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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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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화상(華商) 우리탕(吳禮堂)은 왜 서양인 묘지에 묻혔을까? _ 송승석

인천 외국인 묘지는 개항장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해관원, 의사, 선교사, 사업가 등 주로 서양인들의 무덤이 안치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개중에는 국적은 불분명하나 태생이 일본인이거나 한국인인 이들도 일부 잠들어 있기는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태생과 국적 모두 중국인이 명확한 우리탕(吳禮堂)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는 점이다. 서양인들의 묘지라 할 수 있는 곳에 중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묻혀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인천에 거주한 중국인이라면 응당 내동(內洞)이나 도화동(道禾洞)에 소재했던 중국인 의장지(義莊地, 공동묘지)에 안장되는 게 얼핏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탕은 왜 중국인 묘지가 아닌 서양인 묘지에 묻히게 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잘 모르겠다이다. 다만, 그 개연성에 대해 몇 가지 추정할 만한 대목은 있다.

 

첫째, 우리탕은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천의 중국인커뮤니티보다 서양인커뮤니티와 더 친숙하고 연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우리탕에 관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1883년 인천해관의 방판(幇辦)으로 인천에 첫발을 내디뎠고, 곧바로 견미조선보빙사(遣美朝鮮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을 다녀왔으며, 이후에는 아예 인천에 정착해 이른바 오례당(吳禮堂)’이라는 양관 저택을 소유할 만큼의 대부호로 군림했다는 사실 정도이다. 이상의 간단한 이력만으로도 그는 한국의 근대사나 인천의 향토사에서 이따금 언급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정작 화교들 사이에서 특히, 인천 화교커뮤니티 내에서 그를 기억하는 이는 의외로 드물다. 어찌 보면, 외부적 명성에 비해 내부적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았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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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견미조선보빙사 일행

   

인천으로만 지역을 한정한다면, 우리탕은 동순태(同順泰)의 주인 탄제셩(譚傑生)보다도 8배가 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역시 8배 이상의 세금을 낼 정도의 갑부였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청()이 청국 조계지 확장의 명분으로 얻어낸 삼리채청상지(三里寨淸商地, 일명, 新界) 일대에 약 6,000의 거대 농지(일명, 吳禮堂農園)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정작 중국인들의 주 거류지라 할 수 있는 청국 조계 내에는 단 한 평의 땅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 그토록 화려했다고 하는 그의 양관 저택 역시도 서양인들의 거류지인 각국 공동조계 내에 자리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인근에 7필지에 달하는 토지를 경매 방식을 통해 매입했다. 이렇게 보면, 청국인 거류지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에서 그의 주요 근거지는 서양인커뮤니티라고 할 수 있는 각국 공동조계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인천 조계지의 자치 의회격으로 조계지 사무를 관장했던 신동공사(紳董公司)의 선출직 위원을 역임하게 된 것도, 각국 공동조계 내 토지소유자 중의 한 명이었기 때문이지 청국 조계에 거주하는 화상(華商)을 대표해 선출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보면, 그에게 청국 조계지는 왠지 낯선 곳이었다고 하면, 각국 공동조계는 외려 편안하고 친숙한 곳이었다 할 수 있다. 혹여 이러한 정황들이 자신의 사후 안장지를 택함에 있어서도 일부 영향을 끼쳤던 것은 아닐지 막연하게나마 추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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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우리탕(吳禮堂) 묘비

  

둘째, 우리탕의 종교관과 중국의 제례 혹은 상례가 서로 배치되었을 가능성이다.

 

물론, 우리탕이 카톨릭 신자였다는 확증은 없다. 그러나 그가 인천 답동성당 축성 시, 성당 종탑 내 3개의 종을 성물로 기증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의 묘비 앞에 거대한 십자가가 누워있는 왼쪽 사진을 볼 때, 카톨릭 신자였을 개연성이 있다. 더구나 그의 아내 아말리아 아마도르(Amalia Amador)가 스페인 출신이라는 점은 그 개연성을 더욱 높여준다. 그렇다면, 그 스스로 중국식 민간 상례에 따른 중국인 의장지 매장 방식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그보다는 카톨릭 풍의 장례 방식에 따라 자신의 장사(葬事)를 치르고 서양인들과 함께 인천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기를 희망했을 수 있다. 물론, 우리탕의 카톨릭 신자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의 사후, 스페인 아내의 일방적 의지에 따라 인천 외국인 묘지에 묻혔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의 유언장에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명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상은 필자의 일방적 억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탕이 자신의 동족인 화교 및 그 공동체와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 멀어진 거리만큼이나 그가 잃어버린 그 무엇은 없었을까? 아무튼 우리탕과 당시 화교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향후 흥미로운 과제가 될 성싶다.




송승석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https://oldkoreanlegation.org/timeline/

사진 2.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