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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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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겉과 속, 뤼순과 다롄 _ 김남희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개항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외세의 압력에 굴해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열어야 했던 오욕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서구문물이 유입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개항이다. 따라서 개항의 공간 즉, 개항장에는 영토 확장을 꿈꾸는 제국주의 열강의 탐욕이 배어있는 반면 근대 서구문명의 이식과 유입의 흔적도 동시에 남아 있다. 개방과 다양성, 글로벌화가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 지금, 아시아의 개항도시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근대유산을 통해 외부세계와 교류하는 길목이자 무역, 외교의 각축장으로서의 ‘화려했던’ 과거를 뽐낼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중국에도 근대와 식민의 이중성을 탑재한 유산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도시가 적지 않다.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독특한 도시경관을 갖게 된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이 그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이다. 이 두 도시는 외세에 의해 ‘발견’되고 ‘발전’한 근대식민도시이다. 


지금이야 다롄이 뤼순보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지만, 근대도시로서의 발전은 뤼순이 조금 앞섰다. 일찍이 랴오동(遼東)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뤼순의 군사전략적 위치를 간파한 청나라 북양대신(北洋大臣) 리홍장(李鴻章)은 1880년부터 이곳을 군항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뤼순은 러시아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중국의 동북지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러시아가 발 빠르게 움직인 덕이었다. 당시 청일 간 전후처리를 위해 체결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馬關條約)에 따라 청나라는 일본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재정이 열악했던 청나라는 결국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차관을 공여한 러시아는 그 대가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각종 이권을 차지했다. 때마침 극동함대 기지를 물색하고 있던 러시아의 시야에 거센 바람을 피할 수 있고 수심이 깊은 부동항인 뤼순항이 들어왔다. 그들은 부푼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다롄만에 위치한 이 항구를 손에 넣어 다롄, 선양(瀋陽), 창춘(長春), 하얼빈(哈爾濱)까지 철도를 연결한다면, 시베리아철도와의 교통이 훨씬 더 원활해질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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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위산탑(白玉山塔)에서 내려다 본 뤼순항


결국 1898년 뤼순커우(旅順口), 다롄만 그리고 그 일대 수역에 대한 조차권을 획득한 러시아는 당시 관동부사령관이었던 예브게니 알렉세예프(Evgenii Ivanovich Alekseev)의 주도 하에, 1901년부터 본격적으로 뤼순을 러시아해군기지이자 군항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뤼순은 유럽풍 시가지가 조성되는 등 이른바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서서히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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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모습을 간직한 뤼순역
              

하지만 러시아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새로운 통치자로 등극한 것이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며 유럽과 같은 ‘우월한 민족’이 되고자 했던 일본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식민지 경략 중의 하나가 바로 교육이었다. 다시 말해, 식민지인을 대상으로 한 우민화교육은 ‘제국의 백년대계이자 도독부의 가장 중요한 정치업무’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은 식민교육을 담당할 교원양성과 더불어 곳곳에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중국의 초입에 위치한 새로운 식민지 뤼순도 예외는 아니었다. 뤼순중학이나 뤼순고등공학처럼 교사(校舍)를 신축한 학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기존의 러시아 군사시설 혹은 공공기관 건물을 재활용했다. 뤼순사범학당, 뤼순공과대학, 뤼순제2심상고등소학, 뤼순시립푸시킨소학 등이 그랬다. 이는 러시아의 기존 도시계획을 폐기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충분히 활용하겠다는 일본의 식민정책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자신들의 국수(國粹)와 정신을 식민지에 전파하고자 했던 일본의 식민교육이 유럽풍이 다분한 건물에서 행해지게 된 것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뤼순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이름난 타이양거우(太陽溝)에 가면 뤼순사범학당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뤼순사범학당은 1898년 미국인이 경영하던 잡화점을 교사로 전용한 탓인지 그것이 주는 화려함은 오늘날의 ‘학교’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3년제 학제로 운영된 이 학당은 1918년 개교 당시에는 남학생만 모집했지만, 1920년부터는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당시 배움에 목마른 젊은이들 사이에서 뤼순사범학당은 상당한 유명세를 떨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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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뤼순사범학당



뤼순사범학당 맞은편으로 지금은 ‘초대소(招待所)’ 간판이 걸린 낡은 건축물이 하나 있다. 겉보기에는 허름하지만, 이곳에는 중국 동북지역의 아픈 역사가 숨어있다. 이 건물은 본래 러시아 국적의 중국인 지펑타이(紀鳳臺)의 저택이었다. 지펑타이는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고 러시아군대의 통역관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돈벌이에도 꽤나 수완이 있었던 모양이다. 군부대를 따라 중국과 러시아 이곳저곳을 오가던 그는 뤼순과 다롄에 도박장을 차리고 러시아의 군관과 관리는 물론, 중국인 부자들의 돈까지 쓸어 담았다. 하지만 그의 중국에서의 영화는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함과 동시에 막을 내렸다.


그가 러시아로 돌아간 뒤, 주인을 잃은 이 저택은 이후 일본 만주철도주식회사로 넘어가면서 야마토호텔(大和旅館)로 변신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이른바 동북조업(東北祖業)을 꿈꾸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푸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 뤼순의 야마토호텔에 묵으며 일본을 등에 업고 복위를 도모했다. 이 야마토호텔은 1932년 3월 그가 드디어 만주국 황제가 되어 신징(新京, 지금의 長春)으로 떠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묵었던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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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야마토호텔


식민통치자의 유럽풍 도시 건설은 뤼순에서 그치지 않았다. 원하던 다롄만을 손에 넣은 러시아는 새로 획득한 항구 근처에 도시를 세우고 러시아어로 ‘먼 곳’을 의미하는 ‘다이니히(Дальний)’라 명명했다. 본래 칭니와(靑泥洼)라는 이름의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이곳은 새로운 이름을 얻고 근대도시로 변모해갔다. 이 도시가 바로 지금의 다롄이다.


러시아는 7년 간 다롄을 통치하며 유럽 고전주의에 러시아의 풍격을 절충해 도시를 건설했다. 식민통치자들은 다롄을 ‘동방의 파리’로 만들고자 했고, 그런 만큼 파리의 도시계획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유럽의 도시계획에서 유행했던 광장도 도입했다. 지금도 다롄은 중국에서 광장이 가장 많은 도시로 꼽힌다. 아시아 최대의 공원이라고 하는 싱하이(星海)광장도 바로 이곳에 있다.


‘광장의 도시’ 다롄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광장이 바로 중산(中山)광장이다. 1899년 다롄항 건설과 함께 조성된 직경 213미터의 이 광장은 당초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이름을 따 ‘니콜라예프 광장’으로 불렸다. 광장의 이름이 쑨원(孫文)의 호(號)를 딴 중산광장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46년의 일이다. 1902년에는 다롄항에서 중산광장을 직선으로 가로질러 그 지나온 거리만큼의 지점에 역사를 설치했다. 이름 하여 ‘다이니히’역이다.〔지금의 다롄역은 1935년 지어진 것으로 원래의 위치와 다르다.〕 이렇듯 중산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내뻗은 열 개의 대로와 그 각 대로에서 갈라져 나온 지선들이 서로 만나며 다롄이라는 도시의 골격이 완성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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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예프광장(중산광장)



중산광장은 도시공간의 중심일 뿐 아니라 다롄의 사회·경제의 중심이었다. 러시아는 도시의 기능과 주민의 거주에 있어 분리정책을 취했다. 도시는 행정구, 유럽구, 중국구로 나뉘었다. 이는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다롄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러시아의 분리정책과 도시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중산광장에는 각종 회사와 은행, 호텔 등이 들어섰다. 덕분에 중산광장은 일본이 다롄에서 취한 식민지 금융정책을 한 눈에 조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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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요코하마쇼킨은행(현, 중국은행 다롄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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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선은행(현, 중국공상은행)



1905년 러시아로부터 뤼순과 다롄의 조차권을 넘겨받은 일본은 식민지 경제를 장악하기 위한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해나갔다. 그 임무를 부여받은 3대 금융기관이 바로 요코하마쇼킨(橫濱正金)은행과 조선은행,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다롄지점이었다. 일찍이 1904년 다롄에 지점을 설치한 요코하마쇼킨은행은 일본의 중국 동북지역 국고은행 역할을 하다가 1913년 조선은행에 그 업무를 넘기고 외환업무만 담당했다. 요코하마쇼킨은행의 뒤를 이어 일본의 식민지 중앙은행이 된 조선은행은 일본정부의 지원 아래 동북 금융시장의 패권을 장악했다. 한편,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염전이나 농업, 수산업 등에 장기대출을 해주던 것에서 부동산금융업, 특히 산업개발에 대한 채권업무로 방향전환을 한 후, 일본정부의 보호 아래 급속히 몸집을 불려 동북지역에 진출하는 일본기업을 위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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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동양척식회사 다롄지점(현, 교통은행)



이들 기관은 이미 다롄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지만, 일본설계사의 손으로 세워진 유럽식 건축물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지금은 각각 중국은행 다롄분국, 중국공상은행, 교통은행이 입점해 다롄경제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뤼순과 다롄에 잔존해 있는 근대유산은 현재 이 도시의 중요한 상징물이 되고 있다. 관광명소이자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이 도시들이 겪어온 근대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역사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 앞에 우리는 감탄하거나 압도되지만, 그 내부에서 작동되었던 식민제국주의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함께 통찰해내기는 쉽지 않다. 유산을 남기는 것이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역사는 무엇이며 또한 어느 만큼이어야 할까.


8. 전차와 버스가 함께 달리는 다롄 거리.jpg

전차와 버스가 함께 달리는 다롄 거리


뤼순과 다롄의 근대유산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 혹은 은행이나 호텔 등으로 여전히 제 나름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유산들이 현대인의 ‘삶의 일부’가 되어있는 현실이 역설적으로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뤼순의 타이양거우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에게, 다롄 중산광장의 은행을 드나드는 시민들에게 식민의 역사란 이러한 유산이 있음으로 해서 더욱 강하게 각인되고 있을까 아니면 바쁜 일상과 뒤섞여 오히려 흐릿해졌을까.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이국적 풍경 앞에서 아무리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도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던 식민의 역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유럽풍 건물의 저 견고한 돌덩이 뒤로 꼭꼭 숨어버리는 것만 같다. 식민의 역사와 한데 묶여있는 근대의 유산을 어떻게 바라보고 보존하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중국도시이야기 7】

 

김남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참고문헌

정근식·신혜선 편, 『다롄연구 : 초국적 이동과 지배, 교류의 유산을 찾아서』, 진인진, 2016.

취샤오판 지음/박우 옮김, 『중국 동북 지역 도시사 연구 : 근대화와 식민지 경험, 진인진, 2016.

권경선·구지영 편, 『다롄, 환황해권 해항도시 100여년의 궤적, 선인, 2016.

李星建, 大和旅館 : 僞滿洲國政權誕生的産房, 『文史春秋12, 2013.

劉岩, 日本在大連地區所構建的金融殖民體系, 『蘭臺世界S6, 2014.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李元奇 撮影, 李振榮 主編,大連夢中來, 人民美術出版社, 1996.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