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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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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교육의 신’ 문창제군(文昌帝君) 숭배 _ 박경석

중국의 전통 사상과 문화에는 여야(與野)가 있어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그래서 다양성과 완결성을 가진다는 특장점이 있다. 사상적으로 지배층에는 유교가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반면, 민간의 서민층에는 도교가 있어 양자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문무(文武)도 마찬가지였으니, 문(文)은 유교의 공자가 대표하였고 무(武)는 도교의 관성제군(關聖帝君, 關羽)이 대표하였다. 그런데 문인들의 경우 제일로 숭배했던 대상은 물론 공자였지만, 동시에 일상적으로는 도교와 관계가 깊은 문창제군(文昌帝君)을 숭배하기도 했다. 이 역시 중국 신앙체계 특유의 다층성과 복합성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문창(文昌)은 본래 별자리 중의 하나여서 문창성(文昌星) 또는 문성(文星)이라고 칭했다. 먼 옛날에는 문창을 문인의 운세와 관직의 지위를 관장하는 별자리로 여겼다. 그것이 비록 문학을 상징했지만 인격적인 신령은 아니었다. 민간에서 신봉하는 문창제군은 사천성(四川省) 재동현(梓潼縣) 일대에서 뱀신(蛇神)이나 천둥신(雷神)을 숭배하던 재동신(梓潼神) 신앙에서 유래하였다. 여전히 자연신을 숭배하는 차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장육(張育) 또는 장아자(張亞子) 신앙과 결합하게 된다. 374년 촉(蜀)나라 사람 장육은 스스로 촉왕(蜀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전진(前秦)의 침공에 저항하였다. 이때 장렬하게 전사하였는데, 사람들이 장육의 용맹함을 기념하여 재동현 칠곡산(七曲山)에 사당(張育祠)을 건립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때부터 점차 재동신과 장육을 하나의 사당에서 공동으로 숭배하게 됨에 따라, 단순 자연신 숭배에 장육의 인격적 충성 이미지가 더해지게 되었다. 


송대(宋代) 이후 재동신은 과거시험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수(隋)나라 때 시작된 과거제도는 송대부터 사인(士人)들이 관직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이후 격렬한 경쟁이 벌어지면서 과거시험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편으로는 각종 신령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재동신도 사천 지역의 학생들이 시험을 순조롭게 볼 수 있도록 돕는 신령으로 여겨졌다. 특히 남송(南宋) 때에는 꿈에서 재동신을 만나면 과거에 합격할 수 있다는 ‘재동몽(梓潼梦)’ 전설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재동신은 과거시험의 신령으로서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장육 신앙과 결합되어 있는 재동신 신앙에 문인의 운세를 관장하는 문창성(文昌星)의 이미지가 덧씌워지고, 1316년 원(元)나라 때에 재동신이 「보원개화문창사록굉인제군(辅元开化文昌司禄宏仁帝君)」으로 봉해지면서, 재동신과 문창신이 결합되었고 문창제군이 하나의 신령으로서 정립되었다. 이후 문창제군 신앙은 명청(明淸)시기에 가장 성행했는데, 유학자들이 끊임없이 ‘음사(淫祀)’라고 비판했지만, 그 영험함에 대한 학생들의 믿음이 이미 오래되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에 도교에서 도교 신령의 하나로 수용하여 숭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대(淸代)에 이르면 국가제사의 하나로 편입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일하는 서민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업종에서는 문창제군을 어떻게 취급했을까? 이교(李喬)의 『행업신숭배 : 中国民衆造神史硏究』(북경출판사, 2013년 8월판)에 따르면, 총 8개의 업종에서 문창제군을 조상신이나 수호신으로 섬겼다. 아래에서는 그 내력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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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 종사자


문창제군은 문화와 교육을 주재하는 신령이므로, 학교나 학원에서 보편적으로 섬겼다. 사인(士人)들은 문창제군을 문화와 교육에 공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명운을 주재하고, 과거시험, 학교 등의 문화교육 사업을 주재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성심성의를 다해 제사를 지냈고, 은혜에 보답하는 예(礼)를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험 운세와 관운이 크게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원하기도 했다. 일반 서민들은 평소 토지신(土地神)에 보우하심을 간절히 기원했는데, 학인(學人)들에게 토지신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문창제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향시에 합격한 수재(秀才)들이 과거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문창제군에게 빌면 문창제군은 오히려 수재들에게 냉담하여 그들의 과거시험이 순조롭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역시 ‘종사(宗師)’이자 조상신으로서 공자의 권위가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 종이 제조 및 판매업(紙業)


종이를 만들고 판매하는 업종에서는 대개 채륜(蔡倫)을 조상신으로 섬겼는데, 어떤 지역의 제지업자들은 한유(韓愈)나 주희(朱熹)를 조상신으로 섬기기도 하고, 어떤 지역의 종이상점(紙店)에서는 문창제군을 섬겼다고 한다. 종이상점(紙店)에서 문창제군을 섬긴 이유는 역시 문창제군이 문화와 교육의 신령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종이는 본래 문교(文敎)와 큰 관계가 있다.


• 도서 판매업(書坊業)


도서를 취급하는 업자들도 문창제군을 조상신으로 섬겼는데, 역시 기본적으로는 서점이 문화 및 교육(文敎)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진시황(秦始皇)이 분서(焚書)를 했을 때 문창제군이 수많은 서적을 사천의 이유산(二酉山)이라는 곳에 숨겨두어 분서의 액운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전설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실제 그런 일을 했던 사람은 복승(伏勝)이라는 진(秦)나라의 학자였다. 이밖에, 많은 도서 판매업자들은 화신(火神)을 수호신으로 섬기기도 했는데 이는 업종의 특성상 화재가 매우 치명적인 재앙이었기 때문이었다.


• 글자를 새기는 업자들(刻字業, 鎸碑業)


조판 인쇄를 위해 글자를 새기는 일, 비석에 글자를 새기는 일에 종사하는 업자들도 공자나 문창제군, 주희(朱熹)를 조상신으로 섬겼다. 이들은 스스로 ‘문인(文人)’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역시 공자나 문창제군은 문화와 교육의 신령이므로 문창제군을 조상신으로 섬겨야 했던 것이다.


• 금갑업(錦匣業) 및 명의업(冥衣業)


금갑(錦匣)은 증정품이나 진열품을 담는 상자를 말한다. 명의(冥衣)는 죽은 사람을 위해 불사르는 종이옷(冥衣)이다. 금갑점(錦匣店)과 명의포(冥衣舖)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문창제군을 조상신으로 숭배했다. 문창제군이 문화와 교육의 신이었기 때문인데 이들 업종이 일정 정도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 설서업(說書業)


설서(說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순수하게 책 내용을 이야기 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후자에는 장단을 맞추는 고수(鼓手)도 포함된다. 이들은 주로 주장왕(周莊王)을 조상신으로 섬겼는데 일부 공자나 문창제군을 숭배하기도 했다.


이들이 문창제군을 조상신으로 섬긴 이유는 문창제군의 환생 설화와 관련이 있다. 문창제군은 수십 차례 환생하여 세상에 내려왔는데, 한 번은 황제의 아우로 환생했다. 그는 박학다식하여 서울에 가만히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늘 천하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와 시사(時事)에 대해 강연했고, 많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리하여 문창공(文昌公)으로 봉해졌다. 이후에도 문창공은 각지를 돌아다녔고 이야기를 전했으며,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에게 각종 편의가 제공되었다. 말하자면 설서를 하는 사람의 원조였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설서 자체가 문화 및 교육과 관련된 일이니 문교(文敎)의 신령인 문창제군을 조상신으로 섬겨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중국 행업신 이야기 동업자들의 세속화된 신성 7】

 

박경석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www.xinwenren.com/wenhua/2013012411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