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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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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아프리카 관계에서의 인종주의라는 화두 _ 조영진

나미비아인들은 나를 (혹은 나와 비슷하게 생긴 중국인을) “백인이라 불렀다. 그때쯤부터였던 것 같다. 인종주의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게 된 것이 말이다. 그러나 인종과 인종주의의 문제는 쉽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했고, 다층적이었고, 너무 컸고, 또 동시에 너무 작았다. 한 편으로 인종주의라는 것은 어떤 광범위한 역사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떤 때는 일상의 불쾌감 정도 일 때도 있었다. 글로벌한 시각에서 나의 사회 경제적 위치를 생각해 보고 현지인들과 근본적인 불평등을 인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그냥 인간 대 인간의 문제로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학문적 논의를 찾아보려는 노력은 시작은 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게다가 인종주의는 백인과 흑인이라는 전통적 구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사라는 특수한 전지구적 상황에서 생성되고 지속된 점을 감안할 때 “21세기의 중국-아프리카 관계라는 새로운 구도는 기존 담론에 복잡성을 가중 시키기만 하는 것 같다. 복잡한 논의일수록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풀어내는 것이 현명하겠지만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의 끝이 묘연하기만 하니 결론을 내기보다는 화두를 던져 본다는 의미로 나미비아에서의 내 경험을 나누어 보려고 한다

 

나미비아에서 현지조사를 하며 자원봉사를 했던 타이완계 불교 조직은 아이들 전원이(당시 250여명)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조달해야 하는 생필품이 상당히 많았다. 내가 이 단체에서 맡은 주요 임무 중 하나는 하루 단위로 혹은 주단위로, 주기별로 필요한 식품과 생활용품을 구입하고 주문하는 일이었다. 이 임무를 위해 나는 수시로 시내의 마트나 멀리있는 수도의 마트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방문하곤 했다. 수도의 한 대형 마트에서 한창 세일 중인 설탕과 식용유를 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대량으로 구매하는 터라 마트에서는 직원이 나와 내가 산 물건을 차로 옮기는 것을 도와주곤 했다. 이날은 십 대 소년으로 보이는 마트 직원이 나를 도왔다. 그 직원은 나를 보자마자 중국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니하오이상을 말하지 못하는 다른 현지인들과 달리 이 소년 직원은 꽤나 유창하게 중국어로 말을 걸어 왔다. 나는 나를 한국인으로 소개했지만 나처럼 동아시아국가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나미비아에서 중국인으로 오해 받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마치 예전의 어느 시절 한국에서 서양인을 모두 미국인으로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풀었다: 열 살이 되었을 때 중국에서 미리 정착해 일하고 있었던 삼촌의 초청을 받아 중국에 갔고, 거기서 혼자 중국어를 스마트폰 앱을 통해 배우고 일도 하다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아직 스무 살이 넘지 않은 이 직원은 현재 마트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중국어 통역할 일들이 있으면 한다고 했다. 나는 그의 근무 시간을 뺏는 것도 미안했고 마침 점심시간도 된지라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다. 그는 흔쾌히 응했다. 우리는 마트 옆 피자집에 앉았다. 피자를 먹으며 나는 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고, 중국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다. 그는 그날 일찍 퇴근할 수 있다고 했고, 그의 집이 마침 내 귀가 길과 방향이 같아 그를 집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다. 그가 교통비를 아낄 수 있는 것도 나에게 시간을 내준 작은 보답이 되겠지 생각했다.

 

그가 사는 곳은 수도 외곽의 빈민 지역이었는데 양철판자를 대충 이어 만든 집들이 마치 판자촌처럼 붙어있는 열악한 인구밀집 지역이었다. 나는 그가 내게 시간을 내준 것이 고마워 피자를 한 판 더 사서 집에 있을 두 동생들에게 가져다주라고 선심을 썼다. 혹시나 다음에 내가 다시 수도에 나오게 되고 그가 마침 시간이 된다면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는 헤어졌다. 센터로 돌아온 지 몇 일쯤 지났을까 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자신의 폰이 망가져서 새로 하나 사야 되는데 내가 구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질문을 재차 확인하는 메시지를 보냈고,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회피했다. 나는 그에게 선뜻 폰을 사줄 수는 없었다. 또 얼마 후에, 그는 다른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로 그는 나를 안티, 안티 (이모)라고 부르며 몇 번 더 사정을 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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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2. 마트 직원이 살고 있던 수도 외곽의 빈민촌


나는 백인이었다

나는 그와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갈 수 없음을 알았다. 만남에 대한 대가로 노골적인 물질적 대가를 요구하고 지불해야 하는 관계가 탐탁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 직원이 나를 향해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에 호응하고 싶지 않았다. 나미비아에서 나 (동아시아계 인종, 혹은 백인)에게 향하는 스테레오타입 중 하나는 부유하다는 것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그렇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만남의 어느 과정에서 나의 실수가 있었을까 되짚어 보았다. 내가 지나치게 선심을 쓴 것일까. 차를 몰고 다니고 다량의 물건을 한 번에 결제하고, 피자 한 두 판을 선 뜻 사줄 수 있는 나는 그에게 갑부처럼 보였던 것일까. 내가 나를 인류학을 연구하는 사람이고, 현재의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한다고 소개했지만, 그는 나를 그냥 여유 있는 백인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나비미아에 와서 만나게 된 나미비아 현지인들은 나를 백인 (white)” 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종의 구분인 블랙/화이트와 화이트 말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질문을 던져 보기도 하고 강하게 항의도 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너는 백인이 맞다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아프리카에서는 흑인이 아니면 다 백인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렇다면 나는 인도사람이나 파키스탄 사람들도 백인이냐고 되물었고, 대부분 조금 망설였지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후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나이지리아, 가나, 남아공 사람들)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내가 들었던 대답은 같았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항의하기를 멈추고, 나미비아에서는 내가 백인임을 받아들였다. 내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색인종으로 분류되는 것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듯이 말이다. 어찌 되었든 생물학적 관점에서 내 피부색은 저들보다 밝은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 마트의 직원도 그렇게 나를 백인으로 취급했고, 백인이라는 단어에 의례 딸려 오는 암묵적 기대는 내가 그 앞에서 보여준 모든 행위(점심을 사고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 등)를 통해 재확인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그가 가진 인종적 스테레오타입과 기대에 제대로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그 뒤에 이어진 그의 무리하며 다소 뻔뻔해 보이기까지 하는 요구사항들 뒤에는 사실 이러한 맥락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로 나미비아인, 혹은 더 광범위하게, 아프리카인에 대해 공고한 스테레오타입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필자도 이 그룹에서 예외가 아님을 밝힌다.) 사실 센터에서 중국인이 나미비아인에게 보여주는 인종적 스테레오타입과 기대는 사실 더 심각해 보일 때가 많다. 중국인 스태프들은 업무의 분장과 서열에서 나미비아 스태프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힘의 관계가 더 분명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몇몇 중국 스태프에 의한 직접적인 인종차별적 발언과 행동은 수시로 행해지고, 이는 종종 나미비아 스태프의 항의로 이어졌다. 중국 스태프들의 연배와 생각의 완고함은 문제를 악화시키곤 했다. 이들은 나미비아 스태프의 태도 문제를 자주 언급했는데 한마디로 suzhi(素質)가 낮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는 것, 적극적이고 주동적이지 못하다는 점 등등 중국 스태프들은 나미비아인들이 설렁설렁일하는 태도에 대해 이해를 못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인종과 인종주의는 어느 상황에서 논의하든 복잡한 문제이다. 중국-아프리카의 상호교류의 증대라는 특수한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속에서 이 문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서구 유럽이라는 지배자와 아프리카라는 피지배자의 식민지적 이중 구도를 계승하면서도 또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인종과 인종주의는 광범위한 차원의 정치 문화 사회 역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일매일 내가 경험하는 지극히 작고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종과 인종주의를 논하는 것은 다층적일 수밖에 없고 다양한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중국의 인종주의가 어떤 역사적 변화 과정을 겪어 왔는지 그리고 나미비아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은) 중국과 중국인을 어떻게 인종적으로 이해하는지 학문적 고찰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개인이 겪는 일상의 소소한 경험은 누락시켜야 할 하찮은 정보가 아니라 이 고찰의 중요한 자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인종주의의 즉물성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라는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내가 성인이 되기까지 받아온 교육에서는 그랬다. 인종이나 인종주의가 가져오는 사회적 문제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생각되었고, 한국 사회가 떠안고 고민해야 할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공문서에 나를 인종적으로 분류해야 할 때가 있었고, 나는 그때부터 people of color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개인이 되었다.


비로소 이 복잡하고 뜨거운 담론에 떠밀려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미국 사회의 백인-흑인의 대립 구도 속에 아시아계 인이고 외국인인 나는 아직도 이 문제의 가장자리에서 맴도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한국은 일본 식민의 경험이 있었지만, 식민통치자의 폭력이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의 침략은 제국주의의 야욕과 극악함, 그리고 타민족 말살과 병합이라는 잘못된 국가의 폭력으로 이해된 것이 더 보편적이었다. 왜일까, 분명히 일본인이 조선인을 대하는 태도에는 인종주의적 요소가 있었는데 말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겉으로 거의 같은 인종으로 보였기때문이었을까? 인종이 같으니 인종 간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로 봐야 했던 것일까? 나는 이렇게 과거에나 현재에나 인종주의 문제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정신과 의사이자 사상가였던 Frantz Fanon (1925-1961)은 그의 저서에서 인종주의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는데 인종주의가 어떻게 일상의 경험에서 즉물적인 다름으로 인지되는지 서술했다. Fanon의 저서에 포워드를 쓴 Homi K. Bhabha는 이것을 racial optic이라 했다.1) 타인을 이해 혹은 오해하는 데 레이셜 옵틱만큼 강력하고 즉각적인 매개가 있을까. 나와 나미비아 마트 직원은 우리의 다른 피부색으로 서로를 즉물적으로 이해했고 판단했다. 그 이해와 판단이 잘못되었고 오해였다는 점은 먼 훗날에 가서야 밝혀질까 말까 한 일이다. 어쩌면 그 먼 훗날에 가서도 그때의 이해와 판단이 여전히 옳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중국인 스태프들은 나미비아 스태프들의 suzhi 문제를 따지기 전에 이미 나미비아인에 대한 즉물적 이해와 판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혹시 모범적인나미비아 스태프를 만나면 이 사람은 내가 알았던 다른 나미비아인들과 달리 태도가 좋다고 말한다. 타인에 대한 즉물적인 이해와 그 확신을 강화하는 경험 없이는 불가능한 코멘트다.

 

같은 맥락에서 인종과 인종주의가 한국의 상황에서 (혹은 동아시아에서) 심각하게 드러나지 않아 보였던 이유가 타인을 인종이라는 즉물적 관점으로 이해하는 기회가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한국이나 동아시아에 인종주의가 없었다거나 적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종과 인종주의 문제는 즉물적인 차원에서 시작되는 만큼 이것은 비단 북미나 유럽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 시기부터 본격화하였다고 보이지만 인종주의는 더 근본적인 출발이 있었음이 짐작된다. 인종주의는 타인을 다른 species”() 으로 보는 시각이니까 말이다. 중국-아프리카 관계에서의 인종주의도 결국은 즉물적 이해에서 시작한다고 봐야 같다. 인종주의는 그래서 강력하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같다.



조영진 _ 시카고대학교 Earl S. Johnson Instructor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1)  Bhabha, Homi K (2004), “Forward, Framing Fanon” to The Wretched of the Earth by Frantz Fanon, pp. xvii-xlii. New York: Grove Press.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직접 촬영하여 제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