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교육성은 1949년 4월 1일 북한 역내 화교학교에 대한 일체의 업무를 이관 받았다. 또한 같은 해 7월까지 학교 인수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문화 하고, 1950년 4월에는 ‘중국인초급중학교 규정에 관해’ 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이를 근거로 북한 교육성은 전국 약7천 명에 달하는 화교 학생의 교육에 대한 관리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북한 교육성은 당연히 화교학교의 교과서, 교원 임면, 학교 운영 등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가졌다. 하지만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 이후에도 북한 화교학교는 중국 국내에서 파견된 중국인 교원이 중국 국내의 교과서를 사용하여 강의를 진행했다.
1955년 6월 주조선중화인민공화국대사관은 자국의 외교부 및 교육부에 보고서를 발송했다. 그 내용은 같은 해 3월 26일 조선 교육상(教育相) 명령 제9호가 평양중국인중학교에 대해 준엄한 비판을 가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양중국인중학교는 북한정부 및 교육성의 결정과 지시를 학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수 과정안과 교육 내용면에서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고 객관적인 조건에 의지하여 업무를 안이 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 교육은 학생에게 중국의 현실과 장래의 발전을 위한 올바른 견해와 열정적인 투지를 갖게 하는 다양한 교육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일부 학생은 북한 현실의 정치 정세와 전후 복구건설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있으며 학생규약과 기본 행동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차후 새로운 교수 과정안과 수업목표를 제정하여야 하며 각종 교과서를 조선 국내에서 조달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중국인학교가 필요로 하는 교직원은 새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전원 조선 국내에서 파견하도록 한다.
1949년 이후 학교 운영에 관한 일체 자금을 부담하는 북한 교육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후 복구 건설 등 북한의 정책에 무관심한 화교학교가 비판 대상에 오른 것은 이해가 간다. 교육성은 평양중국인중학교의 중국어 교육을 조선어 교육으로 변경하는 정책을 세우고 조선인 교원이 교육성에서 지정한 교과서로 화교 학생을 가르치도록 했다. 즉, 북한정부는 1955년 화교학교에 대한 현지화(現地化)를 전개하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중국정부의 대응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중국 외교부는 1955년 7월 2일 주조선대사관에 질문에 대한 답을 보냈다. 먼저 대사관이 화교연합회와 평양중국인중학교 교원에게 중국인중학교의 문제점과 관련사항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조사에 의해 실태 파악이 끝나는 대로 대사관 관원을 국내에 보내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토의를 하여 대책을 수립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같은 해 7월 26일 중국 외교부와 교육부는 주조선대사관에 두 번째의 전문(電文)을 보냈다. 이 전문에서 중국 정부는 북한 교육성이 파악하고 있는 중국인중학교와 중국인 교원의 상황 및 결점, 그리고 의견에 대해 북한 정부와 협상하여 중국 측에 전달받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7월 29일 중국대사관과 북한 외무성 관계자 간의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 자리에서 조선의 부상(副相, 차관)인 이동건은 중국인중학교 교원의 태도는 예전부터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면서, 최근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즉답을 피했다. 며칠 후, 북한 교육성의 간부가 평양중국인중학교를 방문하여 왕건지(王建智) 교장을 만났다. 그는 지난 3월 26일에 발표된 교육성 제9호령의 주요 내용은 중국인중학교가 이룩한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몇 가지 결점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학교 교원이 엄중한 과오를 범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이와 같은 의사를 중국대사관에 전달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듬해 1956년 1월 21일 조선정부 문화선전성 도서관리국은 평양중국인중학교에 많은 중국어도서를 기증했다. 이에 대해 당시 북한의 중국어신문인 『전우(戰友)』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문화선전성 도서관리국은 화교의 중국어 서적에 대한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1월 21일 평양시 화교 좌담회를 소집하고, 화교 문화교육에 대한 조선정부의 배려에 대하여 언급했다.…… 좌담회에서 문화선전성 도서관리국은 화교연합회와 평양시중국인중학교에 역사자료, 문화작품, 자연과학, 중국의약학, 기계학 등의 많은 중국어 서적을 기증했다.”
이처럼 1955년 북한 화교학교에 대한 현지화 문제는 중국정부의 반응을 접한 북한 정부가 교육성 제9호령에 대한 해설을 일부 수정하고, 화교에 대한 중국어 교육을 계속적으로 지지한다는 의사표명으로 일단락되었다.
사진 1 평양중국인중학교 청사(1996.9.8)
사진 2 청진(화교)소학교 아동단 조직 확대의 신문기사
주: 북한의 중국어신문 『민주화교(民主華僑)』(1950.3.4)
【북한화교와 한반도 8】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