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삼일절 날 강추위 속에서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찾았다. 이 선교사묘원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 조선 선교를 위해 헌신한 외국인 선교사와 가족 415명이 안장되어 있다. 우리의 귀에 익숙한 아펜젤러, 헐버트, 언더우드, 베어드, 스크랜턴, 게일 등 유명한 선교사가 여기에 잠들어 있다. 대부분은 서양인이지만 일본인 소다 가이치(1867∼1962)가 동양인으로 유일하게 안장되어 있어 관심을 기울여 보고 있는데, 바로 그 옆에 중국풍의 묘비가 우뚝 서 있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진 1. 졸리 부영사 묘비 뒷면 확대 사진 2. 졸리 부영사 묘비 앞면
묘비의 정면에 영어로 “SACRED TO THE MEMORY HENRY BENCRAFT JOLY BORN 1858 DIED 1898”로 각인되어 있었다. 서양인으로 보이는 이 사람에게 왜 중국풍 묘비가 세워져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묘비의 뒷면으로 가보았다. 묘비의 뒷면에는 한자로 다음과 같은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당시 모든 글자의 판독이 이뤄지지 않아 여러 자료와 학술원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묘비를 판독할 수 있었다.
大英駐韓仁川領事館周驪君墓碑
嗚呼周公 徳業昭彰 惠澤流長
俾我華商言念不忘 善人云亡
涕泗沱滂 嗚呼周公 美玉善藏
大清光緒二十六年二月吉日
仁川 華商 恭泐
묘비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대영주한인천영사관 졸리 군 묘비
오호 졸리 공이여 인덕과 공적이 너무나 커서 그 은혜와 덕택은 유구하리라
우리 화상은 말과 생각에서 (졸리 공을) 잊지 못할 것이라 선인이 서거하니
눈물 콧물 줄줄 흘러내리네 오호 졸리 공이여 아름다운 옥에 고이 잠드소서
대청광서26년(1900년) 2월 길일
인천 화상이 돌에 새겨 삼가 드립니다
이 내용을 확인하고 순간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 화상이 어떤 연유로 졸리의 인덕과 공적을 칭송하여 영원히 잊지 못해 이렇게 묘비까지 세워준 것일까? 도대체 졸리 부영사가 인천 화상을 위해 무엇을 도와주었길래 이런 훌륭한 묘비를 세워준 것일까? 이때부터 졸리 부영사가 누구인지, 인천 화상과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도움을 주었는지, 묘비가 세워진 경위를 밝히기 위한 여행이 시작됐다.
3월 22일부터 25일까지 나가사키 차이나타운 조사를 떠났다. 25일 비가 오는 가운데 구 홍콩상하이은행나가사키지점기념관을 견학했는데 그곳에서 나가사키에 영국영사관이 있었고 영사관을 모형으로 전시해 놓은 것을 발견했다. 더 알고 싶어서 이 분야 전문가인 나가사키종합과학대의 브라이언 버크-가프니 명예교수가 쓴 책을 서점에서 구입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인천 영국영사관을 검색하니 인천관동갤러리서 ‘인천 영국영사관과 하나 글래버 베넷展’이 개최되고 있었다. 가프니 교수가 영상으로 강연을 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귀국 후인 3월 29일 인천관동갤러리로 달려갔다. 2월 25일 가프니 교수가 행한 “하나 글래버 베넷의 일생”이라는 강연 영상을 봤다. 근대 나가사키의 유명한 서양인 실업가 글래버의 딸인 하나 글래버 베넷이 인천에서 40여 년간 거주한 발자취, 인천과 나가사키의 교류의 역사, 그리고 하나 글래버 베넷이 1915년 인천 영국영사관(1906년 부영사관에서 영사관으로 승격)이 문을 닫은 후 남편 베넷과 그곳에서 거주한 발자취, 인천영사관의 1기, 2기, 3기 영사관 건물의 사진과 설계도, 모형 등을 직접 볼 수 있었다. 3월 30일 관동갤러리에서 강연하기 위해 인천을 찾은 야마다 유카리 나가사키종합과학대 교수와 우연히 만나, 졸리 부영사와 인천 화상 간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고 밝히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때부터 양국 간 국교가 정상화되는 1899년 12월 말 한청통상조약 발효 때까지 5년 5개월여 동안 영국영사관이 화인 보호 활동을 맡았다. 졸리 부영사는 1891년 중국의 6대 기서 중 하나로 알려진 《홍루몽(紅樓夢)》을 “Hung Lou Meng: The Dream of the Red Chamber”의 제목으로 출판했으며, 인천에 부임하기 전 중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중국어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인천청국조계의 유지와 권익 보호, 화인과 조선인 간 다툼으로 발생한 재판에서 화인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변론을 전개,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인천 화상은 1898년 6월 23일 졸리 부영사가 격무로 인해 병환으로 사망하자, 1898년 7월 그의 화인 보호를 위한 헌신적인 활동에 감사의 표시로 묘비 제작에 착수했다. 또한 남편을 잃은 졸리 부인이 소송에 휘말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알고 졸리 부영사에 대한 고마움의 간접적인 표시로 금전적 지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총영사관이 이러한 것이 적법한 것인지 문제를 제기하자 시간이 걸려, 묘비가 인천외국인묘지에 세워진 것은 1900년 2월이었다. 그의 막내 딸이 1950년대 현재의 양화진외국인묘원으로 이장했다. 이 묘비는 청일전쟁 직후 조선의 영국영사관이 화인 보호 활동을 했다는 상징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사진 3. 졸리 부인과 궁내부 차관 간의 계약서(1910년)
졸리 부영사 묘비 옆에는 사각형의 묘비가 두 개 세워져 있다. 하나는 졸리 부인인 클라라 A. 졸리(Joly, Clara Agnes Lillie 1860~1928.3.28.)이다. 졸리 부인은 졸리 영사와 결혼하여 인천에 거주했다. 남편과 사별한 후 1898년 10월부터 1910년경까지 순종이 왕세자로 있을 때 영어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에서 1927년까지 살다가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아들을 찾아 1927년 조선을 떠났다. 그 후 베이징에 있는 아들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1928년 3월 28일 별세했다.
또 같은 모양의 다른 묘비는 졸리 부부 사이의 세 자녀 중 막내 딸인 릴리안 A. 휘트만(Whitman, Lilian Agnes Joly)이다. 그녀는 1896년 출생하고, 서울에서 석유회사 사무원으로 1920년대까지 일하면서 휘트만(Grant Whitman)을 만나 1927년 서울서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한·일스탠다드석유회사에서 기독 실업인으로 30년간 일하다가 퇴직하였다. 퇴직 후 미국 매릴랜드의 베데스다(Bethesda)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8년 별세했다. 그가 별세하자 남편 그랜트 휘트먼은 부인의 유해를 양화진으로 운구하여 현재 그 부모와 같이 안장되어 있다.
【화교·화인의 ‘세계’ 7】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참고문헌
Christopher Roberts, British Extraterritoriality in Korea, 1884-1910 A Comparison With Japan, England: Renaissance Books, 2021.
ブライアン·バークガフニ, 『寫眞でたどるハナ·グラバー·ベネットの生涯』(인천 영국영사관과 하나 글래버 베넷展 전시회 도록), 2024.
ブライアン·バークガフニ, 『リンガー家秘録 1868-1940』, 長崎文獻社, 2014.
仁川府廳 編纂, 『仁川府史』, 1933.
이영미 역, 『인천학자료총서25 제물포 각국 조계지 회의록 2』, 보고서, 2020,
인터넷블로그,『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Ⅱ(https://blog.naver.com/ohyh45/222627558605)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2. 2024년 3월 1일 필자 촬영
사진 3. 1910.8.28., 寺內正毅통감→궁내부대신, 1910年 周驪夫人續聘合同의件,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