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의 제목을 어떻게 정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처음에 “텅 빈 불교”가 떠올랐었다. “텅 빈”이라는 수식어가 진부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무언가 비었다는 것은 불교의 공(空)사상을 가리키는 것일 것 같아 적합하지 않았다. 불교의 공사상을 설명할 능력도 부족하지만 공사상은 본 글의 논의와 일단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것 저것 고민을 하다 “공백”, “빈칸”, “사이” 등이 후보로 올랐다. 진부하지도 않았고 공사상을 바로 불러일으키지도 않았지만 불교를 수식하기에는 좀 어색한 것 같아 (적어도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포기했다. 결국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은 “floating”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불교를 수식하기에도 참아줄 만은 했다. 움직임과 부유하는 역동성이 느껴진다는 점은 긍정적이었다. 정리 하자면 floating 은 후기 구조주의에서 구조를 만들고 변화시키는 배열과 배치라는 들뢰즈 사상의 영향을 조금 받아 “내용 없이” 움직이며 관계와 흐름을 만들어내는 텅 빈, 사이의 공간으로서의 불교를 보고자 붙여본 실험적 틀이다. 아프리카에서의 중국 불교의 역할을 이해 하려는 나의 무수한 시도에 floating 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작은 엔트리 포인트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는 1세기전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칼뱅주의)이 강조하는 성실, 근면, 절약의 정신이 서구사회에서 자본주의를 성공하게 만든 뿌리라고 주장했다.1) 중국이나 인도에서도 자본주의가 시작은 되었지만 지속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베버는 유럽에서 받아들여진 기독교 신교의 노동 윤리에서 찾았다. 인류학 박사과정을 시작했을 무렵 수업 과제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세미나 참가자들은 이 책에 대해 전근대적이고 문화우월주위적 편협한 시각으로 가득 찬 문제가 많은 저작이라고 신랄한 비판을 가했었다. 인류학 수업이었던 만큼, 베버가 사용하는 문화 상대주의를 무시한 논조와 근거가 빈약한 일반화가 특히 참가자들을 흥분시켰던 것 같다. 현대 자본주의의 부상을 노동의 착취라는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그래서 베버의 주장은 당시 수업을 함께 들었던 학생들에게 철없이 낭만적으로 느껴지게까지 했던 것 같다. 이 책을 과제로 읽게 한 교수는 자본주의라는 글로벌 경제 체제를 가능하게 한 조건을 정신, 문화, 종교적 차원에서 (경제적 차원이 아닌) 그 기원을 찾으려 했던 베버의 접근을 한 번쯤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나에게 베버의 이 저작은 수업 시간에 읽고 넘어가는 사회과학 분야의 일반 상식 수준의 의미 정도였다.2)
최근 몇 년 간 그렇게 그냥 스쳐 지나가면 될 것만 같았던 (별
볼일 없었던) 베버의 논의가 데자뷰처럼 지속적으로 떠올려지는 상황을 맞이했다. 타이완 불교 NGO 단체가 나미비아에 세운 기숙학교에서 현지조사를
하는 동안, 베버의 이 오래된 논의는 기독교를 불교로 교체한 채 활발하게 재생산되었다. 단체를 창시한 타이완의 Huili
스님은 공개적인 석상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불교와 물질적 번영의 상관 관계를 엮어내고 있었고 이 단체를 지원하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화교사회는
이에 이의가 없다. 불교의 어떤 특별한 가치가 중국이 현재 누리고 있는 부와 번영을 달성하게 한 원동력이라는
논란거리가 다분히 있어 치밀한 검토가 필요한 베버식 논의 말이다. 하지만 치열한 학문적 분석은 학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인 것 같다. 베버가 책 전체를 통해 신교의 종파를 나누고 그 안에 있는 윤리를 가져와 자본주의와의
연관성을 자세히 논의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베버의 설명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다), 스님의 화법에서 특정한 불교 교리나 불교적 윤리 도덕 원칙을 가져와 물질적 번영과의 연관관계를 분석적으로
설명해 줄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두 변수 사이에 관계가 없어도 아니고 설명할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며 단지 그 관계를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설명없이, 혹은 설명이 없기때문에, 불교-물질적 풍요의 상관 구도는 저항없이 받아들여지고 순환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단체를 지원하는 화교들에게 이 논리는 “상황적”으로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만하고, “affective” 한 차원에서 그냥 팩트다.
스님이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자주하는 스피치의 한 가닥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중국도 얼마전까지 아프리카의 나라들처럼 가난했었다. 그런데 불과
몇 십년 사이에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부를 축적했다. 너희들이 열심히 일하고, 근면 성실하면, 너희들이 너희 나라의 운명을 중국처럼 빠른 시간내에
바꿀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자주 언급되는 또 다른 가닥은, “지금까지
세계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의해 주도되어 왔는데 앞으로는 중국이 그 주도권을 이어갈 것이다. 중국어를
이해하고 쓸 수 있는 능력은 너희들의 미래에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이 흐름의 스피치들은 이 단체가
아프리카라는 먼 곳까지 와서 그곳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중국식 가치관을 소개하는 자선사업을 하는 윤리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데 이용되는
대표적 언사이다. 이런 식의 중화 제국식 담화는 여러가지 버전으로 바뀌어 스님이 아이들을 향해 설법하는
시간이나 새롭게 아이들을 모집 시 부모에게 학교를 소개할 때, 외부 단체가 학교를 탐방하러 왔을 때나,
동남아시아 순회 모금 공연을 할 때 단체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확인 재확인 하는 데 이용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스피치에서 불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강조되고 있는 부분은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그에 따른 중국식 발전 모델론의 정당화이다. 도대체 이 컨텍스트에서 말하는 “중국”은 무엇인가는 간단하게 기술될 수 없는 문제임을 잠깐 지적하고 넘어가겠다. 여기서는
논의의 전개를 위해 “중국”을 중화인민공화국 (PRC)이라는 민족국가와 그 국가의 경계를 벗어난 지역의 화교권을 포함하는 초월적 정치-문화-역사 개념이라고 하겠다. 다시
논의로 돌아오면, 아무리 중국 부상론이나 중국식 발전 모델론이 설득력이 있고 확장성이 좋다고 하더라도
중국과 불교를 한 줄로 연결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종교가 최근
몇 십년간 나라의 경제 부상에 크게 역할을 했을 것이라 보는 연구 결과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오히려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종교적 활동도 과감해지고 활발해졌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물론
중국 정부의 끊임없는 종교 활동에 대한 억제와 감시는 이어지고 있다). 어찌 되었든 종교는 경제 발전으로
여유를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사회 활동의 하나로 취급되는 것이 더 보편적인 접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불교가 잘 언급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교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선 담화를 말하는 발화자는 승복을 입은 출가인이고, 그 담화를
듣는 청중들은 불교 사원이나 그 비슷한 장소에 있다. 담화 주체와 담화를 소비하는 객체는 불교 수행자이고, 그 발화가 퍼지는 장소는 불교 친화적 공간이다. 발화자의 몸과 물질적
공간은 발화되는 언사의 방향을 결정지어 줄 뿐만 아니라 그 언사의 해석의 각도와 강도를 결정짓는다. 내용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국의 경제적 급부상과 중국어의 중요성을 나미비아라는 아프리카의 개발중 국가의
컨텍스트에 접목시키고, 가난한
가정 출신의 아이들과 그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기부자들이라는 구도를 배치할 때 이 모든 이질적 요소를 한꺼번에 묶어주는 불교라는 틀은 내용이 없음에도 (혹은 내용이 없기 때문에) 팩트가 되는 것이다.
이 단체가 무늬만 불교라고 말하라는 것은 아니다. 스님은
전세계를 누비며 이 단체를 위해 모금 활동을 한다. 길에서 보낸 시간이 길 아닌 곳에 보낸 시간보다
결코 적지 않을 일정을 소화하면서 나는 스님이 틈이 날때마다 조그만 불교 경전을 들고 읽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딱히 사원이나 도장에 소속되지 않은 스님으로 늘 길에서 생활하는 모금활동이 반평생 직업이 되어 버린 지금 붓다의
가르침을 잃지 않고 수행자로서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틈새 시간에라도 이렇게 불교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대화를 할 때면 스님은 불교 경전의 이야기를 자주 한다. 불교는
일상의 대화에 스며 있다. 스님의 뜻에 동조하는 화교 신도들은 세대를 이어가며 열심히 법회에 참가하고
기부를 해오는 신실한 수행자들이 많다. 누가 뭐라해도 이 단체는 불교가 핵심이다. 하지만 불교는 무거운 교리나 심오한 철학을 가지고, 혹은 그 교리와
깊음으로 인해 밖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다. 나미비아에서 필드웍을 하면서 접했던 불교는 틀만 가진
빈칸처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떠돌면서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언표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언어인류학이나
기호학을 가지고 불교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떠돌아다니는 언표로만 불교를 이해하기에 불교는 학교
건축, 붓다 조각, 거대 자금, 사람, 물자의 이동과 순환을 만들어내고 그 순환과 함께 움직이는
그 물질적 무게감이 너무 크다.
불교가 현 시점에서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어느 커뮤니티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것은
불교가 담고 있는 심오한 철학적 깨달음 때문이 아니라, 불교가 움직이면서, 때로는 표류하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물질적 공간, 구조(물), 형식(규율), 거기서 생산되는 담론, 그래서 일어나는 일상의 변화 (아침 일찍 기상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 등등이다. 베버가 서구 자본주의의 성공을 기독교에서 찾아보려고 시도한 것은 신선한 시도였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베버의 논의가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한 박사과정 세미나에서 처참하게 난도질을 당하는 이유는 베버가
내용과 의미에만 몰입한 나머지 기독교가 만들어내는 관계와 구조와 물질, 역동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베버는 기독교를 너무 심각하게 보았다. 나미비아에서
불교 단체에서의 31개월간의 현지조사가 내게 남긴 교훈 중의 하나는 종교는 생각보다 가벼울 수 있다는, 상상만큼 꽉 차 있지 않다는, 그렇게 늘 심오하지 않다는, 단순한 역설이었다.
불상을 거푸집으로 제작 중인 마다가스카르 분교 (2022 사진 저자) 이 불상들은 학교의 입구부터 주요 건물들까지의 길의 양 옆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이 불상이 방문자들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이 곳은 불교 공간이라는 것이다.
조영진 _ 시카고대학교 Earl S. Johnson Instructor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1) Max Weber의 영어번역판을 소개하겠다.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2003[1905]), translated by Talcott Parsons, Dover Publications.
2) 베버가 사회학 분야 (혹은 인류학 이외의 다른 학문분과) 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어떻게 취급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직접 촬영하여 제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