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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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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증’으로 완성되는 중국의 혼인 _ 손승희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중국·화교문화연구소는 2009년 인문한국(HK)사업 선정을 계기로 중국의 사회경제관행에 대한 연구 및 조사를 꾸준히 진행해왔습니다. 특히,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학제적 결합을 통해 전통시대 민간의 사회경제 관행을 드러내고, 전통의 관행들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형되고 당대 중국의 민간생활 속에서 복류하고 있는지를 검토해왔습니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관행중국의 독자들과 공유하고, 관습을 통해 중국문화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이번 호부터 관습과 중국문화라는 새로운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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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처음 유학을 시작했던 1998년의 중국은 지금보다 훨씬 경직된 사회였다. 곳곳에 사회주의적인 분위기가 느껴졌고, 중국인들이 무서워하는 중국 공안(公安, 경찰)은 이방인에게도 무척 두려운 존재였다. 지금은 자유롭지만, 당시는 유학생들이 학교 기숙사 외에는 거주의 자유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중국인들에게 ‘서구적인 것’을 ‘오염’시킬 수 있는 유학생들은 그 자체로 중국 관할 공안의 중요한 통제와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그럴 때는 왜 기숙사에서 살 수 없는지를 증명해야 했다. 필자는 당시 상하이에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고 하자, 그럼 결혼증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한국에는 결혼증이 없다는 말을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담당자는 ‘어째 그런 것이 없냐’는 듯 뜨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지금이야 중국인의 으름장이 사실은 별거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지 자못 심각했다. 결혼 자체를 증명하라는 말에 결국 호적등본을 번역 공증해서 제출했던 기억이 있다. 중국에서는 한국처럼 필요한 경우에 주민등록등본이나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발급받는 것이 아니라, ‘결혼증’이라는 것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한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결혼을 하면 결혼 당사자들이 직접 호적지의 민정부에 가서 등기를 하고 결혼증을 발급받는다. 작은 수첩의 형태로 되어 있는 이 결혼증은, 겉장을 넘기면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 부착되어 있고 성명, 생년월일, 본적지, 민족, 결혼 날짜 등등 결혼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들이 기재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결혼할 때 결혼증서를 작성하지만, 그것은 결혼 당사자 간의 약속의 의미일 뿐 그 자체로서 행정적, 법적 효력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또한 혼인신고를 해야 법적으로 결혼이 인정되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절차에 있어서 반드시 당사자가 혼인 신고기관에 직접 나올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제3자의 신청에 의해서도 가능하고 결혼증 같은 것도 따로 발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증을 발급받아야 비로소 법적으로 부부가 되고 결혼이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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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결혼증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 「혼인법」 제8조에도 규정되어 있다. 즉 “결혼하는 남녀 쌍방은 반드시 혼인 등기기관에 직접 가서 결혼 등기를 진행해야 한다. 본 법의 규정에 부합하는 것은 등기를 하고 결혼증을 발급받아야 부부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는 중화민국 민법(대만 민법) 982조의 “결혼은 공개 의식을 하거나 2인 이상의 증인을 둔다”는 조항을 한층 발전시킨 것으로, 관습상의 번거로운 의식 없이 등기만으로도 혼인이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식을 두고 일본의 유명한 법학사학자 시가 슈우조(滋賀秀三)는 실로 혁명적인 입법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결혼증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결혼증은 전통시대의 혼서(婚書)에서 유래했다. 중국에서는 전통시대부터 토지매매 혹은 가산분할 등 중요한 법률행위를 할 때는 문서를 작성하고 제3자의 공증을 얻는 관습이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혼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혼서는 바로 혼인을 확정하고 이행하기까지 남녀 쌍방 가정이 일정한 구속력을 가지기 위해 작성되었다. 2인 이상의 증인을 결혼 요건으로 두고 있는 중화민국의 민법이나 등기와 결혼증의 발급을 결혼 요건으로 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혼인법이 모두 이러한 전통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혼서가 언제부터 작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삼례(『周禮』, 『儀禮』, 『禮記』)에는 이미 혼례에 관한 상세한 규정이 있다. 『예기혼의(禮記昏義)』에는 ‘혼례는 예의 근본’이라는 말이 나온다. 결혼은 원래 ‘예(禮)’의 범주에 속했던 것이다. ‘예’라는 것은 인간들의 사회관계에서 기본적인 규범과 준칙을 말하는데, 그중 혼례와 가례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따라서 혼인법은 ‘예’라고 하는 대의명분과 윤리도덕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규범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황제권력이 형성되면서 ‘예’는 황제의 지배기구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적 규범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양민과 천민의 혼인과 같은, 국가 통치이념이나 신분질서에 반하는 중요한 규정을 위반했을 때는 율령에 따라 엄격한 형벌로 다스렸다. 그러나 한편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혼인 절차상의 내용들은 여전히 ‘예’의 형식으로 민간의 풍속을 따르게 했다. 

 

따라서 혼인은 중매인의 주선으로 6례(禮)에 따라 진행되었다. 6례는 『의례(儀禮)』에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는데, 납채(納采: 정식 혼인 신청), 문명(問名: 여자의 사주팔자를 물음), 납길(納吉: 약혼), 납징(納徵: 혼인 예물을 보냄), 청기(請期: 혼인날짜 결정), 친영(親迎: 여자를 맞이함, 즉 혼인식)을 말한다. 각 세목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당사자의 신분 고하나 빈부 차이에 따라 변형되거나 생략, 첨가되었다. 이 과정에서 납길할 때는 빙서(聘書), 납징할 때는 예서(禮書), 친영할 때는 영서(迎書)를 함께 보내는데, 이 모두를 혼서라고 할 수 있다. 즉 혼인은 3서6례(三書六禮)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혼서는 귀족이나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작성되었으며 일반 민중사회에서는 늦어도 당대(唐代)에는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혼서는 ‘예’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개 계약서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명칭도 ‘계(契)’가 아니라 ‘계(啓)’, ‘간(柬)’, ‘첩(帖)’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시기의 관습조사에 의하면, 계약의 의미가 두드러진 혼서가 작성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데릴사위(贅婿)와 같은 복잡한 법률관계가 있을 때 여러 조건들을 명시하는 경우가 있었고, 과부의 재혼에서도 ‘예’의 요소보다는 많은 양의 결혼비용(聘財)을 요구하는 등 거래의 요소가 노골적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혼서는 성혼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일정한 구속력을 갖는 데 목적이 있지만, 성혼 후에도 혼인 관련 소송 등에서 평생토록 신분을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중화민국시기 관습조사에 의하면, 처첩 간의 신분 소송에서 혼서가 신분을 증명하는 자료로 원용되었던 실례가 종종 보인다. 
 

그렇다면 전통시기의 혼서가 언제부터 결혼증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예의 범주에 속해 있던 혼서가 언제부터 강력한 법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중국 역사상 정부가 민중의 결혼 행위에 직접 간섭하기 시작했던 것은 중화민국시기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 등기는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었을 뿐,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에 의해 혼서가 작성되었고 민간의 방식대로 혼례가 치러졌다. 1930년 민법 친속편이 제정되어 혼인이나 이혼의 자유, 중혼 금지 등의 규정을 두었지만, 혼인의 성립과 절차상의 문제는 주로 민간의 행위로 간주되어 정부기구가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민간의 혼인은 민법의 구속을 받아 ‘예’의 요구에 부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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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중화민국시기 혼서(1945년)

 

그러던 것이 정부기구에 의한 결혼증의 발급이 보편적으로 실행되었던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의 일이다. 잘 알려진 대로 1950년에 제정된 「혼인법」은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 가장 먼저 공포된 법이다. 이 「혼인법」은 중화민국 민법과 공산당 각 혁명근거지에서 발표되었던 혼인법을 참고한 것으로, 남녀 당사자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결혼과 이혼이 인정되었고 결혼에서 남녀 일방의 강압이나 제3자의 간섭은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호적지 인민정부에서 결혼증을 발급받는 대신 이제부터 민간에서 작성되는 혼서는 법률적 효력이 없게 되었다. 이는 민간의 혼인과정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하며, 그 증거가 되는 것이 바로 정부기관에서 발급하는 결혼증이었다. 더욱이 민간의 혼인에 대해 정부가 더욱 더 강하게 개입하게 되었던 것은 혼인법관철운동이 그 계기였다. 
 

오랜 역사시기 동안 뿌리 깊은 유교적 가족주의에 익숙해져 있던 중국인들은 당시 ‘가족만 알고 국가는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신생 정부는 이를 타파하고 가족주의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켜 국가의 일원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또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을 가정으로부터 해방시켜 생산에 투입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수천 년간 지속되었던 전통 혼인 예법과 의식이 정부의 단기간의 혁명이나 입법만으로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남녀평등, 혼인과 이혼의 자유, 일부일처의 기본 원리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여전히 남존여비 사상에 관습화되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자유 결혼이나 이혼을 요구하는 여성들이 피살되기도 했고, 전통방식의 강압적인 결혼에 대해 자살로 저항하는 여성의 수도 줄어들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운 「혼인법」의 관철을 위해서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계몽을 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중공중앙으로부터 「혼인법」을 철저하게 집행하라는 중요 지시가 내려졌고, 1953년 초부터 대대적인 혼인법관철운동이 전개되었다. 국가는 운동의 방식으로 강력하게 민간의 결혼에 개입하여 이들의 결혼관을 바꾸고 이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국가의 행정력을 동원한 이 혼인법관철운동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고 평가되었고, 이렇게 해서 새로운 「혼인법」은 민중의 생활 속에 안착하는데 성공했다. 1950년에 공포되었던 「혼인법」이 1980년에 한 번 개정된 이후, 2001년과1) 2011년에도 개정되었지만 기본적인 틀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민간의 혼인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개입은 중국인의 의식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혁명시기의 산물이지만, 등기를 통해 발급되는 결혼증 역시 지속적으로 민간의 생활 속에서 이미 체화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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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중화인민공화국 결혼증(1972년)

 

더욱이 이전에는 결혼증의 효용성이 별로 크지 않았지만, 근래에는 결혼증이 민간 생활에서 그 용도가 더욱 다양하게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도시로의 호구 이전이나 자녀의 호구 등록에서 필요하고, 부동산 담보대출, 국외 여행이나 유학할 때, 재산상속, 재산분할, 자녀부양, 채권채무, 직장 이동 등에서도 모두 결혼증이 필요하다. 특히 혼인관계를 위배하는 중혼이나 첩(包二奶) 등과 관련된 소송이 제기될 때도 결혼증은 가장 결정적인 증명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국가는 등기제도를 통해 혼인제도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는 한편, 결혼증을 발급해 줌으로써 결혼 당사자들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이들에게 권리와 의무도 부여했던 것이다. 
 

현재 중국의 모습은 전통의 영향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의 변화가 결합되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혼증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는 국가 통치이념이나 신분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형벌로 다스렸지만 혼인 성립의 절차상의 문제는 민간의 풍속에 따랐다. 또한 혼인의 성립 요건으로 신고 같은 것을 요구하는 입법이 없었고, 그러한 사고방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현대 시기를 거치면서 국가는 혼인 성립의 절차 문제까지도 법으로 규정함으로써 국가 시스템 속으로 귀속시켰던 것이다. 결혼증의 용도가 점점 확대되고 있는 것 역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관습과 중국문화 1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1) 2001년 개정된 혼인법에는 가정폭력을 금지하고 이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명시했으며 중혼 금지조항을 신설했다. 또한 가족 내 재산권에 대한 조항을 신설했는데, 결혼 등기시점을 기준으로 부부 사이의 재산권의 귀속문제를 판단하도록 명시했다.


참고문헌
金池洙, 『中國의 婚姻法과 繼承法』, 전남대학교출판부, 2003.
滋賀秀三, 『中國家族法の原理』, 倉文社, 1981.
郭松義, 定宜莊, 『淸代民間婚書硏究』, 人民出版社, 2005.
王躍生, 「婚書與中國婚姻變遷-『淸代民間婚書硏究』讀後」, 『中國史硏究』 2007-2.
王思梅, 「新中國第一部『婚姻法』的頒布與實施」, 『黨的文獻』 2010.
劉維芳, 「試論『中華人民共和國婚姻法』的歷史演進」, 『當代中國史硏究』 2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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