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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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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요코하마의 개항과 차이나타운의 변천 _ 이선화

중국학술원에서는 지난 2017년 1월 16일부터 24일까지 8박9일간의 여정으로 일본의 3대 차이나타운이 위치한 요코하마, 고베, 나가사키를 방문 및 조사하고 돌아왔다. 이번 호에서는 그 첫 방문지인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조사단의 조사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진 1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의 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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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는 1859년에 개항이 되었다. 요코하마 개항자료관 이토 이즈미 연구원의 설명에 따르면, 요코하마는 조계지의 형태로 외국인과 일본인이 분리 거주하지 않았으며, 함께 섞여 사는 잡거의 형태로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외국인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던 야마떼 거류지에 수로를 만들어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지형적인 제한을 가하기도 하였다.





사진 2  요코하마 개항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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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당시, 요코하마에 온 화교들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서양 상인의 무역 중개자로서 온 것이다. 중국의 매판들은 서양인들의 교역을 돕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 하나는 양복점, 중화요리점, 수리점 등 기술자로 요코하마에 이주해왔다. 이들은 요코하마에 생겨나는 서양인들을 비롯한 새로운 수요에 부흥하였다. 개항 시기 전체 외국인 인구의 60% 정도가 화교 인구였다는 것만 보아도 그들의 차지하는 비중을 확인할 수 있다. 요코하마의 화교들은 대부분 중국의 남쪽, 홍콩이나 광둥 지역에서 온 경우가 많았다.


1867년에는 화교들을 대표하는 중화회관의 전신이 탄생하였고, 1899년에는 정식으로 재단법인화가 되었다. 당시 중화회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1862년에 형성된 관제묘에 대한 관리였다. 1859년에 개항을 했지만, 1871년 청일수호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무조약 국민이었다. 1871년에 조약이 체결되면서 요코하마에 총영사관이 설치된 것이 1878년이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1945년 공습과 피해, 그리고 종전으로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을 전후로, 화교총회는 대륙계와 대만계로 분리되었다. 대륙계와 대만계의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요코하마 중화학교 역시 이러한 영향으로 1952년 두 개로 분리가 되었다. 전후(戰後) 요코하마는 화교총회 및 중화학교가 대륙계와 대만계로 분리된 채로 운영되어 왔다.


사진 3  대륙계 화교학교인 요코하마 중화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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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관제묘 화재 사건 이후, 제4대 관제묘를 중건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관계를 넘어 대만계와 대륙계가 힘을 합쳐 관제묘를 건설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간의 화합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화교총회나 중화학교는 분리되어 있지만, 요코하마의 화교들은 서로 함께 자라고 생활한 친구이고, 마을 사람이고, 동포라는 점에서 그들을 정치적인 입장으로 나눌 수만은 없는 공동체라는 점을 중화회관 세키 사무국장은 강조하였다. 이러한 격변 속에서도 요코하마 차이나타운과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사로잡는 관광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중심에는 15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이곳을 지켜온 요코하마 화교들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선화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