 변해 있었고, 바퀴까지 위협하는 얼음을 떼어내려 인부들이 좌우에서 우르르 몰려왔다. 일련번호가 매겨진 국경의 창고들은 자못 규모가 있었지만, 상하이항의 컨테이너 무더기에 비하면 실로 ‘한 줌’에 불과했다. 그 당시 회색 콘크리트 담장은 ‘일대일로(一帶一路)’ 등의 구호 하나 없이 밋밋하고, 허옇게 눈을 뒤집어 쓴 별장들은 폐허의 잔해처럼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국경 지대를 떠나 무작정 다인승 택시를 타고 이리伊犁(일리, 이닝)에 도착했을 때 세상은 온통 눈 천지였지만 바람은 예봉이 꺾여 그저 선선했고, 시커먼 진흙을 뒤집어 쓴 눈 무더기들의 가장자리는 낮이면 녹았다가 다시 얼곤 했다. 천산의 북쪽에서 기대할 수 없는 특이하게 아늑하고 따듯한 풍경이었다. 그곳에서 며칠 지내면서 낮이나 밤이나 상상 가능한 범위의 모든 사람들을 만났다. 얼마를 팔았는지 모르지만 골방에서 담요를 걸치고 줄창 백양목만 그려대는 홀아비 화가, 고향 충칭에서 온 아가씨 두엇을 데리고 ‘비정상’ 영업을 하는 여인숙 주인, 소련(러시아가 아닌 소련)으로 가서 십 몇 년 동안 소식도 없다가 맨몸으로 다시 돌아온 남편(카자흐)과, 그를 구박하는 것으로 하루의 피로를 푸는 매점 여인(역시 카자흐) 등. 아무데나 가서 자고 아무나 만나며 아무 이야기나 지껄였다.
그 후로 오랫동안 신장으로 갈 때마다 이리카자흐 자치주를 들르고, 건륭이 준가르를 평정했다고 자찬하며 세워놓은 격등비(格登碑)를 보고자 드디어 자오수(昭蘇)까지 이르렀다. 남쪽 천산의 꼭대기는 언제나 하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었고, 그 아래 들판만 사계에 따라 옷을 갈아입었다. 몽골, 카자흐, 그리고 소수의 키르기즈 사람들이 깊은 산골짜기와 산허리에서 가축을 키우고, 대평원에는 초원이 반 유채밭이 반이었다. 그곳에서 조금만 서쪽으로 가면 카자흐스탄, 서남으로 가면 키르기스스탄이었다. 맘만 먹으면 어디로든 통할 것 같은 곳, 이곳을 평생 오가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그곳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올해(2017년) 2월 말 평원의 남쪽으로 가지를 치고 있는 골짜기를 훑으며 나의 연구를 도와줄 목축민들을 찾았다. 언제든지 와도 좋다는 사람 셋과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 중 하나가 쥐마홍(키르키즈인, 54세)이다. (이제부터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들의 호칭은 모두 가명이다. 혹시나 불이익을 당할 수 있으므로. 그러나 그들의 본명과 주소, 소재지는 나의 공책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7월 말 초원을 다시 찾아 나는 정해진 수속을 밟아 나갔다. 먼저 공안국에 들러 민가거류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앞으로 나에게 1년간 숙소를 제공하기로 한 쥐마홍이 나를 맞으러 나왔다.
악수향 공안국 문 앞에서 바투르(44세, 몽골인 택시 기사)와 나는 다섯 시간을 꼬박 기다렸다. 그 사이 일하다 신분증을 잃어버린 쥐마홍은 호구부 원본을 가지고 왔다. 드디어 철조망을 두를 문이 열리자 나 혼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공안국 안으로 들어가자 군복을 입은 젊은 경관 원(文)이 자오수로 온 이유를 이것저것 묻더니 서류를 작성해 나갔다. 2월에 수속에 관한 자문을 다 받았고, 이리주 공안국의 방법과 직원과 과장이 확인까지 했으므로 나는 일이 마무리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드디어 향 공안국의 직인을 찍으려는 순간 경관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고개만 끄덕이던 그는 결국 직인을 찍지 않았다.
자오수 천산 목장
“자오수 현의 보국대대(報國大隊)로 가서 대대장을 만나시오. 연락을 해 놓았소. 근무 시간이 있으니 빨리 가시오.”
2월에 이 부서 저 부서를 돌며 부질없이 보낸 시간이 불현듯 떠올랐지만 조바심에 택시를 타고 달렸다. 보국대대 정문에 다다라서 대대장을 만나고자 전하니 역시 군복을 입은 장교 한 명이 나와 쪽문으로 나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자오수에 온 이유를 하나하나 물었고, 나는 그 동안 여러 관공서를 다니며 했던 그 대답을 그대로 들려줬다.
“유목민들의 문화를 공부하려는 겁니다.”
반 시각 가량 별로 결과 없는 이야기를 하다 그는 나를 다시 현 공안국으로 보냈다.
“보국대대장은 지금 없소. 가서 출입경관리대장을 만나시오.”
나는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우겼지만 힘이 없었다. 지금까지 여기 저기 관공서를 오가며 일이 제대로 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 말을 따를 수밖에. 현 공안국으로 다시 택시를 몰아 도착해 안전검사를 통과하니, 군복이 아닌 경찰복을 입은 아저씨 하나가 검사대 뒤편에서 기다리다 대뜸 말했다.
“출입국관리대장은 오늘 없습니다. 당신이 여기에서 머무르며 연구하는 것은 위법입니다.”
나는 주 공안국이 알려준 수속대로 일을 처리하고 있다고 맞섰다. 주 공안국 담장자의 이름과 전화번호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했다.
“여행은 가능하지만 민간인 집에서 머무는 것은 안 됩니다.”
나도 버텼다.
“출입국관리대장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어떤 규정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내가 대장이오.”
“거짓말 한 거예요? 대장은 오늘 없다고 했잖아요.”
“내가 대장이오.”
“수없이 수속을 물어보고 확인을 받고 하는 겁니다. 왜 말을 뒤집는 겁니까?”
“당신이 말을 잘 못 이해한 것 같소. 우리는 말을 뒤집지 않았소.”
나는 주 공안국의 샹(向)의 휴대폰으로 수없이 전화를 시도했지만 그녀는 내 전화는 받지 않고 단지 대장과만 통화했다. 대장의 말은 이랬다.
“당신이 한국인이라 말을 잘 못 이해한 듯한데, 예전에도 샹은 향 공안국의 명령만 따르라고 말했답니다. 여기서 관광을 할 수는 있지만 다른 활동은 못합니다.”
화가 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격렬하게 심정을 토로하고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다만 공안이 집단적으로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나는 갑니다. 그렇지만 어린 후배에게 거짓말은 시키지 마세요. 그녀(향)은 당신들의 명령을 받았기에 말을 바꾼 거잖아요?”
공안과 싸워서 될 일은 없다. 호텔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쥐마홍에게 전화를 했다. 공안국에서 연구행위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그도 내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다 한밤중에, 중국어를 잘 하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서 딸이 전화를 걸어왔다.
“가시더라도 아버지가 집에서 식사는 한 번 하고 가시래요.”
호의에 답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하고 아침 일찍 바투르와 함께 쥐마홍의 집으로 차를 달렸다. 얼마간 달렸을 때 전화가 왔다. 현 공안국이었다. 연구 행위를 할 수 없으며, 연락이 안 될 경우 학교로 전화를 할 것이고, 관광만 가능하며, 이것은 선생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등등 익히 들은 이야기였다. 공안이 불쑥불쑥 전화를 걸어오면 감정을 통제하기 어렵다.
“내 안전은 내가 책임집니다. 지금껏 중국에서 여려 사고를 겪었지만 공안은 도움을 준 적이 없습니다. 나는 관광을 하고 있으니 제발 다시 전화하지 마시오.”
쥐마홍은 악수 향에 있는 토방 별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채취가 금지된 설련雪蓮 한 뿌리를 건네며 그가 말했다.
“가방 깊숙이 넣게. 채취는 불법이야. 있은 거 다 줄 수도 있지만 검문에 걸리면 큰일 나.”
설련
설련 한 뿌리를 가방에 찔러 넣고 차를 마시는 차에 꺽다리 공안 셋이 예고도 없이 방문으로 들어와 핸드폰으로 녹화를 시작했다.
“공원국 선생이오?”
“그렇습니다만, 앉으세요.”
“아닙니다, 서 있겠습니다.”
“차를 마시고 있으니 밖에서 기다리든지 같이 차를 마시면 안 되겠소?”
“안됩니다. 규정입니다.”
“그럼 좀 떨어져서 있으면 안 되오?”
“1.5미터를 유지하는 것이 규정이오.”
“그런 규정은 누가 만들었소? 한 번 봅시다.”
“규정을 보여줄 의무는 없소.”
공안이지만 군복을 입는 보국대 대원들의 태도는 무례함을 넘어 심각하게 위협적이었다.
“차 한 잔 마시고 갈 것이오. 나는 여기서 머무는 것도 아니고 대화만 하는데 뭔 규정을 어겼다는 거요. 당신들은 공안이기 이전에 성인이요. 아이들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해도 되오?”
“민가에서 민간인을 함부로 만날 수 없소. 우리 입회하에 가능하오.”
더 이상 이 집에 있다가는 주인을 곤경에 빠트릴 수 있었다. 분노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밖으로 나갔다. 나는 딸 디다르에게 줄 용돈을 좀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다시 요구했다.
“아주 사적인 일이 있소. 잠깐만 거리를 좀 벌려주시오.”
그들은 있지도 않은 규정을 반복했다.
“1.5미터가 규정이오.”
용돈 몇 푼을 쥐어주지 못한 차에 그들이 핸드폰을 계속 디밀자 나는 한국어로 욕설을 하며 대들었다.
“찍지마라, ***들아. 나도 찍겠다.”
(아마도 한국 드라마의 영향인 듯) 그들은 욕설을 바로 알아들었다.
“욕한 것 알고 있소. 바로 구글 번역기로 확인하고 대가를 치르게 하겠소.”
중국어로 바꿔서 경고했다.
“민가에서 이 따위 행동을 하는 것이 공안인가? 이건 가택을 침입한 강도짓이다. 베이징에 당신들이 한 행동을 제소할 것이다.”
허망한 공갈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저 명령을 받아 행동하는 이들일 뿐이다. 집 대문에서 그들의 상관이 팔짱을 끼고 수하들의 활약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쥐마홍에게 말했다.
“내가 있으면 당신에게 해만 될 뿐입니다. 갑니다. 앞으로 연락 못해도 용서해 주세요.”
바투르의 택시를 타고 다시 자오수 현으로 달렸다. ‘공안이 어떻게 내가 그곳으로 가는 것을 알았을까?’ 한참 가다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는 차에 바투르가 나직이 말했다.
“공, 당신 핸드폰이 추적당하고 있어. 오늘 내 핸드폰으로도 확인 전화가 왔더라구.”
그렇구나, 핸드폰이 추적당하고 있었구나(나중에 안 일이지만 택시 회사는 차내를 비추는 CCTV 자료를 매일 공안국에 제출하고 있었다! 그러니 공안국은 나라는 인간을 대충 파악한 셈이다.)
얼핏 들으면 이는 하나의 사소한 해프닝일 뿐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할 거리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인류학적 촉수를 들이대면, 이 짧은 일화 안에 앞으로 전개해나갈 변경 이야기- 즉 인간과 환경과 제도와 기술이 복잡하게 얽힌 서사-의 실마리가 거의 다 들어 있다. 나는 미미한 연구자일 뿐이며 소수민족의 독립을 지지하는 인사는 더욱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인식되고 해석되는’ 나는 나 자신의 실체와는 별개다. 서부 변경 끄트머리에서 일어난 일은 독립적인 듯하지만 동서남북 국경 내부의 정치ㆍ경제와 연성ㆍ경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나하나 전개해 나갈 것이다.
【변경에서 바라본 중국 2】
공원국 _ 작가 / 중국 푸단대 인류학과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