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공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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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의 아미산에서 본 종교관행 _ 유장근

이번 호부터 【현장&공간】에는 약 1년간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유장근 명예교수의 칼럼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유장근 교수는 민간결사, 민간종교, 사회사 연구 등 오랫동안 학계에 몸담으며 많은 연구성과를 내고 있다. 지역사회, 중심이 아닌 주변, 그리고 중국 민간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특히 역사연구에서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그가 현지조사를 통해 느꼈던 사물이나 인간, 유적에 관한 통찰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풀어나갈 예정이다.


중국과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와 사회에는 수 없이 많은 관행이 만들어져 왔다. 그러한 관행 중에서 종교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제도종교 뿐만 아니라 민간사회 역시 자신에게 필요한 각종의 민간종교들을 만들어내면서 인민의 멘탈리티와 행동양식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중국 불교의 4대 성지 중에서 보현보살의 상징으로 꼽히는 아미산(峨眉山)에 대해 10여 년 전에 진행되었던 현지답사와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중국인들의 종교적 관행과 그것의 현재화를 들여다보기로 하자.


아미산은 사천의 중심부에 펼쳐진 대분지와 서부의 티베트고원 경계선에 걸쳐 있는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큰 산이다. 아열대 기후대에 속해 있어서 숲이 우거져 있지만, 금정(金頂)이라 불리는 정상부는 놀라울 정도로 넓다. 제단을 차리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에 알맞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1  금정에서 바라본 아미산의 장려한 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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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이 보현보살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시기는 동진(317-420) 때의 일이라고 한다. 당송시대를 거치면서 이 산의 보현보살 신앙은 발전을 거듭하였고, 특히 명청대에 이르러 수천여 명의 승려와 150여좌에 이를 정도로 많은 사원이 건립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당연히 전국의 수많은 신도들은 성지 순례하듯이 여타의 불교성지와 더불어 이 산을 찾았다.


사진 2  금정에 있는 와운암

(최근에는 건물을 은빛 찬란한 은정으로 개조하여 이런 모습은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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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아미산 불교문화는 인민공화국 시기에 취해진 종교통제정책으로 잠시 쇠퇴기를 맞이하였지만, 개혁개방 정책 이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다시 부활하였다. 최근에 이르러 약 300여명의 승니가 30여개의 사원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더해 1996년에는 인근의 낙산대불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명성은 더더욱 높아졌고, 원근에서 온 신도들 역시 이전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필자 일행도 그런 명성에 따라 아미산에 올랐는데 사실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말하자면 전성기의 모습이 재현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단순여행자보다는 대부분 순례객으로 보이는 중국인들이 아미산 정상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필자가 눈여겨보았던 것은 고원의 풍경이나 그와 일체화된 보현보살보다도 그 보살에게 소망을 빌러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찾은 그 날에도 수많은 중국인들이 그곳에서 향을 피우며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다행히 어느 소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소년과 그의 모친을 만날 수 있었다. 젊은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이곳까지 일부러 올라와 참배를 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사천성 아패주(阿壩州) 금천현(金川縣) 등룡하주 달이기사(騰龍夏周 達爾基寺)에서 온 두 분의 티베트불교 승려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아패주는 티베트족 자치주이며, 금천은 청대 건륭제(1735~95) 때 있었던 대외 군사 원정지 중 한 곳에 해당되는 곳이다.


필자가 대면하였던 두 팀보다 훨씬 더 많은 중국인들이 금정에 세워진 와운암 일대를 메우고 있었다. 그 대부분은 그런 저런 인민들, 이른바 노백성들이었다. 특히 노인들이 그룹을 지어 경내에 와서는 커다란 등짐을 풀어놓고 그 안에서 향을 꺼내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예외 없이 등에 무거운 등짐을 지고 아미산에 올랐는데, 이 짐 속에는 참배에 쓰이는 종교용품과 노정에 필요한 각종 일용품들이 들어 있었다. 사실 이러한 참배형태는 청대의 사찰 순례에서 익숙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보다 훨씬 많은 약 1백 여 명의 노인들도 참배를 마치고 정상의 사원을 배경 삼아 단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 3  불공을 드리기 위해 아미산행을 준비 중인 노백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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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본다면, 아미산 불교는 인민공화국 이전에 이곳을 찾던 신자와 새로이 참배 대열에 합류한 젊은 세대 등이 뒤섞이면서 이전과 다른 중흥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또한 그곳이 보현보살의 중심지라고 하지만 보현의 상징이나 의미를 내재화하려는 측면보다, 오랫동안 일상 속에서 추구해 왔던 복록수(福祿壽)를 소망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사진 4   와운암에 모셔진 흰색의 보현보살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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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곳은 한족과 티베트족이 접근하는 경계지대이므로, 한족문화와 티베트문화가 산중의 불교를 통해 교섭하는 현장이기도 하였다. 나아가 산과 문화유산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는 중국정부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통제시스템도 과거에 비해 훨씬 강화되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개혁개방 이후 변경지역에 대한 관광지화는 국가체제가 침투하는, 중요하고도 익숙한 방식으로 활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십몇 년이 지난 요즘의 상황은 어떠할까. 관련 자료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 보면, 한마디로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급변해 있다. 아미산 정상부인 금정에는 금빛 찬란한 사면시방보현좌상(四面十方普賢座像)이 새로 만들어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2006년에 완성된 이 좌상은 4마리의 코끼리를 이용해 만든 대좌에 앉아 있으며, 그 주위에는 10마리의 흰코끼리상이 이 불상을 호위하듯이 둘러싸고 있다. 좌상의 기단부 내부도 석굴형태로 조성하여 이곳에 대형 금불입상을 세우고, 천장이나 벽면 모두 금색으로 둘렀다. 그야말로 금빛 찬란한 불상이 정상을 휘어잡고 있는 느낌이다.


2004년 당시만 해도 금정에는 보현보살을 모신 와운암이 있을 정도였다. 목조로 된 미음자 형 건물로서 정면부의 건물은 이중 지붕을 두어 마치 3층처럼 보이고, 그곳의 정중앙에 흰색의 보현보살이 좌상형태로 먼 곳을 응시하는 구도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건물조차도 은빛 나는 푸른 기와지붕으로 개조하여 은정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에 동정이라 이름붙인 건물도 새로 조성하였으니, 아미산 정상은 그야말로 금정, 은정, 동정이라는 세 개의 종교건물과 휘황한 금빛불상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재탄생된 셈이다.


사진 5  지난 10여년 간에 새로 조성된 금정, 동정, 그리고 사면시방보현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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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화는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자부심을 내세우려는 욕심으로도 볼 수 있다. 아울러 자랑스런 문화유산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좀 더 그럴듯한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낸 결과일 수도 있다. 다만, 그 변화가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보현보살과 아미산의 본질적 의미를 훼손하지 않았는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종교적 관행도 1천여 년 이상을 거치면서 퇴적된 역사적 산물로 본다면, 그러한 관행 만들기 전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황금을 지나치게 덧붙인 탓에 본질을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부분이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1】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