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관행중국》 2024년 10월호에 「인천 화상(華商)이 1900년 2월 故 졸리 인천 영국부영사관 부영사의 묘비를 세워준 사연」을 게재한 바 있다. 인천 화상들이 졸리 부영사 사후 세워준 중국식 묘비가 현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자리한 배경은 청일전쟁 직후부터 1898년 12월 한청통상조약이 발효하는 시기 사이에 그의 적극적인 화인 보호 활동에 있다는 것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정부 외부와 인천항 감리서 간의 왕복 문서인 《仁川港案(인천항안)》 사료를 통해 밝혔다.
사진 1. 졸리 부영사(정면 왼쪽)과 랜디스 의사
이번은 졸리 부영사가 1897년 9월 9일 인천부영사관 착임 전까지의 행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1857년 영국이 아닌 튀르키예의 3대 도시의 하나인 이즈미르(Izmir)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그곳에서 영국영사관 관원으로 일했다. 졸리 부영사는 18년간 중국 주재 영국영사관에서 근무했는데, 광저우영사관에서 첫 근무를 시작한 후 마카오부영사관, 푸저우(福州)영사관, 상하이총영사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1885년부터 1887년까지 공식 휴가를 보냈으며, 이 기간 중인 1886년 이즈미르에서 클라라 아그네스 릴리(Clara Agnes Lillie)와 결혼했다. 그리고 1894년 6월부터 1896년 4월까지 영국, 유럽, 레반트(Levant)로 불리는 서아시아에서 공식 휴가를 보냈다. 졸리 부영사는 2남 1녀를 두었고, 막내딸의 성명은 릴리안 아그네스 졸리(Lilian Agnes Joly)였다.
졸리 부영사는 23세 때인 1880년 베이징에 있는 영국공사관의 ‘번역 학생’(Interpreter student)의 신분으로 근무하면서 중국어 공부를 했다. 베이징에서 중국어 학습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홍루몽》을 최초로 영어 번역하여 출판하게 된다. 그는 1891년 9월 마카오부영사관에 근무하면서 번역서인 《The Dream of the Red Chamber》의 서문을 집필했다. 짧은 서문은 다음과 같다.
“이 번역은 나 자신이 중국학 학자의 반열에 들어가려는 허세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베이징의 학생〔영국공사관의 번역 학생(Interpreter student)〕으로서 《Tzu Erh Chi》[語言自邇集으로 토마스 프랜시스 와이드(Thomas Francis Wade)가 1886년 상하이에서 출판한 중국어 회화 교재]) 학습의 혼란과 어려움을 경험하고 종료한 후, 《홍루몽》의 경이로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산문은 조잡하고 어색하며 운문에도 단점이 발견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운율보다는 텍스트를 더 충실하게 따르려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와 미래의 중국어 학습을 하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결과에 만족할 것입니다.”
즉, 《홍루몽》의 번역은 자신과 같이 중국어 학습을 하는 서양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했다는 것이다. 《홍루몽》은 중국의 6대 기서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산문과 시가 다수 내용에 포함되어 있어 중국인조차도 읽기 어려운 소설이다. 이러한 《홍루몽》을 서양인으로서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했다는 것 자체가 그의 높은 중국어 실력과 중국에 대한 이해가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졸리 부영사가 착임 한 후 찍은 것으로 확인된 사진 1장이 남아 있다. 이 사진(사진1)은 대한성공회출판부가 대한성공회 100주년을 맞이해 선보인 대한성공회의 역사와 관련된 사진 가운데 수록되어 있다. 왼쪽이 졸리 부영사이며 오른쪽은 랜디스 의사이다.
랜디스는 1865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나 1890년 영국성공회 선교사의 일원으로 조선에 파견된 의사였다. 그는 인천의 성누가병원의 의사로서 인천의 조선인, 화인, 일본인의 치료와 야간 영어학교를 세워 가르쳤다. 그는 조선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조선의 종교, 민간신앙, 문화, 과학 등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 그와 관련된 다양한 글을 집필해 영어로 홍콩, 영국의 학술지에 발표했다. 그는 인천 성공회 성당 소속의 의사이자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부영사관 부영사로 착임 한 졸리 부영사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을 것이다.
랜디스 의사는 청일전쟁 때 부상한 청국 병사를 치료해준 공로로 청국 정부로부터 1895년 8월 쌍용훈장을 받기도 하고, 인천 화인의 치료와 영어 교육에도 열심인 ‘친중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랜디스 의사와 졸리 부영사는 공교롭게도 1898년 인천에서 모두 숨을 거두었다. 위의 사진을 찍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 둘은 별세한 것으로 보인다. 랜디스 의사는 그해 4월 16일 과로로 32세의 꽃다운 나이에 서거했다. 졸리 부영사는 평소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제2대 영국부영사관 건물 건축 공사 관련 업무와 화인 보호 활동 등의 격무에 시달린 상태에서 감기 증세가 겹쳐 6월 23일 4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사진 2. 인천가족공원의 랜디스 묘비 사진 사진 3. 양회진외국인묘원의 졸리 묘비
랜디스 의사의 시신은 중구 북성동 1가 1번지의 인천외국인묘지에 안장되어 있다가 1965년 청학동외국인묘지, 2017년에 다시 인천가족공원 외국인묘역으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졸리 부영사의 시신도 인천외국인묘지에 안장되어 있다가 1950년대 중반 서울 양화진선교사묘원으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교·화인의 ‘세계’ 10】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참고문헌
이정희(2024.12.31.), 「청일전쟁 직후 인천 영국부영사관의 화인 보호 활동-졸리(Joly) 부영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호남학』76집, 호남학연구원, 125∼158쪽.
대한성공회출판부 편(1991),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상권:1890-1964)』, 대한성공회출판부, 54쪽.
이영호(2022), 「랜디스의 의료・교육활동과 한국학 연구」, 『개항 이후 인천의 외국인들』, 인천광역시, 134∼155쪽.
Rutt, Richard(1979), “An Early Koreanologist: Eli Barr Landis, 1865-1898”,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Vol.54-4, pp.59-99.
Cao Xueqin, Transslated by H. Bencraft Joly(1892), The Dream of the Red
Chamber BookⅠ.
季淑風(2019), 「喬利《紅樓夢》英譯探微」, 『遼東學院學報(社會科學版)』 第21卷第2期, 遼東學院, 124쪽.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대한성공회출판부 편(1991), 54쪽.
사진 2. 필자 촬영(2024.10.12.)
사진 3. 필자 촬영(202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