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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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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화교농민 _ 송우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북한화교의 직업은 그들을 둘러싼 다양한 외적환경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1950년대 중반기부터 북한에서 전개된 각 산업의 협동화 정책은 조선의 개항기부터 지속되어온 북한화교의 직업 양상을 개인 경영에서 협동 경영(집단경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생산기반이 파괴되고 농지가 유실되었으며 노동력 부족 등으로 인해 생산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이에 따라 인민들의 생활도 갈수록 궁핍해졌다. 북한정부는 전후 복구의 기본 노선으로 중공업과 경공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방침을 제시하고 이의 달성을 위해 각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개인경영에서 협동경영으로 전면개조를 단행한 것이었다.


해방직후 북한에는 약1만 호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었다. 직업별 분포를 살펴보면, 1948년 현재 농민 45%, 상인 18%, 수공업자 및 노동자가 21%, 무직 16%의 순이었다. 북조선임시정부는 1947년 봄부터 북한화교들에게도 토지분배를 실시했는데 6,260호에게 970만평의 토지가 분배되었다. 그 결과 화교 농민의 수가 급증하게 되어 1952년에는 전체 인구의 58.7%에 달하는 5,576호의 화교가 농업에 종사했다.


북한에서는 1954년부터 농업 협동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북한정부는 화교농민에 대해서도 협동조합의 가입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 협동화 방침은 결과적으로 농민들이 해방 이후 분배 받은 토지를 다시 잃게 된다는 점에서 큰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는 화농의 협동조합 가입자 수를 증가시키기 위해 1955년 봄부터 지역별로는 평양, 계층별로는 화교빈곤층을 중심으로 특별 지원을 시행했다. 정부는 1955년 봄, 생활 형편이 곤란한 700여 호의 화교농민에게 49t의 식량 배급과 579만원의 융자, 그리고 농약과 비료 등을 지원했으며, 이듬해 봄에는 평양의 5개 화교 농업생산합작사에 6만5,000평의 논과 2만5,000평의 밭을 제공했다. 그 결과 1956년 6월에는 841호의 화교농민이 49개의 화교농업협동조합을 조직하였으며, 가입 비율은 30%에 달했다.


한편, 북한정부의 화교농민 포섭정책을 중국정부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 일부 설명해 줄 수 있는 자료로 당시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이 중국정부에 제출한 보고서가 있다.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측이 화교농민의 협동조합 가입을 인정하는 내용과, 가입방식으로, “화교 집중 거주 지역의 경우 조선농민과 협동조합 설립의 조건이 불충분한 곳에서는 화교합작사를 설립하고, 조선농민의 합작사 가입을 환영한다. 반대로 각지에 분산되어 거주하는 화교농민의 경우, 가능한 한 해당지역의 조선농업사(협동조합)에 가입하도록 독려한다”라고 되어있다. 당시 협동화 정책은 중국에서도 실시되고 있었는데 북한의 농업 협동화가 구 소련의 일괄개조방식이 아닌 중국의 단계적 집단화와 유사했다는 점에서 중국의 지지를 받았다.


화교 개인농가의 협동조합화 사업에는 북한 화교연합회의 역할이 컸다. 연합회는 이미 조직된 화교 협동조합에 관한 선전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전우(戰友)』(1956년 6월 30일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도되었다. “양자청(梁子淸)은 지난해 가을 홍광(紅光) 농업생산합작사에 가입해, 579평의 토지에서 25.5톤의 야채를 수확했다. 반면, 자작농을 유지하고 있던 인근의 진옥삼(秦玉森)은 800평에서 7.6톤의 야채를 수확하는데 그쳤다. …… 송가락(宋家落)의 경우에는 합작사 가입 이전 연평균 야채수확량이 1,200평에 10t이었지만, 합작사에 가입한 지난해에는 수확량이 27톤에 달했다.”


화교연합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합작사 가입율은 이후에도 계속 높아져 1957년 2월에는 화교농민 총수의 61%, 1957년11월에는 77.4%에 달했다. 북한정부가 농업협동화의 종결을 선언하는 1958년에는 전체 농민의 93.3%인 2,691호가 114개의 조합을 조직했다. 1958년 10월 북한정부는 각지의 농업협동조합을 리(里) 단위로 통합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에 따라 각지 화교협동조합 역시 해당 지역의 조선인 협동조합에 흡수되어 화교조합은 화교작업반으로 전환되었다.


1950년대 말기가 되자 북한화교사회에 어려움을 가져다 준 문제가 연이어 발생했다. 즉, 화교의 북한 국적 취득 문제와 화교학교의 조선어교육 강화 문제였다. 1962년 중국의 대약진운동이 마무리 되고 사회체제가 수습되자 북한화교의 집단 귀국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하여 북한 화교 인구는 반수 이하인 만 명 정도로 급감했다. 그 결과 화교작업반은 하부조직인 분조 단위로 분해되었고 화교농민들은 협동농장 내부에서의 경영참가자격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사진 1  북한화교귀국방문단이 195310월 중화인민공화국화교사무위원회주임인

何香凝과 같이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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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북한화교연합회위원장 馬玉聲(1917-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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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화교와 한반도 4】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