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까지 미국 내 중국인의 조직은 대체로 많은 중국인 이민 사회에서 그렇듯 방언을 중심으로 모인 고향공동체가 중심이 되었고, 동향 출신의 부유한 상인들이 조직의 위원회를 구성하며 조직과 공동체를 이끌었다. 동향조직이 생성될 만큼 중국인 이민자가 늘어남과 동시에 진행된 반중 움직임의 정점에서 1882년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이 연방법으로 통과되었고, 이는 새로운 노동 계층의 유입을 차단하며 미국 내 중국인 인구의 감소, 특히 중국 사회문화를 직접 경험한 1세 성인층의 인구 감소로 이어졌다. 연방 이민법의 변화와 그에 따른 인구 성격의 변화는 남아있는 또는 간간이 새로 유입되는 거주 중국인 공동체 내 조직 형성에 있어서도 점차 본국의 체제에 따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지의 아젠다와 관습의 영향을 받아 구성되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부유한 상인이 조직 형성을 주도하던 중국인 커뮤니티에서 1930년대에 들어서는 노동운동, 민권사상의 영향을 받아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조직을 구성한다거나, 눈에 띄지 않는 여성들의 실내 사교모임 대신, 미국 엘리트 여성 모임과 같이 이벤트를 만들어 기금모금 활동을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성 조직이 등장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다음으로 중국인 인구가 많았던 뉴욕에 형성되었던 노동조직 ‘중국인 손세탁 연맹’과 여성 조직 ‘중국인 여성협회’의 사례를 보면, 이들 조직의 형성과 운영은 현지의 아비투스에 영향받고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들의 활동은 현지에서의 삶을 타개해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정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초국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볼 수 있다.
중국인 손세탁 연맹(Chinese Hand Laundry Alliance)
중국인 배척법이 발효된 이후, 미국 내 중국인은 전체 인구가 감소했을 뿐 아니라 기타 차별적 사회 분위기와 제도로 인해 참여할 수 있는 일자리가 중국음식점 및 세탁소 등으로 극히 축소되었다. 특히 세탁업은 하루 10시간에서 16시간에 달하는 지루하고 자잘한 노동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영어 실력이나 큰 자본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 많은 중국인들이 세탁업으로 몰렸다.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미국 내 전체 중국인 4명 중 1명이 세탁업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뉴욕에 가장 집중되어 대공황이 왔을 땐 뉴욕에만 약 3,550개소의 중국인 세탁소가 있었다(Siu 1987: 35).
‘중국인 손세탁 연맹’(CHLA)이 결성된 계기는 뉴욕에서 중국인 세탁업자들에게 차별적인 조례 입안이 제시되었을 때이다. 1933년 뉴욕의 앨더만(Alderman) 시 위원회는 세탁업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 1) $25의 면허 비용, 2) $1,000의 보증금, 그리고 무엇보다 3) 미국 시민권을 요구했다. 배척법으로 인해 미국 태생이 아닌 중국인은 귀화에 의한 국적취득의 길이 막혔기에, 이 법안은 비중국인 세탁업자들의 청원에 따라 중국인 경쟁자들을 세탁업에서도 몰아내려 한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었다.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했던 기존의 ‘중국인 통합자선협회’(Chinese Consolidated Benevolent Association, CCBA)에서 어떤 도움도 제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중국인 조직이라는 이름만 달고 우리를 보호하기는커녕 우리 사업에 해를 끼치고 착취했다.”(Yung, Chang, and Lai 2006: 185)는 판단 하에 세탁업자들이 스스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CCBA와 그 휘하의 조직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그 계기를 이기적으로 이용한다는 성명서를 내고 254명의 세탁업자들은 스스로 연대하여 차별적 조례를 없애도록 싸우고 나아가 세탁업자 간 경쟁으로 서비스료가 하락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연맹은 새 법안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 성공하여, 증가하던 비용은 $10로, 보증금은 $100로 경감되었고 무엇보다 중국인 세탁업자들은 시민권 요구에서 면제되어 생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연맹의 활동은 당시 미국에 생성되던 급진적 정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고, 처음으로 좌파 집단이 뉴욕 차이나타운 중국인 공동체의 권력구조에 공개적으로 도전한 일이었다.
이후 연맹의 성원은 3천 명 이상으로 증가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저항전쟁(China’s War of Resistance)을 적극 지지하고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비판하는 등 중국 국내의 문제에도 깊이 관여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미국 시민운동을 지지하고 미중관계 정상화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무렵엔 이미 손세탁 사업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기도 했고 맥카시 시기 FBI의 괴롭힘으로 인해 성원이 약 100명 정도로 감소하며 약화되었다.
사진 1. Chinese Hand Laundry Alliance Rally for China Relief 1938
중국인 여성협회(Chinese Women’s Association)
1931년 일본의 만주 공격은 중국인 공동체 내 여러 층의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서 모국의 전쟁 수행에 한몫하도록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만주 점령 후 곧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시애틀, 포트랜드 등 미 전역에 걸쳐 중국인 여성 조직이 형성되었고 회원들은 기금모금, 중국 사정의 홍보, 적십자 관련 일 등에 뛰어들었다. 이 중 가장 먼저 결성되어 효과적으로 작동했던 집단 중 하나가 1932년 결성된 뉴욕의 ‘중국인 여성협회(CWA)’로서, 회원들은 먼저, ‘미국은 중국에서의 전쟁에 끼어들지 말자’고 했던 신문 편집장들에게 “중국에서 일본의 잔혹상을 볼 때 그런 입장은 부도덕하고 비겁하다, 미국이 평화적인 수단으로 모든 국제분쟁을 해결하도록 돕겠다는 이전의 선언을 지켜야 한다”는 편지를 쏟아부었다. 또한 뉴욕 여성들 사이에서 여러 차례 전쟁 난민 구호를 위한 기금모금 활동을 하여 일 년간 약 3만 불을 모금하여 중국의 병원 등에 전달했다.
CWA의 궁극적 목표는 중국인 이민 여성과 딸들이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도와, 중국계 미국인과 미국 사회 간 관계를 개선하고, 뉴욕시 중국인 공동체에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역할 제시와 조직의 현대적, 중산층적 열망은 지도자들의 출신배경을 반영하는 바, 5년 간의 협회 활동 보고서를 작성한 협회장 테오도라 챈 왕(Theodora Chan Wang)은 콜럼비아 대학에서 석사를 한 후 10년간 차이나타운 YMCA의 사무국장으로 근무함으로써 미국 사회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뉴욕 중국인 공동체가 가진 이슈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협회 보고서에서(Yung, Chang, and Lai, ibid.: 188-195) 왕이 밝힌 설립의 우선적인 목적은 중국인 이민 여성들이 친교할 수 있고 교육, 교류,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조직과 공간을 마련하여 그들이 미국 사회에서 행복하게 잘 적응하며 살게 한다는 데 있었다. 중국인 인구 약 만 6천의 샌프란시스코에 멋진 건물을 갖춘 두 개의 중국인 여성 조직이 있는 반면, 인구 만 명의 뉴욕에는 남성들을 위한 클럽과 동호회는 꽤 있지만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사회조직과 공간이 없어서 노인뿐 아니라 젊은 세대도 집에만 머무르거나 도박장, 영화관이나 기웃거리는 실정이었다. 이민자들이 문맹률도 높은데 다른 국적인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해서 “대도시의 중심부에 살면서도 미국의 가정생활과 높은 생활 수준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중국 마을에 있는 것처럼 생활”하는 상황을 타개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CWA는 시작되었다.
협회는 ‘중국대중교육전국협회’ 와 연계하여 간자체 수업을 열고, 박물관, 아트센터, 공장견학 등을 할 수 있는 여행프로그램, 독서클럽 등을 통해 회원들의 지적 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젊은 회원들이 바다낚시, 하이킹, 피크닉, 캠핑 등 야외활동과 농구 테니스 수영 댄싱 등의 스포츠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중국인 여성과 자녀들이 편안한 환경에서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실내게임을 클럽룸에 들였고, 이탈리아, 러시아, 그리스 등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을 맞이하기도 하고 미국인 가정에 방문하여 테이블 매너나 인테리어 등 실제 미국인의 가정생활을 익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여고생들이 클럽룸에서 아이들에게 중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글을 읽어주거나 쌍십절 파티 때 드라마를 선보이는 행사를 가졌고, 중국에서 전 외무부 장관 등 인사가 방문하면 환영 만찬을 여는 등의 사교활동을 벌였다. 1930년대 공황이 길어지면서 뉴욕 차이나타운도 여지없이 경제적인 타격을 받았던 지라 다른 자선단체와 연합하여 무료 식사 티켓을 나눠주기도 하고, 꽃을 팔거나 그림자극 등을 선보여 모은 자금으로 병원의 중국인 환자들을 위문하고, 그 외 실업 문제나 집 구하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왔다.
사진 2. 전쟁 구호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뉴욕시에서 퍼레이드하는 중국인 여성들
미국 내 중국인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 외, 협회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 본토의 전쟁과 수해 등의 피해를 돕기 위한 구호자금을 모금했다. 드래곤 퍼레이드, 거리댄스, 중국 오페라, 그림자극, 칼싸움과 작품 전시 등 다양한 자선 바자를 개최하여 1932년 2월 약 $7,690, 1932년 3-4월 일주일간 약 $19,189, 1933년 4월 약 $3,805 금액의 기금을 모아 중국에 전달했다. CWA가 보고서에서 표방한 조직의 목표와 활동상을 보면 전쟁과 시대의 영향으로, 또한 미국사회에 적응하려는 노력 속에서 미국 내 중국인 여성들 간에 젠더 역할이 변화하고 정치활동이 증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미국의 중국인 11】
정은주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참고자료
Siu, Paul. 1987. The Chinese Laundrymen: A Study of Social Isolation,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Yung, Judy, Gordon H. Chang, and Him Mark Lai eds. 2006. Chinese American Voices: From the Golden Rush to the Presen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Museum of Chinese in America (MOCA), Chinese Hand Laundry Alliance Collection, https://lrl.kr/hoxW
사진 2. Museum of Chinese in America (MOCA), Warren Chan Collection, https://lrl.kr/lAG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