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7일 미국 하원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멕시코 장벽 건설에 쓰일 예산 16억 달러(약 1조8천억 원)를 승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기간부터 줄곧 장벽 건설 비용의 일부를 멕시코에게 부담시키겠노라고 호언했지만, 멕시코는 이를 단호히 반대했다. 결국 트럼프 정권에서의 첫 건설 비용은 미국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그 며칠 전에는 텍사스 주 남부 샌 안토니오 소재 월마트 주차장에서 트레일러 트럭의 콘테이너 안에서 시신 8구와 부상자 30여 명이 발견되어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화물 콘테이너에 숨어 밀입국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콘테이너 안의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은 채로 뜨거운 사막의 국경을 가로지르다 참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10년 동안 미국 사회에서 다시 뜨거운 이슈로 부상한 (불법) 이민과 관련된 현상들이다.
(출처: www.abcnews.org)
미국은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이다. 미국의 역사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이민의 역사이다. 그런 만큼 미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이민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며 이민자들의 문화에 관대한 편이었다. 이른바 ‘골드 러시’, ‘아메리칸 드림’, ‘멜팅 팟’, ‘샐러드 단지’와 같은 현상과 용어들은 이민에 대한 미국 사회의 포용적인 이미지를 강화시켜 왔다. 그러나 미국 이민의 역사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그 개방성과 관대함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는 점이 금세 드러난다. 그 포용성은 항상 특정 집단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미국의 이민 정책은 줄곧 ‘이민의 정치’와 ‘이민의 경제’에 의해 가늠되고 조정되어 왔다. ‘트럼프 장벽’에 비쳐지는 최근의 멕시코/히스패닉 혐오증과 19세기 후반부터 만연했던 중국인 혐오증은 이민의 정치와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그 이듬해부터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미국 국내외에서 노다지를 찾아 몰려들었다. 금광 발굴은 많은 시간과 힘든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작업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뒤따랐다. 백인 금광업자들은 보다 저렴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는데, 흑인 및 멕시코 인들과 함께 중국인 이민자들도 그 중요한 대상이었다. 중국인의 미국 이민은 골드러시와 함께 1850년대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발적인 이민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저렴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인신매매의 형식이었다. 당시 아모이(Amoy)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푸젠성 샤먼은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고 이민자들이 출발하던 주요 도시였다. 189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중국인 이민자는 10만 명 이상이었으며, 1850년부터 40년 동안 약 30만 명이 미국에 입국하고 그 중 반 정도가 중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1)
1860년대 들어 노다지에 대한 열기가 식어가면서 미국 서부 지역에는 커다란 위기감이 조성되었다. 서부로 밀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던 것이다. 구직자들 간의 경쟁이 심화되기 시작했고 임금 수준은 급속하게 낮아졌다. 1863-69년 사이에 진행된 대륙횡단철도 건설 사업으로 인해 서부 지역의 ‘잉여’ 노동력 문제는 일시적으로나마 약화되었다. 1차 건설 사업에 필요한 5,000명의 노동자를 모집하는데 백인 지원자가 100여 명에 불과하자 철도 건설회사가 금광채굴을 그만두고 나온 중국인 노동자들을 대거 고용한 것이다. 사업 초기에 모집된 4000 여명 이외에도 이후 수 천 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철도건설에 참여하여 전체 철도 노동자의 70-80%를 차지했다. 이들은 열악한 작업 여건에서 위험한 일을 도맡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인 노동자들 임금의 1/3 정도밖에 받지 못했으며 임금체불과 비인간적인 대우에 시달려야 했다.2)
철도건설 사업이 종료된 후 중국인 노동자들은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서부 지역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의 생산 현장과 농장 및 광산으로 향했다. 중국에서의 이민이 꾸준히 증가하고 철도 사업에 참여했던 중국인들이 돌아오면서 서부 지역의 취업난은 더욱 악화되었다. 대도시와 농장의 고용주들이 낮은 임금으로도 힘들고 위험한 일을 기꺼이 감수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을 선호하자,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들을 비롯한 백인 노동자들은 중국인을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생계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백인 사회 전반에 걸쳐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주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으며, 이는 결국 1870-80년대 서부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서의 수많은 반중국인 시위와 유혈 폭동으로 이어졌다.
골드러시 이후 서부 지역에서부터 퍼져나간 반중국인 정서는 일부 정치인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과제이자 기회를 제공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당시의 노동자당(Workingmen's Party)은 백인 사회에 팽배해 있던 반중국인 정서를 정치문제로 비화시켰다.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185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외국인 채광업자들에게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멕시코와 중국 출신 이민자들을 좌절시켰으며, 노동자당은 중국인 노동자 고용비율을 제한하기 위해 지속적인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연쇄적인 반중국인 폭동과 함께 확산된 중국인 혐오증은 1882년 <중국인 제외법(Chinese Exclusion Act>이 제정, 시행됨에 따라 제도적 차별로 구조화되었다. 이 법은 중국 출신 노동인구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고 시민권 부여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이 특정 국가 출신의 이민 집단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 최초의 법이다.3) “위험한/무서운 동양인(Yellow Peril/Spectre)”나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의 “Having a Chinaman's chance”라는 속어도 이 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당시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1880년에 그려진 중국인 혐오 만화 "And still they come!"
Erika Lee(2002) 64쪽
<중국인 제외법>으로 제도화된 중국인 혐오증은 백인 중심적 인종주의와 결합하여 20세기 전반에도 지속되었다. 1917년에 개정된 <이민법>은 일본과 필리핀을 제외한 모든 아시아 국가에서의 이민을 금지하였으며, 1924년 <이민법>에서는 이민 비자 발급 건수를 국가별로 할당하였는데 이는 서유럽 출생자들의 이민을 독려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인에게 할당된 건수는 연 105건에 불과했다. 1931년 캘리포니아에서 실시된 인종간 통혼금지 정책도 중국인과의 혼인을 겨냥한 것이었다. 전체 인구 대비 이민자의 비율이 매우 높았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약 반세기 동안 중국인에 대한 제도적, 문화적 차별이 이렇게 극심했다는 점은 커다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시기가 ‘이민의 시대’였다면, 그것은 확실히 모든 이민자가 아닌 그들만의 즉, 유럽 출신의 백인 이민자들의 시대였다.
미국 이민자의 수와 전체 인구 대비 이민자 비율, 1850-2015
(출처: www.migrationpolicy.org의 자료를 편집)
정치적으로 조장되고 제도화된 중국인 혐오증은 1940년대 들어 부분적으로나마 정치적으로 시정되기 시작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이던 중국(중화민국)과 정치군사적으로 연합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치적 전환에 따라 미국의 언론들도 자국 내의 중국(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시각을 비판하거나 시정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1943년에 미국 정부는 중국인에 대한 차별적 조치를 개선해달라는 장제스의 요청에 맞춰 1882년부터 시행되어오던 <중국인 제외법>을 철폐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불법이민”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중국인 이민자들의 사회적, 법률적 멍에가 부분적으로나마 벗겨진 것이다.
한편, 1929년의 대공황과 1940년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의 이민 인구가 급속히 감소했다. 종전 이후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미국은 부족해진 생산인구를 확보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기존의 이민 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1965년에 개정된 <이민법>은 이러한 정책적 전환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기존의 출신국가별 이민할당제도를 폐지하고 국가 구분 없이 매년 27만 명의 이민자를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다양한 배경의 이민자 집단이 결국은 미국 사회에 동화될 것이라는 이른바 “멜팅 팟(melting pot)” 담론이 법률에 반영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이민자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 땅을 밟았다.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미국에 정착한 이들은 생산 및 서비스 현장에서 미국 경제 성장의 숨은 주역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들어 미국 정부는 불법 체류자들에게 합법적 신분 전환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더욱 개방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1990년 <이민법> 개정을 통해 이민 비자 발급 총량을 70만으로 대폭 확대했으며, 미국 저개발 지역에 대한 50만 달러 이상의 현금 투자를 전제로 매년 1만 명 상한의 외국인들에게 투자이민(EB-5) 비자를 발급하는 제도를 신설했다. 가히 또 다른 이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출신국가별 미국 이민자 수 변동, 1960-2015
(출처: www.migrationpolicy.org의 자료를 편집)
제도적 차별 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정체되었던 중국인의 이민은 1965년 이민할당제가 폐지되면서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까지는 홍콩 출신 이민자가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대륙 출신은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후에 확연하게 늘어났다. 1980년 약 28만 명에 불과했던 중국(대륙)인 이민자는 1990년에는 약 53만 명, 2000년에는 약 100만 명, 그리고 2015년에는 약 258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이들 중국인 이민은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크게 변하고 있다. 경제력이 좋은 이민자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황금 비자”로도 불리는 EB-5 비자 발급 현황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제도는 신설 이후 한 동안 이민국의 엄격한 심사, 높은 문턱의 투자금액, 까다로운 송금절차 등으로 인해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2007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이민국은 자본 유입과 고용 창출에 효과가 큰 EB-5 프로그램을 적극적이고 탄력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국인 부유층의 증가와 맞물려 중국인의 투자이민이 급속히 늘어났다. 2004년 16명에 불과했던 중국인 투자이민자는 2015년 8,156명으로 폭증했는데, 이는 전체 발급 인원의 약 85%에 해당한다. 오랫동안 “위험한” 이방인으로 취급되던 중국인들이 이제는 미국 이민국 ‘비자 비즈니스’의 VIP 고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이민과 오늘날의 이민은 여러 면에서 다르다. 그러나 일부 집단에 대한 공포감이 조성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19세기 후반에는 “위험한 중국인들”이 그 대상이었고, 오늘날에는 이슬람교도들과 멕시코인들이 “나쁜 사람들”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은 중요한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되기도 하며, 어떤 정치인들은 “나쁜 사람들” 만들기에 앞장서기도 한다. 예를 들어, 멕시코 출신 불법 이민자에 희생당한 사람의 유가족들을 만나 위로를 건네며 TV 앞에서 결연한 모습으로 그 “나쁜 녀석들”이 발을 들이지 못하게 튼튼한 장벽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정치적 수사를 통해 개별 위법자에 대한 공포가 집단 전체에 대한 막연한 공포로 바뀌며, 상상된 장벽 너머의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로 동질화되는 것이다.
국경 펜스 위에 그려진 "트럼프 장벽" 비판 만화
(출처: http://www.bbc.com/news/world-us-canada-36375011)
사실, 미국-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는 것은 트럼프의 구상도 아니며 트럼프 정부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업도 아니다. 장벽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재임시절인 1994년에 마약 밀매와 불법 이민 단속을 목적으로 구상되어 국경의 거점 도시에 처음 세워졌다. 21세기 초엽 9.11 테러가 발생하고 마약 밀매업자들과 테러 집단과의 결탁 가능성이 제기되자 장벽과 펜스가 국경의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2006년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안보 펜스와 관련된 법률에 서명한 이후 장벽 건설이 본격화되어 현재까지 약 700마일(1125km)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장벽과 펜스가 건설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이 “트럼프 장벽”의 이미지로 묘사되는 것은 “강한 미국”을 외치는 그의 “이민의 정치”가 나름대로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9.11 테러와 금융위기의 상처가 여전히 선명한 오늘날의 미국에서 이민은 매우 복잡하고 복합적인 문제이다. 미국-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는 일은 광범위한 이민 정책의 한 부분일 뿐이며, 현실적으로는 멕시코로부터의 불법 이민을 감소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일 뿐이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장벽 찬성론자들도 그것으로 불법 이민이 근절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장벽”은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정책을 대표하는 노력으로 표상되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 장벽”은 아직까지는 성공적이다. 그 장벽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나쁜 사람들”을 만들어 냈으며, 그들로부터 국민들, 즉 유권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장호준 _ 한국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
1) goo.gl/SpV46Z
2) goo.gl/2aXq7T
3) Erika Lee (2002), "Enforcing the Borders", Journal of American History. 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