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5천분의 1’이라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성공 가능성에도 인천으로 진격하던 맥아더 장군은 그 이유에 대해 한국의 한 소년병의 이야기를 한다. 북한군이 휩쓸고 간 전장에서 후퇴하지 않고 남아 있던 어린 소년병은 맥아더 장군에게 실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은 이 소년의 나라를 꼭 구해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물론 이 장면은 영화의 극적 효과를 위한 가상의 스토리일 수 있으나 그간 미국이 자유, 민주, 인권이라는 가치를 대의명분으로 막대한 경제적·인적 손실을 감수하며 세계 경찰국가의 역할을 자임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전면에 내세운 트럼프 시대의 시작으로 인천상륙작전의 미국은 그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인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미국의 국제적 역할과 위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국제질서와 국제사회의 가치 지향과 관련된 변화들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80여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우리는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살아왔으며,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자유, 민주, 인권이라는 가치와 자유시장체제를 수호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미국의 자유주의적 패권 행위는 국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세계는 미국이 주창하는 전쟁의 대의명분 그 이면에 숨겨진 위선적 의도와 행위를 비판했으며, 미국 국내에서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역할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이 미국이 자국 중심의 글로벌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고, 그 안에서 계속 강하게 살아남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미국의 발전과 생존에 대한 방법론적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있다. 더 이상 미국은 글로벌 가치를 선도하고 동맹국을 위해 군사적 위협을 무릅쓰는 경찰국가가 아니다. 트럼프의 미국은 자유와 민주 등의 가치를 위해 비용을 지불하지는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하며, 더 이상 자국의 행위를 점잖은 말로 포장하지 않고 노골적이고 공격적으로 실리적 이익을 추구하는 ‘미국 우선주의’ 국가가 되었다.
향후 트럼프의 미국은 자국의 안보나 이익에 직결되지 않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동맹국들에게 방위비를 철저하게 분담시킬 것은 확실시된다. 실례로 트럼프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가자지구 전쟁을 내년 1월까지 끝내길 원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전쟁도 ‘24시간 내 종전’을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종전의 방식과 협의의 내용이 문제의 해결이 아닌 ‘종전’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임이 예견되고 있다. 동맹국들과의 방위비 재조정이 확실시되면서 NATO를 포함한 세계 국가들이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도 당사자로서 이에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미국의 실리적 이익 추구와 극우적 가치 지향성의 강화는 그간 인류가 발전시켜왔던 자유 민주 등 인류 보편의 가치 외에도 ‘워크’(Woke·진보 어젠다 및 문화 통칭) 문화 등 2010년 경부터 국제적으로 발전해온 사회적 흐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트럼프와 아르헨티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연합으로 극우 포퓰리즘 연대가 부상하고 정부 개입 축소와 규제 완화를 필요로하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지원이 결합되어 정치적으로 강력한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전반적인 극우적 분위기의 확산과 중국-러시아-북한 등 권위주의 국가들의 관계 밀착화 현상은 세계적으로 정치적 보수화와 권위주의화를 촉진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류의 미래와 직결되는 환경문제에 대해 미국의 대응과 태도가 미칠 영향이다. 기후위기 자체를 부정하는 트럼프는 환경규제를 철폐하고, 기후변화 협약을 탈퇴하는 등 환경문제에 있어 퇴행적 정책을 시행할 것이 자명하다.
글로벌 문제에 있어 미국의 공백은 한편 중국에게 좋은 ‘틈새’이기도 하다. 중국은 일찍이 세계를 대상으로 “인류 운명 공동체”, “글로벌 발전·안보·문명 이니셔티브”, “중국식 현대화” 등의 글로벌 구상을 발표하였다. 트럼프의 당선에 힘입어 중국은 미국의 ‘보호무역’과 ‘고립주의’를 더욱 강하게 비판하고 ‘세계화’와 ‘개방’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11월 16일 APEC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은 트럼프 2기 출범에 따른 보호무역주의를 경계하는 발언과 함께 ‘국경 간 데이터 이동 협력 이니셔티브’를 제안했다. 시 주석은 “중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넘어 전 세계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 강조하며 중국의 급행열차에 탑승을 환영한다라고도 했다. 또한 중국은 미국의 동맹국들과 관계 강화를 위한 우호적 정책을 추진중이다. 최근 발표한 중국 무비자 입국 허용 정책은 그 일례로 볼 수 있다. 중국은 글로벌 기후변화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며, 전기차, 배터리, 풍력터빈, 태양광 패널 생산 등 신재생 에너지 산업 기술 분야에서도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일어선 의자에 중국이 앉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우선 미국이 트럼프의 정책과 계획대로 변화될 것인지가 아직 불확실하다. 현재 미국은 바이든 정부로부터 트럼프 정부로의 평화적 권력 이양이 확실시되고, “선거”라는 민주주의 기제를 통해 집권한 정부를 인정하고 ‘트럼프에게 기회를 주자’라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져 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트럼프의 정책 이행의 과정에서 수많은 이해관련자들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아직은 판단할 수 없다. 일례로 트럼프의 권한 확대 시도에 대해 미국인 60%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CBS/유고브 여론조사), 의회 견제, 연방법원의 제동, 관료 조직의 저항도 예상되고 있다. 트럼프를 위시한 극우적 포퓰리즘의 도전 앞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한 국제사회의 연대 필요성 또한 제기되고 있다. 한편 중국의 역량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과연 중국이 “중국 특수”와 중국식 “중국 우선주의(China First)”,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중국몽)”에서 벗어나 어떻게 국제질서를 이끌 수 있는 가치와 제도를 창출할 수 있는지도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당분간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 전환의 시대라는 말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의 통찰력과 지혜가 더욱 필요한 때이다.
정주영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상임연구원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위 이미지는 중국학술원이 제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