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공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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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동묘에서 본 관우 숭배 _ 유장근

중국사회에서 관우의 숭배는 오랜 전통이다. 적어도 진대(晉代) 이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 전통은 이후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고, 중국 문물의 역외 전파에 따라 인근 지역에도 소개되었다. 한국에도 중국의 여러 문물이 유입된 것과 마찬가지로 관우 숭배의 상징인 관제묘 역시 이 땅에 전파되면서 뿌리를 내렸다. 바로 서울에 있는 동묘가 그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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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서울의 동대문 밖에 위치한 동묘 입구 모습.

정숙하고 조용한 내부와 달리 입구에는 난장으로 인해 소란하고 지저분한 상태였다.


남원이나 안동 등에도 관제묘가 있지만, 동묘는 말하자면 한국 관제 신앙의 표준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관우 숭배와 같은 민간 종교의 핵심 내용이나 전파 과정, 현지에서의 융합이나 확산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유산인 셈이다.


실상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동묘를 본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니다. 직접 가 본 동묘 일대는, 말하자면 성소라는 분위기와는 달랐다. 담장 밖 주변에 행상이 포진한 탓도 있고, 관제묘 자체가 우리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유산인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경내는 신을 모시는 공간으로서의 품격이 있었다. 정갈하고 질서정연하였으며, 건물의 규모나 형식 및 배치 또한 신들 중의 황제라는 타이틀, 곧 관제(關帝)’를 모신 사당답게 위엄이 있었다.


관제의 신상은 정전인 현성전(顯聖殿) 내의 중앙 뒤편에 단을 두어 높게 만든 별도의 공간 속에 엄숙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예의 그 수염을 길게 드리우고, 검은 빛의 면류관과 황금색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다소 짙은 금색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빛이 약한 탓일 수도 있지만, 웬일인지 어두운 표정이었다. 신상의 배면에는 붉은 해와 흰 달이 그려진 일월곤륜병풍을 둘렀고, 좌우에 두 명의 시봉자를 배치해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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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동묘의 본전인 현성전의 정면 모습.

정면 중앙에는 고종이 내린 동묘의 편액이, 우측에는 중앙의 것과 형태와 내용이 똑 같은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우측의 편액은 북묘에서 옮겨온 것이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전형적인 관제묘의 구성을 따르고 있지만, 한두 가지 특이한 점은 중국음식점에서 통상적으로 보는 관우 화상과 달리 관제의 표정이 어둡게 조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어두운 표정의 본상은 그가 비극적으로 사망한 당시의 표정을 모델로 하여 조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나라 때까지 관우상은 억울하고 분노한 모습으로 만들어졌고 송나라 때에 이르러 그 면모가 조금씩 변화한다고 한다. 위의 신상은 명말에 만들어졌을 것이지만, 이미지는 당대 이전의 비극적 관우상을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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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동묘의 정전 내에 안치된 금색의 관우 신상.

길고 검은 수염과 면류관, 황금색 옷을 입은 외형과 달리, 얼굴은 슬픈 형상이다. 들고 있는 오른손이 마치 눈물을 닦으려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비극적 신상은 피살 당시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서, 대체로 당대 이전의 모습이었다.


또 다른 특이점이 있었다. 정전 중앙의 관우 신상 오른쪽 빈 공간에 본상과 외형은 거의 같지만, 얼굴상은 매우 다른 맛을 풍기는 관우상이 또 있었던 것이다. 생명력 넘치는 얼굴을 한 관우상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도 호위장수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그러나 동일한 공간 내에 성격이 다른 두 종류의 관우 신상이 배치된 까닭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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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4  본전 오른쪽에 모셔진 또 다른 관우 신상.

1910년에 북묘가 해체되면서 동묘로 옮겨온 이 북묘 신상은 길고 검은 수염, 황금색 면류관, 붉으죽죽한 안색 등 호쾌하면서 힘차게 그려진 것으로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관우상이다. 송대 이후에 점차 표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본상 우측의 관우상과 그 앞의 호위 장수들은 서울의 성균관 뒷산에 있던 북묘가 해체되면서 이곳으로 옮겨놓았다는 연구논문을 보면서 의문이 풀렸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총독 정치가 실시되던 1910년에 일어난 일이다. 특히 북묘에 있던 관우상은 생시의 모습을 본떠 조영한 것이어서 그처럼 생생한 얼굴로 남아있게 되었다고 한다. 정전의 외부 정면에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라는 고종의 편액이 두 개 걸려 있는데 그 이유 역시 북묘의 것을 동묘에 합사한 데서 비롯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울의 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군의 요청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조선의 유교주의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기는 하였지만, 명의 요청이라서 부득이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후기의 조선 국왕들은 관우 숭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고종 때에는 일본에 대한 저항감과 국가의 수호라는 큰 명분을 내걸고, 종래 '왕(王)'에 머물고 있던 관우를 '제(帝)'로 승격시켰다. 명의 신종이 내린 편액의 봉호는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였으나, 고종은 이를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로 격상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위와 같은 국가보위라는 목적이 크게 작용하였겠으나, 내심으로는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상의 황제에 맞는 신격으로서 관우의 황제화가 필요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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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5  고종이 동묘에 내린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편액.

선조 때 내린 편액에는 이었으나 고종 때에는 성제로 격상되어 있다. 문살 안쪽에 현성전(顯聖殿)이란 편액이 보인다.



또 고종 시대에는 관제를 국가의 제사에 포함시키는 작업, 그에 관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 서울의 각지에 관제묘를 세우는 작업 등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말하자면 관우 숭배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민간 사회에서도 관우 숭배가 새로운 붐을 이루었는데, 이는 주로 무당들이 주도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주도하여 세운 관제묘도 적지 않았으며, 이는 대한제국이 공식적으로 모든 제사를 철폐한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관제 신앙이 한국의  민간 사회에 뿌리를 내리면서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관성교, 선음즐교, 상생대도, 금강대도, 무량천도 등도 이 무렵을 전후하여 새로운 민간 종파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사실 국가와 관우와의 관계는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예컨대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던 송왕조는 그의 무용과 충군애국 정신을 높이 사면서 그에게 ‘충혜공(忠惠公)’과 ‘소열무안왕(昭烈武安王)’이란 시호를 내렸고, 명대 만력제 때에는 '제(帝)'라는 칭호를 내림으로써 관우는 신의 위계에서 일약 최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청에서도 관우 숭배는 계속되었으니, 순치제 때(1692)에는 ‘충의신무관성대제’로 격이 높아졌고, 광서(1879) 시기에는 거기에 다시 8개의 칭호가 더해져 초유의 최장 시호를 얻게 되었다. 그만큼 국가의 위기가 많았던 것이고, 그 때마다 관제가 국가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초절정 전지전능의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국가와 달리 민간사회에서는 안전의 신으로 또한 재산을 지켜주는 신으로 더 숭배되었으니, 관우 숭배신앙은 후대로 갈수록 국가와 사회에 걸쳐 확대되는 양상이었고, 이는 중국인의 해외진출과 더불어 초국가적 존재로 변모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관우는 19세기말 20세기 초에 동아시아에서 제일 바쁜 신이었던 셈이다.


허나 이 동묘와 재한 중국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것은 그들 탓이라기보다 한국인의 무관심이나 한국전쟁 이후의 대중 적대 정책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최근 들어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이곳을 안내하자는 제안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관우 숭배에 대한 종교 관행이 예전과 같을지도 알 수는 없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2】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