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2017.6), 「중일전쟁 시기 조선화교의 항일활동」, 『동양사학연구』 139집, 동양사학회, 337-370쪽.
본고는 중일전쟁 발발 80주년에 맞춰 중일전쟁 시기 조선화교 항일활동의 실태를 분명히 밝힌 후, 같은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일본화교, 대만화교 그리고 동남아화교와 비교 검토하여 조선화교의 항일의 정도를 검토한 것이다.
본고가 주로 참고한 사료는 朝鮮總督府高等法院檢事局思想部 발행의 『思想彙報』, 朝鮮總督府警務局 발행의 『高等警察月報』, 朝鮮總督府高等法院檢事局思想部 발행의 『朝鮮檢察要報』(1944-1945) 그리고 조선총독부 警務局과 法務局이 중일전쟁 시기 帝國議會에 보고한 보고서이다.
본고는 중일전쟁 시기 조선화교의 항일활동을 전반기(1937.7-1941.12)와 후반기(1942.1-1945.8)로 나눠 검토했다. 일본의 완전한 세력권에 속하는 일본화교와 대만화교의 항일활동과 비교해 볼 때 조선화교의 항일활동은 두 화교에 비해 보다 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화교의 경우, 항일의식이 강한 화교 세력은 1937년 12월 12일 ‘국민당사건’으로 체포되어 거의 와해되었으며 그 이후 중국 및 만주의 일본 유학생에 의한 정보수집과 항일 문필활동 등의 항일활동이 있었지만 조선과 같은 무력항쟁은 찾아볼 수 없다. 그 원인은 한반도가 중국 대륙과 육지로 이어져 있고 공산팔로군이 만주와 화북지역의 농촌지역을 장악하고 있어 공산팔로군의 침투가 용이하다는 점, 조선화교가 산동성, 하북성을 포함한 화북지역 출신이 많다는 점, 그리고 조선화교가 일본화교에 비해 인구가 훨씬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만화교의 항일활동은 일본화교에 비해 훨씬 저조했다. 대만총독부는 1937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의 ‘국민당사건’처럼 중화총회관 및 각 지역 중화상회의 간부 300여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화교는 고문을 당하여 다수가 사망하고 32명이 기소되었다. 이른바 대만의 ‘화교사건’으로 대만화교의 항일세력은 이 사건으로 초토화되어 특별한 항일활동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으로 볼 때 중일전쟁 직후부터 일본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있던 일본화교, 조선화교, 대만화교 가운데 항일 활동의 정도가 가장 활발한 화교는 조선화교이고 그 다음이 일본화교, 대만화교의 순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조선화교와 동남아화교의 항일활동의 정도를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동남아시아는 중일전쟁 발발 당시 영국, 네델란드, 미국, 프랑스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화교에 비해 항일활동을 전개하기에 유리한 대외적 환경에 있었다. 반면,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이후 동남아시아 각지는 일본군의 점령 하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 불리한 상황에 처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과 같이 일본의 직접통치가 장기간에 걸쳐 철저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화교에 비해 항일 활동이 보다 유리했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조선화교와 동남아화교의 인구의 차이다. 태국화교는 250만 명(1939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화교 236만 명(1940년), 인도네시아 화교 134만 명(1937년), 베트남 화교 46만 명(1940년경), 미얀마 화교 19만 명(1937년), 필리핀 화교 11만 명(1941년)으로 모두 조선화교의 인구를 훨씬 상회했다. 또한 동남아시아 각 지역의 화교는 각 거주국에서 조선화교에 비해 큰 경제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건을 고려하여 동남아화교의 항일활동을 살펴보면, 중국정부에 대한 헌금, 애국공채 구입을 통한 지원활동, 중국군의 군인으로 직접 참전, 거주지 및 거주국에서 일화배척(日貨排斥), 정보수집, 항일 선전 및 항일 유격대 활동이 폭넓게 펼쳐졌다. 이에 비해 조선화교의 항일활동은 일본군 및 군사시설의 정보수집 및 전달, 일본의 군사시설 파괴 및 방화 등의 활동이 중심이었다. 신의주화교 가운데 일부가 귀국하여 팔로군에 참전한 사례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일본의 직접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정부에 대한 헌금, 애국공채 구입, 일화배척의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단, 동남아화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항일유격대의 조직과 무장투쟁의 정도는 아니지만 자기단, 일동회, 중국청년단과 같이 항일조직을 결성하여 군사시설을 파괴하거나 방화한 사건은 높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조선화교의 항일활동은 그 배후에 산동성과 하북성의 공산팔로군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국민당과 연계된 항일활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그 이유는 조선화교의 고향인 산동성과 하북성의 농촌지역이 공산팔로군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으며, 국민당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기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조선화교의 항일활동 정도는 일본의 직접 통치를 받는 일본화교, 대만화교에 비해 더욱 활발한 반면, 동남아화교와 비교할 때는 여러 조건이 열악한 관계로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