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淸)나라 통치기간까지만 해도 하얼빈(哈爾濱)은 쑹화(松花) 강변의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다. 그런 하얼빈이 서서히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인근에 철도가 건설되면서부터이다. 1896년 청나라로부터 철도부설권을 획득한 제정러시아는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중동철도〔中東鐵路〕 부설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하얼빈은 그 철도부속지의 중추이자 철도운영의 심장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하얼빈이 이른바 근대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부터이다.
중동철도의 중핵, 하얼빈
하얼빈을 유럽형 전원도시로 개발하고자 했던 러시아는 지금의 중양대가(中央大街)를 포함한 6차선의 방사형 도로를 건설함과 동시에 그 일대에 도심을 조성했다. 뿐만 아니라 시 외곽에는 여러 개의 대형발전소와 공장설비 등과 같은 산업기반시설을 구축해 공업도시로서는 물론 국제무역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하얼빈 천주교당(좌)와 러시아정교회 성당인 성소피아성당(우)
이렇게 보면, 하얼빈은 러시아가 만들고 키워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하얼빈의 대표적 관광지로 부상한 중양대가를 걷다보면, 러시아풍의 레스토랑이나 건축물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얼빈에 유럽형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던 제정러시아의 의도가 잘 드러난 성 소피아성당도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파리, 로마, 런던 등 유럽의 대도시에 가면, 어김없이 도심 광장 한복판에 대형 교회나 성당이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무형의 성스러운 힘이 권력과 자본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도시를 제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성 소피아성당과 인근의 광장을 둘러보다 보면, 뭔지 모를 성스러움과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하얼빈은 결코 러시아만의 도시는 아니었다. 하얼빈의 도시개발에는 러시아 자본은 물론 유럽, 미국, 일본 등의 제국주의 심지어 유태인의 자본까지 참여했다. 이렇듯 하얼빈은 복수의 제국이 결합되어 있고 초국적 자본이 상호 경쟁하는 도시였다. 더구나 1905년 러일전쟁 이후에는 미국이 제안한 ‘문호개방정책(Open Door)’에 따라 각국 영사관 및 기업체들도 속속 이곳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1920년 중화민국정부가 부속지의 주권을 회수할 당시, 하얼빈은 도시화나 국제화란 차원에서 이미 동북아 제일의 도시로 탈바꿈해 있었다. ‘동양의 파리’,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리며, 중국에서 가장 화려한 초국적인 도시로 명성이 자자했던 것도 바로 이때이다. 이렇게 볼 때, 하얼빈은 어쩌면 현대사에 그 이름이 등장한 순간부터 제국주의가 공동으로 건설한 도시였는지도 모르겠다.
화려하고 웅장한 마천루 뒤에는 어김없이 초라하고 낙후된 슬럼가가 자리하기 마련이다. 철도시대와 함께 탄생한 이 현대적이고 활력 넘치는 ‘근대도시’ 하얼빈의 화려함 뒤에도 어둠은 늘 존재했다. 조숙(早熟)한 도시들이 예외 없이 짊어져야 할 필연적 운명처럼 말이다. 초국적 자본과 제국주의의 폭력적 확장, 만주국 건국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충돌, 하얼빈 특유의 러시아와 일본 간의 철도경쟁 등 유사 식민지의 어둡고 암울한 그림자가 하얼빈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대륙패권쟁탈의 한복판에 바로 하얼빈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과 러시아,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일본과 중국 간에 철도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은 하얼빈을 일촉즉발의 긴장관계가 상존하는 우울하고 불행한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이 철도문제만 없었다면 하얼빈의 미래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다툼은 언제나 이 철도를 둘러싸고 연출되었다. 철도는 언제나 근대도시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이자 상징으로 여겨졌다. 식민도시 하얼빈이 다양한 민족, 권력, 자본이 종횡하는 이국적이고 초국적인 공간으로 포석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중동철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주의 남북을 관통하는 중동철도는 중국, 러시아, 유럽, 조선의 철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의 공간과 권력이 확장되는 통로이자 세계자본의 컨베이어벨트 구실을 했다.
이를 상징하듯, 세계인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던 사건이 1909년 하얼빈에서 일어났다. 1905년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 행사를 주도한 바 있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그해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V. N. Kokovtsev)와 조선 및 만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한 차였다. 그런데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던 그를 누군가 숨죽이며 주시하고 있었다. 조선인 안중근이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의 곁으로 열 걸음 정도 다가왔을 때, 품에서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세 발을 연달아 격발했다. 총알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옆구리 그리고 복부를 명중했다. 그 역사적 현장은 지금도 하얼빈 역 플랫폼에 ‘쏜 자’와 ‘맞은 자’의 위치로 각인되어 있다.
하얼빈 역에 각인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지점
현재, 하얼빈 역사 왼편에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중국정부도 이 역사적 사건에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은 물론 중국에게도 망국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안중근의사기념관
당초 중동철도의 운영권은 제정러시아를 승계한 소련에 있었다. 1920년 중국정부의 개입으로 주도권이 일부 축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소련은 여전히 이 지역에 대한 일정규모의 지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소련은 이 지역에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본이 만주국 성립을 기화로 대(大)하얼빈도시계획(1932∼1934)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가운데 하얼빈의 일본화를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소련은 수년간의 담판을 거쳐 1935년 3월 일본에 이 철도의 운영권 전부를 넘겨야 했다.
오랜 세월 동북아의 러시아세력을 상징했고 그 남진기지로서의 영광을 누렸던 하얼빈은 부침을 거듭한 끝에 결국 일본 북방침략의 전초기지이자 보배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독립국’ 만주국은 건국 초기만 해도 하얼빈에 대한 장악력이 크게 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하얼빈은 지리적으로 북쪽 국경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여전히 소련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각축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세력교체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기반시설 및 교통망의 일부 확충 말고는 도시공간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얼빈은 약 24년간 러시아 조차지로 있다가 1920년부터 1931년까지는 중국의 장줘린(張作霖)이 이끄는 봉계군벌(奉系軍閥)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이후에는 14년 넘게 만주국의 통치를 경험했다. 그것이 조계도시의 성격을 가졌든 반(半)식민도시의 성격을 가졌든지 간에, 하얼빈은 줄곧 유럽, 미국, 일본,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와 외국자본의 영향 하에서 도시로 개발되고 대도시로 발전되었다.
그래서 1930년대 초만 해도 하얼빈은 제국주의 세력교체가 반복되는 혼란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지역을 무대로 각기 다른 운명을 살아야 했던 복수 민족들의 현실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는 쇼윈도이기도 했다. 그 쇼윈도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풀어내는 각양각색의 모험담이 진열되어 있었다. 자유의지에 따른 이주, 새로운 혁명을 꿈꾸고자 하는 이들의 망명, 거대한 꿈과 야심찬 기획에 대한 로망 등 복수의 ‘ 하얼빈 타자’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도시 전체를 떠다녔다.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그러나 외래 이주민들의 무용담은 토착민인 하얼빈의 중국인들에게는 너무도 먼 이야기였다. 중국동북지역에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식민주의와 초국적 자본의 공모는 하얼빈의 도시발전을 심각하게 왜곡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그곳에 거주하는 중국인사회에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일본의 만주국 건립은 급기야 중국인들을 사실상의 제국일본의 식민지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외국자본의 침략과 착취는 일본식민체제와의 공생 혹은 그것의 배려에 힘입어 더욱 공고화되었고, 중국인의 피와 땀이 서린 그 은빛 반짝이는 중동철도는 부유하고 우아한 외국인과 중노동과 실업에 허덕이는 중국인 간의 민족적 서열을 상징하는 구분선이 되고 말았다. 빈부가 분리된 도시 공간 하얼빈의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식민의 소음과 잡음이 우울한 식민도시의 장송곡처럼 중국인들의 귓가를 맴돌기 시작했고, 만주괴뢰정권이 선사하는 식민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와 식민주의가 결합된 편협한 근대의식이 제공하는 식민주의차별담론에 감읍한 식민의 유령들이 도시 전체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제국일본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에 착수했다. 중국 동북지역 곳곳에 생체실험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1936년 하얼빈 변두리에도 중국인, 조선인, 연합국 포로 등을 대상으로 ‘상상 가능한 모든 종류의 고문과 실험’이 자행되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세균전연구소가 일본에 의해 설립되었다. 초기 ‘방역급수부대(防役給水部隊)’로 불린 이 연구소는 1941년에 그 유명한 ‘731부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731부대 동상실험 건물 유적
731부대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스파이 또는 사상범’ 명목으로 체포된 정치범 수천여명을 대상으로 온갖 고문과 생체실험을 감행한 전쟁범죄조직이었다. 일명, ‘마루타’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지만, 개중에는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에 대한 해부와 실험은 대개 ‘순수한 결과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마취 없이 행했다’라고 전해지지만, 실상 가장 비인간적이고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정치범’들을 고문한 것이나 다름없다. 같은 시기, 독일의 나치도 아우슈비츠 등 유럽 곳곳의 수용소에 끌려온 유태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했다. 나치는 이들 유태인의 효율적 이송을 위해 유럽 전역의 철도를 이용했다. 심지어는 비밀리에 철도가 수용소 내부까지 진입할 수 있도록 했는데, 학살이 잘못된 일인 줄은 그들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본도 나치처럼 하얼빈의 731부대 내부까지 철로를 부설하고 철망을 둘렀다. 그러나 그 목적은 전혀 달랐다. 아우슈비츠의 철도가 유태인에 대한 ‘효율적이고 신속한’ 대량학살의 목적으로 건설되었다면, 731부대의 그것은 일본의 국가통치기획에 따라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인간을 장기간에 걸친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731부대 내부에 부설된 철로
이렇게 보면, 731부대는 전쟁기간에 한정된 예외적 공간이 아니라 식민지 확장과 통치의 영속화를 위해 철도를 가설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731부대의 내부까지 철도가 연결되는 바람에 혹여 자신들의 잘못된 실상이 외부로 알려질 것을 극도로 경계한 일본은 중동철도의 민간열차가 731부대 근처를 지나는 것에 대해 무척 곤혹스러워했다. 그래서 민간열차가 731부대 인근을 지날라치면, 승객들에게 커튼을 내리고 절대 밖을 보지 못하도록 엄중 단속했다고 한다.
제국일본의 패망과 함께 731부대에서 자행된 비인간적 실험과 고문은 만천하에 알려졌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 사건으로 인해 하얼빈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우울한 기억을 안긴 슬픔의 도시로 각인되고 말았다.
하얼빈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동북아 제일의 도시라는 위상마저 만주국의 수도 신징(新京, 지금의 長春)에 넘겨주고 그 주변도시로 전락했다. 한때 조계도시이자 동북삼성의 북쪽국경에 위치한 최대 국제도시가 이제는 만주국의 두 번째 도시로 내려앉게 되면서 과거 하얼빈이 지녔던 국제적 시야와 식민주의 비판의 성격과도 작별을 고했다.
어쩌면 비정성시(悲情城市) 즉, 우울한 도시는 바로 이 하얼빈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중국도시이야기 9】
김판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김지환·손승희 엮음, 『중국도시樂』, 학고방, 2017에 수록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