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서는 인천화교소학 분교시리즈의 마지막으로 부평분교를 소개하고자 한다. 부평은 일찍이 상업이 발달했던 도시로, 부평에 거주했던 화교들은 대부분 요식업이나 잡화업을 위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분교 설립 이전, 부평 지역의 화교자녀들도 다른 지역의 화교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인천항 근처의 인천화교소학까지 통학하였다. 다행히 부평은 경인철도가 다니고 버스 노선이 많아 교통이 편리한 편이었지만, 화교들은 어린 자녀들이 매일 먼 거리를 통학해야 한다는 것을 염려했다.
1951년 8월, 한국전쟁으로 잠시 휴교했던 인천화교소학이 복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평의 화교지도자였던 필경청(畢鏡淸)과 이복규(李福奎)는 전시(戰時) 중에도 먼 거리를 통학해야 하는 어린 학생들의 고충을 해결하고자 부평분교 설립을 제의하였고 많은 화교들이 이에 공감하였다. 또 당시 인천화교자치회장 겸 인천화교소학의 이사장이었던 여계직(呂季直)도 분교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얼마 후, 인천시 부평출장소의 창고에서 부평분교의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부평분교 역시 다른 지역과 동일하게 저학년에 한하여 수업을 진행하였다. 당시 부평분교의 학생은 20여 명에 불과했고 행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모두 인천화교소학 본교의 지원을 받았다.
설립 후 2년 뒤, 부평분교의 교사(校舍)로 사용된 창고가 인천시로부터 회수되는 상황에 놓였다.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마땅한 교사를 찾지 못한 부평지역의 화교들은 인천시와 협의 끝에 또 다른 창고를 임대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임시적이나마 교사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부평지역의 화교들은 교사 건설을 본격적으로 계획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부평분교의 새로운 교사 건설이 추진되었고, 본교로부터 지원받은 건축비 392,690원에 현지에서 모금한 건축비를 합해 총 766,500원의 자금이 준비되었다. 화교들은 약 220여 평의 부지를 구입하여 교실 세 칸짜리의 교사를 지었고, 이후 60여 평을 추가로 구입하여 총 280여 평의 교사 부지를 마련하였다. 1954년 3월 1일부터는 새로운 교사에서 정식으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후 부평분교는 약 20여 년 간 운영되다가 1986년 7월에 폐교하게 된다.
1954년 부평분교의 학생들
1954년 부평분교의 교사(校舍)
1963년 부평분교의 학생들
이상으로 3회에 걸쳐 인천화교소학의 주안, 용현, 부평 세 지역에서 운영된 분교에 대해 알아보았다. 세 지역에 거주했던 화교들은 해당 지역의 특성에 따라 종사했던 직종이나 인구 수 등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으나 각 지역 분교의 설립과정, 운영방식 등은 거의 동일했다. 즉 이들 분교가 운영될 수 있었던 기반에는 화교지도자의 역할, 인천시와의 협력, 활발한 현지 모금활동, 화교자치단체의 조직력 등이 필수적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시기에 인천화교소학의 대대적인 교사 신축이 진행되었고 각 지역에서 분교 설립이 활성화 되었다는 점은 주목해볼 만하다. 단순히 추측해보면 전쟁피해의 복구가 급박한 상황에서 분교 설립보다는 생활안정과 생계도모에 더욱 힘써야 했을 것 같다. 그러나 화교사회는 자녀교육을 그 무엇보다 시급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타국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자녀들의 신분상승을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민주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코디네이터
참고문헌
杜書溥, 『仁川華僑教育百年史』, 2012.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 디지털 아카이빙 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