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래 유럽을 중심으로 촉발된 ‘문화도시’ 개념은 이제 선진국뿐만 아니라 후발국의 지역 발전 전략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가치로 부상했다. 그러나 유럽과 같은 선진국의 경우 ‘문화도시’에 대한 강조가 이른바 발전 패러다임의 전환, 즉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기초한 것이라면, 후발국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적 자산의 경제적 가치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정치권력과 자본, 예술가 사이에서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을 조성한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베이징의 798예술특구는 그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798예술특구의 형성 과정을 파악하려면 우선 1980년대 초부터 형성되었던 베이징의 원명원 화가촌을 이해해야 한다. 예술가들이 대도시로 모여드는 것은 일반적인 문화현상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개혁개방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이전까지 엄격하게 시행했던 거주이전의 제한, 즉 사회주의 호적제도를 느슨하게 만들었고, 일련의 예술가 그룹을 베이징으로 유인했다. 어찌 보면 국가체제에 도전했던 이들 예술가 그룹은 베이징의 서북쪽에 위치한 원명원 근처로 모여들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 지역이 임대료가 저렴한 베이징 근교이자 젊은이들이 많은 대학가 주변이었기 때문이었다. 강렬한 자아의식, 독립적 존재방식의 추구, 전위적 예술행위를 통한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반항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들 예술가 그룹은 특히 1989년 천안문 사건을 계기로 문화의 중심 무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원명원 화가촌을 주목하기 시작했던 사람들은 당시 베이징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이었다. 특히 미디어에 종사하던 외국인들은 원명원 화가들과 빈번히 교류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해외 미디어에 소개하기 시작하면서 원명원 화가촌은 점차로 중국 정부가 좋아하지 않는 관광명소가 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세계여성대회 베이징 개최를 계기로 베이징시 정부는 도시 정화 차원에서 원명원 화가촌에 대한 해산을 결정했다.
원명원 화가촌에서 쫓겨난 일련의 예술가들이 찾은 곳은 예전에 군수공장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거의 가동을 멈춘 798공장이었다. 베이징 동북쪽 근교에 자리한 798공장은 본래 1950년대 초반, 그러니까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직후 소련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진영에서 추진한 대중국 원조 프로그램의 하나로 설립된 것이었다. 1954년 동독 부총리가 친히 인솔한 동독 전문가들에 의해 시공하기 시작한 798공장은 벽돌 하나까지도 동독 전문가들의 검수를 받으며 1957년에 완공되었고 중국의 대표적인 군수공장으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부터 산업과 도시 기능의 변화에 따라 쇠퇴하기 시작한 798공장은 가동이 멈춘 공장 일부를 저렴한 가격에 임대하기 시작했는데 원명원에서 쫓겨난 화가들이 이곳에 입주하여 창작 및 전시활동을 전개하면서 예술촌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이 시기 798공장은 정치권력과 자본의 관심 영역 밖에 있었고, 예술가들은 바로 이 틈새를 비집고 터를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798공장과 전위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베이징에 전혀 예기치 못한 바람을 몰고 왔다. 물론 당시 입주했던 예술가들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798공장은 20세기 초 독일에서 탄생한 바우하우스(Bauhaus) 양식에 따라 지어진 것이었다. 현대 공업생산과 수요에 맞추어 건축물의 기능, 기술, 경제적 효율을 강조했던 바우하우스 건축의 이념을 반영했던 798공장은 높고 넓은 실내 공간, 활모양의 천정, 경사진 유리창, 간단하고 소박한 스타일 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충분한 채광을 고려하고, 태양의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해 반아치형 천정의 북쪽에 비스듬한 유리창을 설치함으로써 흐린 날이나 심지어 비가 오는 날에도 조명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이러한 독특한 풍격의 바우하우스 건축물은 현재 독일과 미국에 일부가 남아있을 뿐이어서 그 역사ㆍ문화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 전위예술을 지향하는 중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매력적인 창작 및 전시 공간으로 주목받았던 것이다.
과거 798공장
현재 798예술특구 화랑
물론 798공장은 바우하우스라는 모더니즘 건축의 흔적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1980년대 이전까지 중국 공업화 건설의 흔적과 문화대혁명 시기의 역사적 흔적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798공장은 반세기 중국의 정치, 경제, 기술, 문화, 사상 등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이른바 ‘역사박물관’이기도 했다. 현대예술을 지향하는 중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이러한 사회주의 역사의 흔적은 묘한 회고의 정서와 더불어 작품 창작에도 적절히 활용될 수 있는 매력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서구인들의 눈에 비친 이러한 풍경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해외의 유명 화랑들이 다투어 798공장에 들어온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2000년대 초반 정치권력에 의해 쫓겨난 예술가들과 798공장의 우연한 만남으로 형성된 예술촌은 곧바로 자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798공장의 소유주인 치싱(七星)그룹은 단기임대 기간이 끝나는 2005년에 이 공장을 재개발하여 아파트와 전자상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예술가들은 정치권력이 아닌 또 다른 권력인 자본의 개발 논리에 의해 다시 쫓겨날 판이었다. 예술가들은 극렬히 저항했고, 자신들을 쫓아냈던 베이징시 정부에도 청원서를 제출했다. 베이징시 정부는 마침내 798공장을 근현대 우수 건축물로 지정하면서 개발을 제지하는 한편 798공장을 베이징시 문화창의산업단지로 비준하여 지원하고 그 관리를 치싱그룹에게 담당하게 했다.
베이징시 정부의 이러한 결정에는 1990년대와는 다른 환경 변화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선 798예술촌은 무엇보다 해외에서 주목하는 명소로 부각되었다. 2003년 미국의 <타임>지는 가장 문화적 상징성을 갖춘 22개 도시예술중심의 하나로 798예술촌을 선정했다. 2004년 미국의 <뉴스위크>는 세계 도시 Top12의 하나로 베이징을 꼽았는데, 그 이유는 798예술촌의 존재와 발전이 세계적 도시로서 베이징의 능력과 미래의 잠재력을 증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뉴욕타임즈>는 798예술촌과 뉴욕의 SOHO를 비교하기도 했고, 독일의 콜 총리는 중국을 방문하면서 798예술촌을 방문지의 하나로 선택했다. 798예술촌은 이제 베이징시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화적 상징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 798예술촌은 관광 분야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798예술촌 내 예술가 창작 스튜디오의 은밀하면서도 신기한 공간은 예술가 생활을 동경하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독특한 중국 현대예술의 풍격과 기묘하게 융화되어 있는 건축물 및 주변 환경도 베이징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2005년 798예술특구를 방문한 관람객은 약 50만 명, 2006년에는 약 100만 명에 달했고, 관람객의 60% 이상은 외국인이었다. 동시에 베이징시는 2008년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문화예술도시로서의 이미지는 베이징을 브랜드화 하는데 적합한 방향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 변화는 치싱그룹에게도 새로운 경제적 가치 창출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베이징시는 2006년 798예술특구 건설에 10억 원을, 2007년에는 45억 원을 지원했다. 이 지점에서 정치권력과 자본, 그리고 예술가는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2005년은 베이징의 예술가들에게 승리의 해로 기억될 수 있다. 예술가들은 정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기업의 개발 논리를 잠재우고 자신들의 공간을 확보했던 것이다. 실험성이 강한 현대예술을 추구하는 젊은 예술가뿐만 아니라 국내의 저명한 예술가들도 798예술특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등소평 조각상을 제작했던 청화대학 교수 리샹췬(李象群), 2006년 예술품 경매 최고가를 경신했던 류샤오동(劉小東), 저명 작곡가 리종셩(李宗盛) 등이 그들이다. 해외의 유명한 화랑들도 입주하기 시작했다. 벨기에의 UCCA(Ullens Center For Contemporary Art), 이태리의 常靑畵廊, 독일의 空白空間, 싱가포르의 季節畵廊, 영국의 中國當代畵廊, 대만의 帝門藝術中心과 新時代畵廊 등 국제적 명성이 높은 화랑들이 798예술특구에 입주하여 국제적 교류를 주도했다. 2005년에 798예술특구에 입주한 기업도 63개에서 2007년에는 354개로 증가했다. 카페와 상점이 들어섰고, 글로벌 기업들도 이곳에서 기업행사와 상품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임대료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2002년 ㎡당 하루 50원 하던 임대료는 2008년에는 1,000원으로 상승했다. 그리고 798예술촌을 만들었던 젊은 예술가들은 당연하게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베이징 798예술특구는 전형적인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보여준다. 798예술특구는 예술가/창작 중심에서 이제 전시/소비 중심의 공간으로 변화했다. 정치권력과 자본과 예술가의 동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기업이 주도하는 798예술특구 관리사무실은 부동산 임대수입과 관광자원 수입에 집중했고, 입주한 외국 화랑들은 중국 현대미술에 대한 서구의 수요를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그 가운데 새로운 창조적 실험을 감행하려는 젊은 예술가들의 자리는 점차 사라져갔다. 데이비드 트로스비는 <예술경제학>을 통해 도시 발전에 있어서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도 문화산업의 핵심에 창조적 예술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도시의 발전 잠재력은 그 도시의 창의성에서 비롯되며, 그러한 창의성을 가장 선두에서 구현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들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떠난 예술촌은 이제 무엇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생명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권기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 중국학술원 중국교육센터장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