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2024년 4월호부터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이 중국 윈난대학 인류학과(雲南大學人類學系)와 함께 수행한 ‘중국 남서부 국경지역 공동연구 사업’의 연구성과 보고서에 대한 번역·요약을 연재한다. 중국-라오스, 중국-베트남 국경 문제에 관련된 해당 연구사업의 지난 1단계 연구성과는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국경 마을에서 본 국가』라는 단행본1)으로 출간된 바 있다. 중국-미얀마 국경에 대한 현재 2단계의 연구성과는 중국어판 연구성과 보고서의 형태로 중국학술원에 소장되어 있다. 해당 연구성과를 널리 공유하고 확산하기 위해, 특히 국경 및 초국경 이동 관련 분야의 연구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성과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여 <관행중국> 웹진을 통해 공개한다. 이번 호는 제5장 <국경 관리와 룽안촌 주민의 국경인식(상): 이주 초기의 국경 인식과 국경 관리>의 내용을 지난 호에 이어 번역하여 소개할 것이다.
[내용요약]
제5장 국경 관리와 룽안촌 주민의 국경인식(상)
민족국가(National State)에 대해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영토, 행정적 독점, 그리고 법률과 폭력이라는 근현대 민족국가 3가지 주요 특징을 부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민족국가는 다른 민족국가와의 관계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며 확정된 경계(국경)의 영토에 대해 행정의 독점권을 유지하는 제도적 통치형태를 가리킨다. 또 그 지배는 국내외의 폭력수단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과 법에 의해 보장받게 된다.”2)
근현대 민족국가가 형성된 이후, 전근대 봉건 국가 혹은 제국 체제 아래의 이른바 변방 지역(frontiers)은 접경 지역(border areas)으로 전환되었다. 한 민족국가의 접경 지역은 해당 민족국가의 통치를 받고 독점되지만, 접경 국가 정책의 영향도 끊임없이 받아 왔다. 따라서 해당 민족국가는 ‘국경 관리(border governance)’라는 방식을 통해 접경 지역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끊임없이 개입함으로써, 자국의 행정적 독점과 통치의 정당성을 접경 지역 주민들의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부각하고 강화해 왔다.
많은 과계민족(跨界民族)이 존재하는 현실을 감안하며, 현대 중국의 국경 관리는 변민(边民), 국경, 국가를 삼위일체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저우젠신(周建新)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변민, 국경, 국가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국경은 국가가 특정 물리적 공간 내에서 설정한 경계선을 의미하며, 변민은 국경 주변의 사회적 공간에 분포하는 인간집단을 가리킨다. 국가는 특정 지리적 공간의 범위와 전체 국가 사회 공간이 중첩된 것을 의미한다.”3)
국경 관리 정책은 현대 중국의 사회 체제와 거시적 사회·경제 정책의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조정되어 왔다. 국경 지역에 거주하는 변민(边民)들은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인접 국가의 변민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하고 왕래해 왔다. 동시에, 인접 국가 변민의 중국 영내 왕래 역시 시기별로 서로 다른 통제 수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되었다.
룽안촌은 징포족과 한족 이주민을 중심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경 마을이다. 현대 중국의 각 역사적 시기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 징포족과 한족의 일상적인 초국경 생활 양상은 상이하게 나타났다. 또한, 국경 관리의 강화와 완화라는 특정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 따라 룽안촌 주민들의 국경에 대한 인식과 실천 역시 각기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주 초기의 국경 인식과 국경 관리-
중국-미얀마 국경 지역의 경우, 국경선 양측의 변민 대다수는 동일한 민족 집단에 속한다. 즉, 원래 같은 혈연적 뿌리와 공통적인 사회·문화적 기반을 공유하던 민족 집단이 국경선의 획정으로 인해 두 국가의 국민으로 인위적으로 분단되었고, 이로 인해 과계민족이라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룽안촌은 국경 획정 및 형성과 비슷한 시기에 다양한 민족 집단의 이주로 형성된 마을로서, 일반적인 과계민족 현상과는 사뭇 다르다. 한편, 이러한 이주가 국가의 국경 강화 정책 목표와 연관됨으로써, 룽안촌의 수립 자체는 국경선 획정과 국경 관리의 일부분으로 인식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룽안촌의 마을 형성 과정에 관한 서사에서 볼 수 있듯, 민족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서사가 과계민족의 분단과 관련된 서사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민족 집단 간의 생활 양식과 관습이 상이함으로써, 특정 시기와 특정 국경 관리 정책에 따라 징포족과 한족은 국경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을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서로 다른 실천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1) 1세대 이주민의 국경 인식
룽안촌의 1세대 징포족 이주민들은 대부분 중국-미얀마 국경선 획정이라는 역사적 분기점을 경험했으며, 국경 획정 전후 접경 지역의 변화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을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쿵(孔)MX가 전한 징포족 이주 서사에서도 이러한 기억이 등장한다. 징포족 이주 서사의 전반부가 검증이 어려운 신화적 차원의 서사시라면, 후반부는 사실상 신화적 차원에서 벗어나 근대 이후 쿵씨 가문의 역사적 궤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가족사 중심의 서사에는 근대 중국-미얀마 국경의 형성과 획정을 반영하는 중요한 역사적 실마리가 포함되어 있다.
신화적 차원의 징포족 이주 서사시에서는 징포족이 북방 초원을 출발해 캄스고원(Khams plateau, 康区高原)을 거쳐 윈난성 서북부 누장주(怒江州) 일대의 가오리궁산(高黎贡山) 지역을 지나, 최종적으로 해발고도가 비교적 낮은 더훙주(德宏州) 지역으로 이주한 과정이 묘사된다. 룽안촌 1세대 징포족 이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왕쯔수(王子树) 마을의 주민들은 바로 이주 서사시가 설명하는 경로를 따라 근대 시기에 왕쯔수 마을에 정착하여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부터 쿵MX 노인의 기술은 검증하기 어려운 신화적 차원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신뢰성을 가진 가족사에 대한 서술로 전환된다.
“룽촨 왕쯔수로 이주한 이후, 왕쯔수 지역의 땅이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의 선조들은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했어. 룽촨에 처음 도착한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정확히 9대가 흘렀어.
1942년, 바로 일본군이 미얀마를 침략한 그 해였지, 아버지는 왕쯔수를 떠나 미얀마에 가서 영국군4)에 입대했어. 입대하러 가는 길에 아버지는 적합한 정착지를 찾아보며 이곳저곳 둘러보았지. 그 과정에서 룽안을 포함해 여러 곳을 답사해 보았고, 가장 멀리는 미얀마의 따웅지(Taunggyi, 东枝)5)까지 다녀왔어. 결국, 그는 룽안이 정착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제대 이후,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모두 데리고 룽안으로 이주했지. 당시는 1956년이었어. 이때는 아직 중국과 미얀마 간의 국경선이 정확히 그어지지 않았던 시기였어. 하지만 정부 간부들은 이미 우리를 산악 지역에서 평야 지역으로 이주하라고 동원하고 있었지. 평야 지역에서는 농지를 개간해 벼농사를 지을 수 있고, 생활 여건이 산악 지역보다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하더라고.
왕쯔수보다 룽안이 미얀마와 더 가까웠고, 아버지가 군 복무 중에 알게 된 친구들 대부분이 미얀마에 있었어. 게다가 미얀마에는 친척들도 많이 살고 있어서, 아버지는 룽안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지.”
앞서 쿵MX의 서술에서, 그의 아버지가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미얀마에 가서 영국군으로 복무했다는 점과 미얀마에 친구와 친척들이 많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당시 접경 지역의 징포족 주민들의 인식 속에서 근대적 국경선이 아직 명확히 획정되지 않았더라도, 이미 근대적 국가라는 공간적 영역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쿵MX의 가족사가 근대적 국경선이 아직 획정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도 현재의 국경선을 암묵적으로 동의된 기준으로 가족사 서사에 자주 적용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근대적 기준은 심지어 신화적 서사시 시대에도 잘못 적용되곤 한다. 예를 들어, 쿵MX의 서술에서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룽안에 와서 정착했을 당시, 중국과 미얀마는 아직 국경선이 그어지지 않았지. 하지만 우리는 중국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늘 잘 알고 있었어. 바로 그 난와허(南漥河)였거든. 왜냐하면,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쳤거든. 진시황이 변강을 평정하면서 난와허를 경계로 삼았고, 그래서 난와허 이쪽은 옛날부터(自古以来) 중국의 영토였다고. 그리고 이후 제갈량이 칠금칠종(七擒七纵)을 했을 때도 바로 이곳까지 와서 싸웠고, 난와허를 경계로 삼아 이쪽은 중국, 저쪽은 외국이라고 정했단 말이야.”
주지하다시피, 진나라가 설립한 군현(郡县)은 윈난 지역을 포함하지 않았으며, 진시황이 국경을 획정했다는 설은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다. 반면, 제갈량의 남정(南征)은 중국-미얀마 접경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수 민족 집단의 역사적 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얀마의 코캉족은 제갈량을 신으로 숭배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6)
제갈량은 중원의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를 상징하는 인물로, 전통적인 천하 질서 체계에서 제갈량에 대한 숭배와 그의 남정 서사에 대한 강조는 윈난 변강 지역에 대한 중원 지역의 강한 구심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징포족 변민들이 언급한 제갈량의 국경 획정설에서 전통적인 천하 서사와 근대적 국경선 개념이 혼동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징포족 변민들은 최초의 대일통 왕조(大一统王朝)인 진나라의 국경 획정설을 통해 근대 국경선의 정당성을 강화하려 한다. 이는 국경 지역의 소수민족조차도 전통적 천하 질서 서사에서 강조된 중심-변강 서사와 근대 민족국가의 국경선 개념을 의도적으로 혼동하여, “유사이래(有史以来)”라는 중국의 공식 민족주의적 선전에서 흔히 사용되는 수사법을 통해 현대 국경의 정당성을 암묵적으로 긍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룽안촌에서 징포족 이주민과 한족 이주민이 뒤섞여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징포족 변민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진나라 국경 획정설이나 제갈량 국경 획정설과 같은 서사의 형성에 있어서 이주를 통한 국경 강화(移民固边)라는 정책적 목표로 동원된 한족 이주민의 영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룽안촌 한족 1세대 이주민들의 이주사 구술 및 문헌 자료(즉 앞서 언급한 ‘마을 창립 기념비문’)에서는 국경과 변강의 개념보다 ‘민족 단합(民族团结)’이라는 정치적 구호가 더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룽안촌의 형성 과정에서 알 수 있듯, 민족 단합은 단순한 정치적 선전에 그치지 않는다. 먼저 이주한 징포족이 후발 이주자인 한족에게 토지와 임시 거처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후 한족이 대규모 노동력을 투입하여 관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면, 룽안촌이라는 국경 마을 공동체는 결코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 국경 마을 공동체는 중국 정부가 국경 지역에 설치한 행정 통치 기구로 공식적으로 편입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족 이주민들이 강조하는 민족 단합 그 자체는 국경 강화라는 정책적 목표를 표방하는 국경 인식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중국-미얀마 국경이 처음 획정되었을 당시, 양국 변민들의 일상적인 초국경 활동은 국경 관리 당국의 엄격한 통제를 받지 않았다. 국경이라는 개념은 단지 국경 표석이라는 인공 지리적 경관을 통해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었다. 예를 들어, 쿵MX는 국경 획정 초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양측 모두 국경 관리를 엄격하게 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어. 당시에는 국경을 감시하는 경비대도 없었지. 그러다가 1960년에 들어서야 공산당이 우리 지역에 하방공작조(下放工作组)를 파견했고, 그 뒤를 이어 인민해방군이 국경 지역에 주둔하여 관리를 시작했어. 1960년 당시 미얀마는 아직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고, 중국은 영국과 협의하여 국경선을 공식적으로 획정했지. 당시 이를 ‘호변(护边)’이라고 불렀고, 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원을 파견하여 국경 표식을 새롭게 세웠어. 이전에는 단순히 흙더미로 경계를 표시했었지만, 그때부터는 시멘트 표석이 세워졌지.”7)
쿵MX는 영국 식민 당국과 중화민국 정부 간의 국경 협상 및 군대 파견을 통한 주권 선언(즉, 호변) 행위와 이후 1960년대 미얀마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국경 획정 작업을 혼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회고를 통해, 근대 중국-미얀마 국경이 획정되기 전후의 일정 기간 동안 국경 인식은 전통적 서사와 공식적 선전(중화민국의 공식적 선전 포함)의 결합을 통해 변민들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실제로 가시화된 국경의 형태는 청말 및 중화민국 시기에 임시로 쌓아놓은 흙더미에 불과했으며, 이후 중국과 미얀마 간의 공식 국경 획정 작업을 통해 시멘트 경계 표석(界桩)이나 경계비(界碑)가8) 세워짐으로써 비로소 물리적 국경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2) 1세대 이주민 기억 속의 국경 관리
1세대 징포족 이주민들이 룽안촌에 정착한 이후, 국경 너머 미얀마에 거주하는 징포족 변민들과의 교류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많은 마을 주민들의 기억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미얀마 측 징포족 변민들과 함께 성장하고 농사일을 서로 도왔으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양측 간에는 거의 어떠한 경계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상적 교류는 국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쪽 닭이 저쪽에서 알을 낳고, 저쪽 소가 이쪽에서 풀을 뜯는다.” 이는 당시 국경이 존재했지만 실질적인 통제나 국경 관리가 엄격하게 시행되지 않았던 현실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느슨한 국경 관리로 인해, 1950년대 말 중국의 대기근 시기와 1960~70년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많은 징포족 변민들이 보다 나은 생활 환경을 찾아 미얀마로 피난을 떠났다.
징포족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1950년대 초반부터 중국-미얀마 국경이 획정된 직후까지 국경 지역에서 가장 큰 위협 요소는 토비의 횡행이었다. 이러한 토비들은 대부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후 흩어진 국민당 군인들과, 공산당 통치를 반대하던 징포족 벙두(崩堵)의 무장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인민해방군의 주둔 및 토비 척결 작전, 그리고 군대 농장의 설립으로 인해 대부분의 토비들은 접경 지역에서 미얀마 샨주(Shan state, 掸邦)의 다른 지역으로 철수했지만, 이들의 무장 침투 활동은 195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1세대 징포족 이주민들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징포족 가운데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룽안촌까지의 교통이 불편하여 정부의 정책 전달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무장 침투 활동을 벌이던 토비(土匪)들은 이주민들 사이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정부 정책을 왜곡하여 전달하였다.
이러한 선전에 현혹된 일부 주민들은 토비들을 따라 미얀마로 도망하였다. 특히 1958년과 1959년, 초기에 정착했던 이주민들 대다수가 미얀마로 이주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양MC는 1950년대 말 중국의 대기근 시기에 미얀마로 피난을 떠난 룽안촌 초기 징포족 이주민들의 후손 중 한 명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약진운동(大跃进运动) 기간 동안 기근을 피해 홀로 미얀마로 피난하였으며,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았다. 이후 중국의 정치적 상황이 비교적 안정해진 후, 그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다시 룽안촌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양MC의 자형도 같은 시기에 미얀마에 피난해 갔지만, 다양한 이유로 룽안촌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 미얀마에 정착한 사례 중 하나이다. 양MC의 자형 가족은 원래 1955년 잉장현(盈江县)의 산악 지역에서 룽안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러나 중국 내 정치 상황이 점차 악화되고, 미얀마 측 상황이 상대적으로 더 안정된 것처럼 보이자 가족 전체가 미얀마의 산악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미얀마에서 아편 재배를 주요 생계 수단으로 삼으며 살아갔다.
양MC의 자형은 당시 중국 변민들의 피난 장면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국경선 일대는 기근을 피해 도망쳐온 중국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처럼 1950년대 후반의 대기근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많은 중국 변민들이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어 미얀마로 향했던 현실을 보여준다.
이후 미얀마 정부가 아편 재배를 금지하기 시작하면서, 양MC의 자형 가족은 다시 이주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룽안촌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미얀마의 뤼윈하이촌(吕允海村)으로 거처를 옮겼다.
뤼윈하이촌은 비록 미얀마 영토에 속하지만, 룽안촌에 있는 친척들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양MC의 자형 가족은 국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가족과의 물리적 거리를 최소화하며, 사실상 가족의 이산을 피하게 되었다.
이처럼 국경 마을로서의 룽안촌은 중국과 미얀마 두 나라의 사회·경제·정치적 환경의 영향을 동시에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정한 시기에 정치·사회적 혼란이 발생할 경우, 일부 변민(边民)들은 룽안촌을 떠나거나 이주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등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두 나라의 국경 관리 정책에 의해 제한을 받기도 한다.
특히, 국경 관리가 점차 강화되면서 변민들의 자유로운 이동과 선택의 범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에 따라 변민들은 특정 국가의 국민으로서 고정된 신분을 갖게 되었으며,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점진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경 지역 주민들은 이전처럼 자유롭게 이주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국가의 통제 아래 더욱 엄격한 국적 규정과 경계 속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리페이 _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참고자료
1) 왕위에핑·장정아·안치영·녜빈 지음, 2022, 『국경 마을에서 본 국가』, 인터북스
2) 안쏘니 기든스(Anthony Giddens), 진덕규 옮김, 1991, 『민족국가와 폭력』, 서울: 삼지원, 149쪽.
3) 周建新, 「边界、边民与民族国家——跨国民族研究的三个面向」, 『广西民族研究』,2017, (3), 1-8页.
4) 역주: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 전선에서는 연합군 측의 영국군 및 미군은 징포족·카친족을 중심으로 한 특수전 부대를 모집하여 편성하였다. 이들은 징포족 산악 주민들이 지형에 익숙하고 유격전 전술에 능하다는 점을 활용하여 일본군의 배후에서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전공이 두드러진 부대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정보조정국(COI, Coordinator of Information)이 징포족·카친족 산악 주민들을 모집하여 조직한 101 특수부대(Detachment 101)였다. 쿵MX의 아버지 역시 이러한 모집 방식의 일환으로 연합군의 미얀마 전선 대일 작전에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5) 역주: 미얀마 샨주 남부의 주요 교통 요충지이자 샨주의 수도임.
6) 역주: 코캉족의 제갈량 숭배에 관련되어 다음 문헌에 참조: 缅甸掸邦果敢志编纂委员会 主修, 鲁成旺 总纂, 『果敢志』, 香港:天马出版社, 2012, 128-130页.
7) 역주: 이 구술에서는 역사적 사실관계가 잘못 표현되었다.
8) 역주: 중국과 인접국의 경우, 경계 표석(界桩)과 경계비(界碑)는 각각 육지 국경 지점과 하천으로 구분된 국경 지점을 표시할 때 사용한다. 경계 표석의 경우, 표석 양 정면에 각각 해당 국가의 국장(國章), 중국어와 해당 국가의 언어로 국가명, 표석의 일련번호, 그리고 표석의 수립 연도를 표시한다. 경계비는 경계로서의 하천 양측 강변에 마주하여 세우며, 두 비석의 비문에는 경계 표석과 같은 내용을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