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4월, 청과 일본 간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의 속지(屬地)였던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었다. 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대만의 신민(紳民)들은 마치 어린아이(대만)가 부모(청)를 잃게 된 것과 같다면서 비참한 울분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이들 대부분은 청의 통치 체제 아래에서 특권과 지위를 의지하고 있던 신사(紳士)와 유력자들로, 이들에게 통치 주체의 변화는 자신들의 기반도 동요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청대 대만 사회에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대만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17세기 청 중기 이후 대륙의 복건에서 건너온 사람들과 후손들로 대만에 정착하고 나서 부를 축적한 이들이었다. 청의 통치하에서 대만의 유력자들이 청으로부터 수여받은 관직을 통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는 보조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들의 세력은 청으로 받은 관위나 학위가 아닌, 경제·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청의 입장에서도 유력자의 영향력을 통해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세수(稅收)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관청의 힘이 강하지 않았던 청대 대만의 실정에서 유력자와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곧 지역 통치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이었다. 실제 18세기 대만 동부 갈마란 현에서 일어난 대규모 계투 또한 지방 유력자의 중재를 통해 해결되기도 했다.
1895년, 청이 대만에서 물러나고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대만의 유력자들은 자신들의 지위과 이권에 악영향을 주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일본의 통치를 적극 반대하며 저항하려 했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권과 지위를 유지할 방법을 모색했다. 이 가운데, 맨손으로 일어나 전쟁에서의 공으로 가문을 일으킨 가문을 제외하면, 유력 가문 대부분은 근현대 대만의 산업에서 중심 역할을 해왔으며, 대만의 정치·사회적 변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통치 주체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려고 했으며, 통치 주체로부터 받은 이권과 특혜를 통해 가문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려고 했다.
사진 1. 대만의 사회적 폭력, 분류계투(分類械鬥)
대만에서 유서 깊은 가문을 말해본다면 “대만오대가문(臺灣五代家族)”을 드는 대만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가문들의 흥성과 통치 주체와의 관계를 구축한 과정을 보면 근현대 대만 정치·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만오대가문(臺灣五代家族)은 판교임가(板橋林家)·무봉임가(霧峯林家)·녹항고가(鹿港辜家)·기륭안가(基隆顏家)·고웅진가(高雄陳家) 등이 있다.
먼저 대만에는 "하나의 천하에 두 임씨 가문이 있다(一天下, 兩林家)"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양임가란 판교임가(板橋林家)와 무봉임가(霧峯林家)를 말한다. 판교임가는 18세기 말에 복건 장주(漳州)에서 대만으로 넘어왔으며, 대만에 정착한 이후 곡물 유통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천주(泉州) 출신 집단과 장주(漳州) 출신 집단 간의 계투(장천분류계투)에 개입하면서 크게 이익을 얻었다. 이후 임상문(林爽文)의 난(1786년)이 일어나자 다시 미곡의 가격이 폭등하게 되었고, 판교임가는 곡물 가격의 차익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때 벌어들인 돈으로 현재 대만 판교(板橋, 타이베이의 남서부) 일대의 땅을 사들이면서 거대한 농장을 세울 수 있었다, 여기에 소금, 사탕, 차, 목재 등 대만에서 생산되는 자원들의 생산과 유통에도 관여하였다. 판교임가가 다룬 자원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대만 경제의 주축산업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무봉임가(霧峯林家)는 대만에서 유일하게 “제일무력세가(第一武力世家)”로 불리는 가문이다. 『임씨족보(林氏族譜)』에 따르면, 무봉임가는 임문찰(林文察)이 청을 도와 태평천국의 진압에 공을 세운 것에서부터 가문의 부흥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19세기 말, 복건의 소도회(小刀會)가 대만으로 넘어와 기승부리지 못하게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임문찰은 당시 대만에서는 유일하게 무관직인 참장(參將)의 관위를 제수받을 수 있었다. 이후, 대륙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영향으로 복건과 대만의 물가가 폭등하는 상황이 발생했으며. 이때 대조춘(戴潮春)의 반란(1862년) 역시 임문찰에게 진압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무봉임가(霧峯林家)는 청으로부터 장뇌(樟腦)의 수매권을 얻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무봉임가는 1882년 청불전쟁에서도 참전하여 프랑스에 대항하기도 했다. 이후 무봉임가는 치안 유지에 기여한 공으로 청으로부터 더 많은 이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가문은 무력과 군공으로 가문을 일으킨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례이다. 또 일본 식민시기에 비폭력 반일운동과 자치운동을 이끌고 대만 의회의 아버지로 불렸던 임헌당(林獻堂)은 무봉임가의 후손이기도 하다.
앞서 판교임가와 무봉임가가 청이 대만을 통치하던 시기에 발흥한 가문이라고 한다면, 녹강고가(鹿港辜家)는 일본 식민시기에 두각을 드러낸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의 결과로 일본에 대만을 할양하는 것이 결정되었으나, 청의 대만순무(臺灣巡撫) 당경숭(唐景崧)은 일본에 대만을 넘기는 것을 거부하고 대만 민주국을 세워 일본에 대항했다. 사실 대만 민주국의 건립은 전후 조약에 따라 일본에 대만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당경숭이 고안한 편법과 같은 조치였다. 대만 민주국의 항거가 일어나자 이에 일본 정부는 대만에 대한 무력 점령을 결정하고 군대를 파병했다.
1895년 5월 29일, 대만에 상륙한 일본군은 곧 대북성(臺北城, 현재의 타이베이) 공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대부분 급조된 병사로 이루어진 대만 민주국의 군대가 방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만 민주국 군대로 대북성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시각각 긴박해지는 상황 속에서 일본군에 항복해서 목숨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대북성의 유력자들은 일본군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일본군에 평화적으로 성문을 열어주고 타협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북의 유력자와 상인의 명의로 작성된 청원서를 일본군에 전달하려고 했고, 서창성(瑞昌成) 상회의 주인이자 녹강고가 출신인 고현영(辜顯榮)이 대표로 나서게 되었다. 그는 대북성을 떠나 기륭(基隆)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이 청원서를 전달하였으며, 성내의 상황도 함께 알렸다. 이렇게 일본군은 대북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으며, 같은 해 8월에 고현영은 대북성 접수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북보갑총국(臺北保甲總局)의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녹강고가는 본래 작은 상인 가문에 지나지 않았으나, 대북성 점령에 협력한 대가로 일본 식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대만의 목재, 소금, 장뇌 등의 전매권을 받아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녹강고가는 일본의 대만 통치에 맞춰 가장 먼저 번영한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 기륭안가(基隆顔家)는 역시 복건 천주 출신의 가문으로 청대에는 소규모 광산업을 운영하다가 식민시기에 대만에 진출한 일본기업 미쓰이(三井)와 손을 잡고 성장하면서 "탄왕금패(炭王金覇)"의 칭호를 얻은 가문이다. 이 기륭안가는 이후 금융업에도 진출하여 중국신탁집단(中國信託集團)을 설립한 바 있다. 그리고 고웅진가(高雄陳家)는 복건 천주 출신으로 일본 식민시기에 사탕수수를 나가사키와 홍콩 등에 수출하는 국제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가문으로 당시 대만의 사탕수수 산업을 진흥시키려는 일본 식민정부의 정책과 맞물려 적지 않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까지 대만오대가문(臺灣五代家族)의 성장 과정은 당시 대만의 정치, 사회, 경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들 가문은 대만 근현대사의 흐름과 변화 속에서 통치 주체와 협력해 성장했다. 청대 대만의 주요 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과 유통을 통해 부를 축적한 판교임가와 무공(武功)을 통해 가문을 세운 무봉임가가 있었으며, 녹강고가‧기륭안가‧고웅진가는 일본 식민통치에 협력하여 가문을 부흥시킨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청대 이후 대만은 자력구제와 각자도생이 사회 저변에서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으며, 대만오대가문은 대만 경제 구조와 통치 주체와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진 2. 청대 대만의 부호였던 린안타이(林安泰) 가문의 저택
김봉준 _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참고문헌
1) 李文良, 『契約與歷史』, 臺北: 臺大出版中心, 2022.
2) 司馬嘯青, 『台灣五大家族』, 臺北: 玉山社, 2000.
3) 薛化元, 『臺灣開發史』, 臺北: 三民書局, 1999.
4) 黃秀政, 『代臺灣分類械鬥事件之剖析』, 臺北: 臺灣文獻, 1976.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芝山岩械鬥”, 數位加值資源整合平台 http://cloud.glis.ntnu.edu.tw/ug-409.jsp?newsid=4
사진 2. 林安泰 고택,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