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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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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 소개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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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강원도 화교사회의 형성과 변화: 1900년대-1940년대를 중심으로」, 『한림일본학』 제30집, 2017년5월, 110-138쪽.


이 논문은 기존에 다루어지지 않았던 강원도 화교에 관한 연구로 근대시기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190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약 50년에 걸친 근대시기 강원도 화교의 형성과 역사를 인구의 추이, 경제활동, 그리고 화교배척사건과 중일전쟁의 영향을 중심으로 검토한 결과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화교의 강원도 정착은 대체로 1900년대에 이뤄졌으며 1920년대 타 지역에 비해 높은 인구 증가율을 보였다. 그러나 조선화교 전체에서 강원도 화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1-3%에 불과, 화교의 거주가 희박한 지역의 하나였다. 강원도 화교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산동성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둘째, 강원도 화교의 직업은 상인,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었으며, 타 지역에 비해 노동자의 비중이 높았다. 화상은 포목상점과 잡화점을 경영하여 각 군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노동자는 수리조합, 철도, 도로공사의 노동자로 일했다. 농민은 상업 목적의 야채재배를 활발히 전개, 춘천의 경우 야채시장을 독점하는 지위를 차지했다. 또한 화교건축청부업자는 1910년대 풍수원성당, 용소막성당, 원주성당의 고딕식 붉은 벽돌 건물을 시공했다.


셋째, 강원도화교는 19317월 발생한 화교배척사건으로 큰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타 지역보다 중국으로 귀국한 화교가 많았다. 그것은 강원도 화교 가운데 노동자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중일전쟁 때도 타 지역에 비해 많은 화교가 귀국하여 화교의 경제활동이 많이 위축되었다. 1938년 이후 인구가 점차 회복되었지만 이전의 인구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