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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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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 소개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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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화교의 중화요리점 연구: 1880년대1920년대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114, 2017.6, 61-94


이 논문은 화교 중화요리점의 역사와 실태에 관해 188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검토했다. 이 시기의 화교 중화요리점은 기존에 중국인을 위한 중국음식을 제공하는 단계로 규정하여 중화요리가 화교를 제외한 조선인 및 일본인 사이에 대중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선행 연구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상기와 같은 검토를 통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과 화교 중화요리점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냈다.


우선, 화교 중화요리점은 조선화교의 이주초기인 1880년대 이미 서울에 탄생했으며, 일제강점 이전의 개항기는 소규모의 중화요리음식점과 호떡집이 중국인을 위한 중국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1910년대와 1920년대 조선의 대일 쌀 수출의 증가로 인해 조선인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인과 통치자인 일본인의 중화요리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여기에 중화요리는 기본적으로 조선인의 입맛에 맞았을 뿐 아니라 하층민부터 상층민 모두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가격대의 음식을 갖추고 있었다.


화교 중화요리점은 서울과 인천을 비롯한 대도시뿐 아니라 화교 거주자가 거의 없는 각 군의 농촌지역까지 진출, 중화요리점 및 중화요리음식점이 193010월 현재 1,635개소, 호떡집 1,139개소, 2,774개소에 달했다. 1920년대의 중화요리는 중국인을 위한 중국 음식단계에서 조선인·일본인과 중국인을 위한 중국 음식단계로 이행, 보다 대중화 되었다.


또한 각 중화요리점은 대체로 몇 명의 자본가와 노동력 제공자에 의한 합자조직으로 창업되었으며, 노동력 제공자가 전문경영인으로서 독립경영활동을 함으로써 사업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1920년대 들어 서울을 비롯한 각 주요 도시에 화교 중화요리점의 동업조합이 결성되었다. 예를 들면, 서울에는 1921년 화교 중화요리점 및 중화요리음식점의 동업조합인 중화민국요리점조합이 결성되어 조합원의 친목 도모, 과당경쟁 방지, 업계의 질서 유지 등에 기여를 했다.


1910년대와 1920년대 화교 중화요리점의 급속한 발전은 중화요리의 대중화, 중화요리점의 독특한 합자조직, 그리고 화교 중화요리 동업조합의 결성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을 조선총독부와 중화민국총영사관의 당안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