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중국학 연구동향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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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미얀마 국경지역 조사·연구 성과 소개(9) _ 리페이

[편집자의 말]

20244월호부터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이 중국 윈난대학 인류학과(雲南大學人類學系)와 함께 수행한 중국 남서부 국경지역 공동연구 사업의 연구성과 보고서에 대한 번역·요약을 연재한다. 중국-라오스, 중국-베트남 국경 문제에 관련된 해당 연구사업의 지난 1단계 연구성과는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국경 마을에서 본 국가라는 단행본1)으로 출간된 바 있다. 중국-미얀마 국경에 대한 현재 2단계의 연구성과는 중국어판 연구성과 보고서의 형태로 중국학술원에 소장되어 있다. 해당 연구성과를 널리 공유하고 확산하기 위해, 특히 국경 및 초국경 이동 관련 분야의 연구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성과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여 <관행중국> 웹진을 통해 공개한다. 이번 호는 제4<국경마을의 경계 인식과 경계 관념(): 룽안촌 촌락공동체와 장소성의 형성>의 전반부 내용을 지난 호에 이어 번역하여 소개할 것이다.

 

 

[내용요약]

 

장 국경마을의 경계 인식 및 관념()

-룽안촌 촌락공동체와 장소성의 형성(1)-

 

룽안촌은 이주민 공동체로서, 그 형성 과정은 대략 195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초창기 지도자인 라오궁바오(老龔保)2)의 영정 사진에는 룽안촌이 1955년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대부분 주민의 기억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관련 문헌 자료가 부재하기 때문에 마을의 정확한 설립 시점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주민들의 구술 서사와 집단적 기억을 통해 과거 마을 형성과 관련된 역사를 부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룽안촌의 역사적 서사가 특별하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이 마을의 형성 과정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중국-미얀마 국경의 확립과 맞물려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룽안촌 주민들과의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주민은 내 고향은 입니다. 우리는 xx년에 이곳으로 이주해왔습니다.”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들의 이주 경험을 이야기한다.

 

불과 반세기 남짓한 시간 동안, ‘오호사해(五湖四海)’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룽안촌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3). 이 과정은 초기에는 이곳과 아무런 연고가 없던 사람들이 스스로 개척하고 정착하며 만들어낸 기억과 경험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이들이 장거리 이주라는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낯선 지역으로 이동하여 개간과 마을 건설에 나서게 된 이유는 심도 있는 탐구가 필요한 중요한 질문으로 제기된다. 이러한 독특한 집단적 기억과 역사적 경험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것을 넘어, 지역사회의 장소성(sense of place) 형성과 지역 정체성의 구축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룽안촌 공동체의 형성 과정을 주민들의 공통된 기억에 기반하여 분석하면, 이를 다음의 네 단계로 구분하여 고찰할 수 있다.

       

1. 차이자이쯔(踩寨子, 이주를 위한 터 잡기)”

현재 룽안촌 소재지에 아직 아무도 이주하지 않았던 시기, 인근의 광잉산(光英山), 마이워산(邁窩山), 신마산(新馬山)에는 이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러퉈(勒托) 가문의 벙두(崩堵)인 짜오산두(早山堵)의 통치 아래 있었다. 현재 룽안촌 터로 가장 먼저 이주한 사람은 룽안 인근 광잉산에 거주했던 쿵()씨 성을 가진 한 징포족 가문이었다. 이 가문의 남성 시조는 쿵LL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버지는 미얀마로 이주했다가 미얀마에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가 두 살 된 쿵LL을 데리고 다시 현재의 룽안촌으로 이주하였다.

   

룽안에 도착한 직후, LL의 어머니는 징포족의 관습에 따라 신마산으로 가서 짜오산두에게 거주 허락을 요청하였다. 짜오산두는 이들 모자가 의지할 곳도 없고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고려하여 세금을 면제해 주고 쿵LL의 어머니가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쿵LL의 어머니는 산기슭의 평지에 있는 못(현재 룽안촌 중심에 위치한 달호수’) 근처를 거주지로 정하고 정착하였다.

   

LL과 그의 어머니가 이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1, 짜오산두는 공산당에게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여 가족을 남겨두고 스스로 둥쿼양(董闊央, 미얀마의 한 산)으로 도피하였다. 이후 그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이 지역은 그 시점부터 벙두의 통치에서 벗어나 사실상 무통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LL 가족 외에도 룽안촌의 형성과 관련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장소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역사가 오래된 마을인 방첸촌(邦千寨)이다. 방첸촌은 방첸산(邦千山) 위에 위치하며, 룽안촌 서북쪽 약 10km 떨어진 중국-미얀마 국경선에 위치하고 있다. 산 정상에는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과거 방첸촌은 바로 이 평지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우()XZ라는 노인의 회고에 따르면, 방첸촌은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어 있었는데, 윗마을에는 한족이, 아랫마을에는 징포족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저우XZ 노인은 자신의 남편 가문인 양()씨 가문이 이미 청대 중엽에 방첸산으로 이주했다고 전하며, 이에 따라 방첸촌의 역사는 청대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룽안촌의 초창기 이주민 가운데 방첸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 초창기 이주민들은 두 주요 가문, 즉 궁()씨 가문과 양씨 가문과 관련이 있다. 저우XZ 노인의 회고에 따르면, 방첸산에서 내려오기로 결심한 두 가지 주요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 이주가 이루어진 시기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로, 신정권이 아편 재배와 무역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단속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당시 방첸촌 주민들은 대부분 아편 재배를 생계 수단으로 삼고 있었으나, 신정권의 정책은 기존 생계 방식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둘째, 인구 증가로 인해 산 정상의 평탄한 경작지가 점차 부족해지면서 주민들이 산 아래로 내려와 새로운 경작지를 개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2. 젠자이쯔(建寨子, 마을 만들기)

마을 터가 잡힌 후, 방첸산에서 내려온 궁씨 가문 출신의 라오궁바오는 친척과 지인들을 설득하여 평지로 내려와 개간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당시 개간에 앞장선 모범적인 인물로서 그는 룽안촌의 초대 촌장으로 임명되었다. 농지 개간 이후 마을 창립식도 거행되었다. 창립식 당시 짜오산두는 이미 미얀마로 망명했지만, 라오궁바오는 그의 가족을 초대해 함께 술을 마셨다.

 

마을이 만들어진 이후, (), (), () 씨를 포함한 여러 가문이 차례로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하였다. 이들은 못을 중심으로 집을 지으며 정착함으로써, 마을 초창기 정착민으로 인식되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마을은 징포어로 을 의미하는 '눙안(弄安)'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마을 이름에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용()이라는 한자를 넣자는 초대 마을 초등학교 교장의 제안에 따라 룽안(龍安)으로 변경되었다.

 

방첸산에서 내려온 주민들 외에도 룽안촌의 성장은 룽촨(隴川)의 왕쯔수(王子樹) 마을4)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의 공헌으로 이루어졌다. 마을이 처음 세워졌을 당시, 마을 주변은 키가 한 사람보다 높은 잡초로 뒤덮여 있었으며, 심한 장독(瘴毒)이 만연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을 개조하고 넓은 경작지를 개간해야 했으나, 마을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는 노동력의 부족이었다.

 

룽안촌의 인구를 늘리고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마침 개간 작업이 필요한 상황에서 라오궁바오는 왕쯔수에 살던 친척 쩌쿵S(則孔S)를 불러왔다. 라오궁바오와 쩌쿵S는 같은 진() 씨 집안의 딸과 결혼한 사이로, 동서지간의 관계였다. 당시 쩌쿵S의 가족은 왕쯔수의 큰 산에서 아편을 재배하며 판매와 흡연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첸산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아편 재배와 판매를 금지한 정치적 이유로 쩌쿵S의 가족도 큰 산에서 내려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야 했다. 비옥한 땅과 넓은 개간지를 가진 룽안촌은 초창기 단계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쩌쿵S는 자연스럽게 라오궁바오의 요청에 응해 가족과 함께 왕쯔수에서 룽안촌으로 이주하였다.

 

이로써 룽안촌은 초기 단계에서 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첫 번째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이후 쩌쿵S의 가족은 한족 성씨인 쿵()으로 개명하였으나, 광잉산 쿵씨와 방첸산에서 내려온 쿵씨 가문과는 혈통이 다르다.

 

쩌쿵 가문의 후손인 쿵MX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룽안촌 주변의 산에는 나무 한 그루도 찾아볼 수 없었고, 평지 역시 나무는 전혀 없으며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있어 매우 황량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이 지역이 정착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관개용수의 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곳에 머물며 점차 해결 방안을 모색하며 정착을 지속해 나갔다.

 

1950년대부터 지방정부 간부들은 왕쯔수를 포함한 징포족 산악 주민들에게 평야 지대로의 이주를 유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평야 지대에서는 벼농사를 지을 수 있고, 산간 지대보다 교통이 편리하고, 경작 가능한 토지 면적이 넓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주의 장점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지방정부의 선전과 동원 노력은 징포족 주민들의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미얀마에 있는 징포족 친인척들에게도 전해졌다. 예컨대, 당시 라오궁바오는 쩌쿵씨 가문을 매개로 하여 이 가문의 미얀마 측 친족들에게도 룽안으로 이주할 것을 권유하였다.

     

마을 형성 과정에서 미얀마로 망명한 짜오산두를 따라가지 않은 러퉈(勒托, 즉 펑[]) 가문의 후손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중 러퉈 가문의 후손인 펑()KD의 가족은 룽안촌으로 이주해 온 많은 주민을 도왔다. KD 일가는 원래 신마산(新馬山)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짜오산두와 같은 가문의 후손으로서 공산당 정부의 탄압을 두려워해 초기에는 산 아래로 내려오지 못했다.

    

룽안에 마을 터를 잡으러 온 방첸촌 사람들은 한때 펑KD 일가를 마을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며 산 아래로 내려와 정착할 것을 권유했으나, KD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 펑KD의 셋째 할아버지가 미얀마에서 룽안으로 와서 정착을 요청하며, 정착 조건으로 마을 합작사(合作社)에 소 두 마리를 제공한 뒤 문제없이 정착하였다. 이 상황을 지켜본 펑KD 일가는 마을 창립식 이후 평야 지역으로 내려와 룽안촌에 정착하였다.

   

룽안 지역은 과거 펑씨(러퉈씨) 벙두가 관할하던 영역이었기 때문에, 펑씨 가문은 이곳에서 많은 땅을 소유하며 돼지와 소를 키웠다. KD는 이들 돼지와 소를 모두 평야 지대로 몰고 와 사육하면서, 사육과 도축을 주요 생계 수단으로 삼았다. 마을 주민들이 경작을 위해 쟁기질이 필요하거나 짐을 운반해야 할 때면, KD의 소를 빌려 사용하곤 했다.

   

마을에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처음 집을 지었을 때, KD를 제외하고는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새집을 완공하기 전까지 머물 곳조차 마땅치 않았는데, KD는 그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다오()씨 가문과 허()씨 가문이 그러한 도움을 받았다. 심지어 집을 지을 터전조차 펑씨 가문이 제공하였다. 이러한 도움을 받은 이들은 지금까지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있으며, 매년 징포족 신년이 되면 펑씨 가문에 고기, , 쌀국수(餌絲) 등을 가져다주고 있다.

   

그러나 마을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58, 대약진운동과 이에 수반한 대기근이 시작되었고, 룽안촌에서도 몇몇 가구가 미얀마로 이주하였다. 이들 중에는 파이(), 쿵씨, ()씨 가문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마을에는 네 가구만 남았다. 이들이 미얀마로 떠난 주된 이유는 이곳이 살기가 좋지 않다(不好在)’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관개용수 부족으로 농사를 짓기 어려운 환경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관개용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은 관개용 수로를 파려고 시도했다. 주민들은 간헐적으로 작은 수로(毛毛溝)를 일부 조성했지만, 노동력이 부족하여 큰 수로(大溝)를 완성하지 못했다. 특히 몇몇 가구가 미얀마로 이주하면서 노동력이 더욱 부족해졌고, 결국 수로 공사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부 주민들은 이 지역에서 장독이 심해 말라리아(瘧疾)에 걸릴 위험이 크다고 여겨 다시 왕쯔수 마을로 돌아갔다. 이들이 떠난 뒤 개간했던 경작지는 앞서 언급한 군대 농장이 차지하게 되었다.



리페이 _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참고자료

1) 왕위에핑·장정아·안치영·녜빈 지음, 2022, 『국경 마을에서 본 국가』, 인터북스

2) 라오궁바오(1922-1994)의 본명은 궁바오궁퇴(龔保龔退), 그는 룽안촌(龍安村)의 초창기 지도자이자 주요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룽안촌 판사처(龍安辦事處) 당지부 서기를 비롯해 룽촨현(隴川縣) 정협위원회 제7·8대 상임위원을 역임했으며, 마나우(Manau, 目瑙縱歌) 전통의 전승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라오궁바오의 손자는 1955년부터 그가 룽안촌 촌장으로 재직했음을 증명하는 사진과 문서를 룽촨현 정부로부터 발급받아 보관하고 있다.

3) 마을 노인들의 계산에 따르면, 룽안촌(龍安村)은 총 15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이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4) 왕쯔수는 룽촨현(隴川縣) 북동부에 위치한 한 향()으로, 룽안촌에서 북동쪽으로 약 4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고산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왕쯔수라는 이름은 실제로 한 그루의 나무에서 유래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미얀마를 거쳐 윈난성에 침입했을 때,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왕자님(왕쯔, 王子)’이라고 불리던 이 큰 나무는 이미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나무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이 나무는 베어졌으며, 나뭇가지들은 모두 텅충(騰沖)으로 옮겨졌다. 이 나무는 매우 독특하여, 나뭇가지나 줄기를 자르면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는데, 지역 주민들은 이를 나무의 라고 여겼다. 현지 징포족 주민들은 이 붉은 액체를 아들들을 많이 낳게 하는 피(旺子血)’로 여겼으며, 이곳을 또한 비슷한 발음으로 왕쯔수(旺子樹)’라는 한자 이름으로 부르는 동시에, 징포어 발음을 활용하여 피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았다(MX, 2019217일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