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중국학 연구동향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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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미얀마 국경지역 조사·연구 성과 소개(6) _ 리페이

[편집자의 말]

20244월호부터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이 중국 윈난대학 인류학과(雲南大學人類學系)와 함께 수행한 중국 남서부 국경지역 공동연구 사업의 연구성과 보고서에 대한 번역·요약을 연재한다. 중국-라오스, 중국-베트남 국경 문제에 관련된 해당 연구사업의 지난 1단계 연구성과는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국경 마을에서 본 국가라는 단행본1)으로 출간된 바 있다. 중국-미얀마 국경에 대한 현재 2단계의 연구성과는 중국어판 연구성과 보고서의 형태로 중국학술원에 소장되어 있다. 해당 연구성과를 널리 공유하고 확산하기 위해, 특히 국경 및 초국경 이동 관련 분야의 연구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성과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여 <관행중국> 웹진을 통해 공개한다. 이번 호부터 제4<국경마을의 경계 인식과 경계 관념>의 내용을 번역하여 소개할 것이다.

    


[내용요약]

장 국경마을의 경계 인식 및 관념()

-지역사회 맥락 속의 룽안촌-

     

1. 지역 사회 맥락 속 룽안촌의 지형과 자연 경관


마을 주민들과의 심층 면담을 통해, 우리는 주민들이 룽안촌에 대한 인식이 산, , 들판, 못 등 자연 지리적인 지형과 경관에 기반한 객관적인 실체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지식이나 민간 전설 등을 동원하여 룽안촌에 대한 보다 복합적인 인문지리적 그림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객관적 실체와 주관적 인식 및 상상이 얽힌 그림은 객관적이고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에게 이는 곧 룽안촌에 대한 지역 사회의 인식이며, 여기에는 지역 사회의 경계관(境界觀)도 포함되어 있다.

       

심층 면담의 대상자는 연령대, 종교적 배경, 소속된 민족 집단, 성별 등이 상이하므로, 룽안촌의 자연 지리적 지형과 경관에 대한 인식 역시 상당히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주민들이 공통으로 언급하고 강조하는 몇 가지 객관적인 지형과 경관은 룽안촌의 핵심 경관으로 꼽힐 수 있다. 이러한 경관은 룽안촌이라는 지역의 지리적 중심과 대략적인 범위 및 경계를 동시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징포족(景頗族) 출신인 KMX는 룽안촌에서 가장 권위 있고 지식이 풍부한 장로로 인정받으며, 룽안촌에 가장 먼저 이주해온 주민이기도 하다. 그는 룽안촌의 지형과 경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 평야, 이런 것들은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본 것들이다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지. 이곳을 대표하는 것들이기도 하고. 산은 마이워산(迈窝山)과 광잉산(广英山)2)이고, 강은 난완강(南宛河)3)이지. 그리고 산 아래, 강이 감싸고 있는 평야가 바로 룽안이란다. 내가 룽안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겨우 5, 6살밖에 안 된 아주 어린 나이였어. 그때의 풍경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 그 당시에는 정말 황량하고, 풀이 유난히 높게 자랐었고, 모기도 많았고, 장독(瘴毒)도 있었지.”

 

룽안촌의 1세대 정착민으로서, KMX는 룽안으로 이주하기 전 왕쯔수(王子樹)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다. 왕쯔수 마을은 룽안촌과 같은 난완강 유역에 속하지만, 상류 평균 해발이 1,000미터가 넘는 산악 지대에 위치한다. KMX에게 왕쯔수 마을은 룽안촌과 멀리 떨어져 있고 자연 지리적 환경도 매우 다르지만, 그는 민간 전설과 자신의 지식 및 경험을 통해 두 고향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옛날에 왕쯔수에서 산 정상에 올라가서 놀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멀리 룽촨 평야가 보였어. 내가 들은 얘기로는 진시황 시대 이전에는 그 룽촨 평야에 아무도 살지 않았대. 나중에 둬()씨 성을 가진 한 가족이 잉장현(盈江縣)에서 산을 넘어 룽촨 평야로 내려와서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이 둬씨 가족이 이 평야에 오게 된 이유는 자식 중 한 명이 말벌에게 쏘여서 죽었기 때문이래. 그래서 복수를 하려고 말벌집을 찾아서 파괴하고 싶었던 거지.


그런데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 룽촨 평야로 오게 되었고, 여기서 말벌집을 발견했어. 그 벌집이 너무 커서 불로 태워버렸고, 잔해를 총 9마리 말로 운반해야 했지. 벌집의 모습이 큰 새장 같아서 이 평야를 새장 같은 평야, 즉 롱천(籠川)이라고 부르게 되었어. 또 산에서 보니까 이 평야의 모양이 새장처럼 생겼다고 해서 롱천이라고 불린다는 얘기도 있어. 나중에 발음이 비슷한 룽촨(隴川)으로 바뀌었어. 당시 언어에서 는 벌을 뜻했는데, 이 둬씨 가족이 나중에 룽촨을 다스리는 토사(土司)가 되었다고 하더라.”

 

같은 징포족 출신의 ZMJ 역시 왕쯔수 마을에서 이주한 마을 주민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 룽안 이주에 대한 그의 견해는 KMX와 확연히 다르다.

 

나는 하나님만 믿어. 우리 마을 사람들이 다 룽안에 내려왔는데, 나만 내려오지 않았다? 그게 말이 안 되지. 이곳은 그냥 선택된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이야. 우리 가족에는 12명의 형제가 있는데, 아버지가 먼저 내려오시고 형제들이 차례로 내려왔어. 그런데 지금은 룽안에 나만 남아 있어. 이것도 아마 하나님의 선택일 거로 생각해.”

 

왕쯔수 마을과 룽안촌의 자연 환경 차이에 대해 ZMJ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쯔수는 평야에 있는 룽안촌과는 달리 산 중턱에 있어서 날씨가 서늘해. 룽안만큼 미얀마와 가까운 건 아니지만, 겨울에는 룽안보다 더 추워. 전반적으로 보면 룽안과 비슷하게 살기 좋은(好在)’4) 곳이야. 또 하나 다른 점은 미얀마에 가려면 왕쯔수에서 출발하면 하루 정도 더 걸려. 예전에 큰아버지랑 미얀마에 갔을 때도 갔을 때나 돌아올 때나 하루 정도 더 걸렸어.”

 

많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룽안촌은 근대 징포족 산민들이 평지로 이주한 후 형성된 이주민 마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현재 마을 사람들은 룽안촌이 살기 좋은곳이라고 생각하며, 옛 고향과 새 고향의 연결고리와 이주의 합리성을 민속과 종교를 통해 스스로 구성하고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살기 좋다는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판단이다. 과거의 왕쯔수 마을도 룽안촌보다 살기 더 좋은면이 있었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지형과 경관을 마을 사람들의 경험과 인식과 유기적으로 연결해 주고, 룽안촌에 지역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실제로 현지 조사 과정에서 마을 정중앙에 위치한 못이 이 마을의 핵심 경관으로서 마을 사람들의 서사에 여러 차례 등장했다. 징포어에서 을 뜻하는 단어는 (/nong)’이며, ‘눙안(弄安/nong-an)’은 곧 못이 있는 곳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못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룽안촌의 이주와 마을 공동체 형성 과정에서 눙안이라는 징포어 이름이 룽안이라는 중국어로 된 공식화 지명으로 바뀐 것은 룽안촌의 이주사() 및 형성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룽안 촌락 공동체의 형성 부분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배수로가 정비되면서 못의 규모는 예전보다 훨씬 축소되었지만, 못 주변에는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가옥들이 다닥다닥 밀집해 있어 이 못은 룽안촌의 지리적 중심이자 대표적인 경관이다. 더구나 마을 사람들의 서사 역시 이 못과 그 주변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징포족 출신의 중년 여성 KKM은 이 못의 변화와 자신과 가족의 삶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 가족이 처음 이곳에 정착했을 때, 집을 바로 그 옆에 지었어요. 그 당시에는 모두가 못 근처에 집을 지었고, 한 집의 마당이 다른 집의 마당과 붙어 있었죠. 서로 마주 보면서 붙어살았던 거예요. 물론 어떤 집은 더 크고, 어떤 집은 더 작았죠. 우리가 어렸을 때는 못 주변의 풀이 높게 자랐어요. 그 풀은 집 지붕을 만들 때 좋은 자재가 되었죠. 풀이 너무 높아서 풀 밑에 물도 깊었고, 가끔 실수로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려웠어요. 소나 말 같은 큰 동물들은 감히 가까이 가지도 못했죠. 나중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이주하면서 물을 빼내기 위해 깊은 도랑을 파서 물을 빼냈고, 이제는 풀과 물에 쉽게 빠지지 않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는 우리 없이 돼지를 키웠는데, 돼지들이 못 주변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풀을 뜯어 먹었죠. 나중에는 돼지도 많이 키우고 못도 작아지니까 먹을 풀이 부족해져서 다른 집에서 심은 마를 먹어버렸어요. 그래서 마를 심은 사람들은 멀리 온천 쪽 길가까지 가서 심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다 뜯어 먹혔어요.”

   

이 네러티브는 징포족 산민들이 룽안촌으로 이주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수원지인 못과 이주-정착 간의 내재적 일치성을 명시하였다. 한편, 돼지 사육과 마 재배의 모순이라는 이야기는 정착민의 수가 증가하면서 초창기 수원지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모여 사는 정주 패턴에 대한 외부적 경계와 내부적 경계의 규정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반영하고 있다.

    

2. 지역사회 맥락으로 본 룽안촌의 내·외부 경계


현재 룽안촌의 징포족 주민들은 대부분 1972년 이전에 이주해 왔다. 당시 평야 지역으로 이주한 징포족 산민들은 여전히 산지에서의 생활 습관에 따라 자신의 농지와 택지를 (/ba)’라는 방식으로 경계를 구분했다. 여기서 라는 표현은 징포어에서 땅에 선을 그어 경계를 짓는다라는 뜻이며, 인클로저와 유사한 토지 사유화 방식을 의미한다. 그 결과, 1972년 이전에 를 통해 형성된 마을의 내·외부 경계는 공식적인 개입이나 인증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1972년 징포족의 대규모 이주가 끝날 무렵, 룽안촌은 당시 중국에서 보편화된 공유제 시스템인 인민공사 체제(人民公社體制)에 편입되었다. 공유제 전환에 따라 기존 농가 간의 토지 소유 및 토지 경계는 무효화되었지만, 인민공사 체제의 실제 운영 조직인 생산대(生產隊)와 생산소대(生產小隊) 등의 설립에 따라 생산대 간의 경계와 생산소대 간의 경계는 확정되었다.

    

KKM의 설명에 따르면, 룽안촌의 초기 징포족 정착민인 G씨 집안은 급수와 건축 자재를 쉽게 구하기 위해 의 북서쪽 가까운 곳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고 한다. G씨 일가가 정착한 이후, 바오산(保山)에서 이주해 온 몇몇 한족 집안이 의 반대쪽, 즉 남동쪽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 한족 집안을 중심으로, 이후 인민공사 시기에는 한족 생산대(漢族隊)가 설립되었으며, 반면 북서쪽에는 징포족 생산대(景頗隊)가 설립되어 한족 취락과 징포족 취락이 따로 분리된 현재의 주거 구조가 형성되었다.

   

초창기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두 에스닉 그룹의 거주지는 서로 흩어져 있었고, 특별한 영유권 분쟁이 없었다. 특히 징포족은 라는 관습에 따라 비교적 큰 집터를 점유했지만, 바오산에서 이주해 온 한족의 대부분은 쓰허위안(四合院/사합원) 형태의 가옥을 지었고, 주택이 상대적으로 밀집되어 있어 집터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한 한족 주민에 따르면, 작은 집터에 밀집하여 정주하는 이유는 바오산 한족이 처음 이주해 왔을 때 징포족으로부터 배척당할 것을 우려해 이러한 밀집된 정주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족 마을 주민들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실상, 룽안촌으로 이주한 바오산 한족은 나중에 내부 갈등을 겪으며 몇몇 집안이 룽안촌을 떠났고, 그들의 땅은 이후 징포족 집안이 점유하면서 동남쪽 한족 집단 거주 지역에서도 징포족 주거지가 산재하게 되었다. 동시에 서북쪽의 징포족 집단 거주 지역 역시 처음에 징포족과 함께 산에서 내려온 한족 집안들도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을 내부에는 경계가 존재하지만, 에스닉 그룹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되지는 않았다.

   

1965, 인근 량허현(梁河縣)에서 또 다른 한족 무리가 룽안촌으로 이주해 왔는데, 이미 인민공사 체제가 본격화되었으므로 이주민들은 자연스럽게 한족 생산대와 합류하여 950무의 황무지를 개간했다. 동시에 징포 생산대는 당시 한족 이주민의 생계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80무의 대지와 2필의 산림지를 한족에게 증여했다. 이에 대해 징포족 출신인 XND당시 징포 사람들이 가장 좋은 땅을 한족에게 줬어. 한족들이 우리 징포족에게 자기가 집도 없고 땅도 없어 살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우리 징포족이 마음이 여려서 좋은 땅을 줬지.”라고 기억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이주 인구가 증가하고 마을 내부 도로가 건설되면서, 마을 내부 주요 도로에 따라 징포 생산대와 한족 생산대를 2개의 소대(小隊)로 나누었다. , 징포 생산대 1, 징포 생산대 2, 한족 생산대 1, 한족 생산대 2대으로 나뉘게 되었다. 인민공사 체제가 폐지된 이후, 4개 생산소대는 촌민 소조 단위(징포 제1, 2 촌민 소조, 한족 제1, 2 촌민 소조)로 전환되어 룽안 행정촌의 근간인 룽안 자연촌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자신을 스스로 룽안 사람이라고 부르는 마을 주민들은 주로 이 4개 소대(촌민 소조)의 징포족과 한족 주민들이다.

    

집터 분할을 중심으로 마을의 내부 경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징포족과 한족이라는 두 에스닉 그룹 간의 큰 충돌이 발발하지 않았지만, 황무지 개간을 통해 농경지 영역을 확장하고 마을 외부 경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드라마틱한 갈등이 가득했다.

    

역설적이게도, 룽안촌 외부 경계를 둘러싼 갈등은 룽안촌 서쪽 경계, 즉 국경 쪽의 미얀마 마을과는 전혀 무관했으며, 오히려 동쪽의 군대가 개간한 농장과 발생했다. 이는 당시 국경 관리가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지역 사회의 국경 인식이 희박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이 여전히 절대 넘으면 안 되는 금지선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룽안촌 주민들은 토지 분쟁으로 군대 배경의 농장과 격렬한 갈등을 벌일 수 있었지만, 강 건너편의 미얀마 마을과는 결코 땅을 두고 언쟁을 벌일 여지가 없었다.

    

1955년 초, 대규모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윈난성 당위원회는 국경의 안정을 공고히 하고 농업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군축 과정에서 축소된 병력을 바오산과 더홍(德宏)의 국경선 주위에 배치하여 농장을 개간하도록 했다. 동원된 수많은 인민해방군 장교와 병사들은 군인에서 농장 노동자로 전환되었다.

     

농장이 설립된 후, 농장 노동자로 전환된 군인들은 거대한 룽촨 평야, 너무 황량하여 풀만 자라, 풀이 너무 깊어 하늘이 보이지 않아라는 노래를 만들어 자신을 룽촨 평야의 1차 개척자라고 자랑했다. 이는 다른 이주민 개척자 그룹 간의 갈등을 예고하는 복선이 되었다. 사실상, 농장이 설립된 직후, 산지에서 온 이주자들과의 토지 분쟁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룽안촌과 접경하는 라셴 농장(拉線農場) 사이의 토지 분쟁은 1958년부터 시작되어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1958, 잦은 정치운동을 피하기 위해 몇몇 룽안 집안들이 미얀마로 망명하면서 그들의 농지는 라셴 농장에 의해 점령당했다. 당시 룽안촌의 정착민 수가 많지 않았고, 정착민의 의사 결정 조직도 없었기 때문에, 라셴 농장의 농지 침탈 행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965년 량허현에서 이주해 온 한족 이민자들이 정착한 직후, 주변의 황무지를 대규모로 개간하면서 라셴 농장과의 영유권 분쟁이 본격화되었다. 분쟁의 초점은 마을 동쪽 한족 이주민 집단 거주 지역 외곽의 농지, 1958년에 점령당한 농지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한족 생산대와 라셴 농장 사이에 세 차례의 대규모 유혈 충돌이 발생하였고, 결국 진() 정부가 개입하여 현재의 룽안촌과 라셴 농장의 경계를 확정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농장과의 토지 쟁탈전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농장은 군대가 소유하며 전부 농기계로 경작하였다. 대부분 군인들은 허난성(河南省) 출신이라서 현지인들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세다. 1949년 이후 식량이나 고무 같은 물자가 부족해서 군대를 동원해 군수용 식량과 농작물을 재배하게 한 대표적인 사례는 신장(新疆)에 있는 건설병단(建設兵團)이었는데, 여기의 농장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농장의 군인들은 겉으로는 농민처럼 보이지만, 사실 정규군 출신이라 룽안촌 마을 사람들이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한족 생산대는 동쪽에 있었으므로, 토지 분쟁은 주로 한족 생산대와 라셴 농장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징포족 생산대는 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토지 공유를 표방하는 인민공사 체제 하에서 토지 분쟁은 에스닉 신분을 초월하여 같은 마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소환하였기 때문에, 징포족 사람들도 한족 생산대와 함께 외적과 싸우게 되었다. 예를 들어, 징포족 출신인 YMC는 자신의 아버지가 농지 쟁탈전에서 한족을 도왔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농장 사람들이 무한궤도식 트랙터를 몰고 와서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볏짚을 트랙터의 무한궤도 사이에 집어넣어서 시동이 꺼지게 했어요. 트랙터가 멈추자마자 한족 친구들이 호미로 땅을 파서 바로 농작물을 심었죠. 그때는 식량이 부족해서 농작물을 심은 땅을 파괴하는 게 큰 죄로 여겨졌거든요. 그래서 농장 트랙터는 결국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어요.”

   

토지 영유권 분쟁은 룽안촌과 군대 농장 사이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웃 다이족(傣族) 마을과도 수시로 발생하며 심지어 폭력 사태로 번지기도 했다. 또한, 현재 같은 룽안 행정촌 관할의 다른 두 징포족 자연 마을, 즉 마이워촌(邁窩村)과 광잉촌(光英村)의 토지와 경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룽안 평야 지역 북동쪽의 마이워산과 광잉산에 위치한 두 마을은 1970년대까지 룽안의 징포족과 함께 징포족 생산대를 구성했지만, 이들 마을의 거주지가 산악 지대에 있고 생산대가 경작할 농지가 평야 지대에 위치하여 이후 징포족 생산대에서 분리되어 각각 독립적인 생산대로 운영되었다.

      

산악 지대의 생활이 극도로 불편했기 때문에 마이워촌 주민들은 1970년대부터 자발적으로 평야 지역으로의 이주를 계획했다. 1980년부터 마이오촌의 일부 주민들은 마을 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평야 지대로 이주하였다. 1990년대에는 마이워촌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고, 농지와 임야만이 산에 남아 있었다. 반면, 광잉촌은 200475일의 홍수 재해로 취락 주거지가 파괴되었으며, 정부의 지원을 받아 평야 지대로 집단 이주하였다. 홍수 이재민 정착을 위한 새로운 부지는 라셴 농장으로부터 양도를 받았다. 광잉촌의 경작지와 산림 역시 여전히 산악 지대에 남아 있다.

    

그 결과, 룽안 행정촌의 3대 자연촌의 정주 패턴과 농지 이용 패턴이 안정화되어 오늘날의 마을 경계가 형성되었고, 농지 이용의 내적 경계는 1982년 농가도급제 실시 이후 농가의 인구에 따른 도급권 배분으로 확립되었다. 당시 도급농지 분배는 공평 원칙을 엄수하여 비옥도에 따라 1, 2, 3급으로 나누었으며, 1급 농지는 1, 2급 농지는 1.2, 3급 농지는 1.3무로 환산하여 진행되었다. , 비옥한 농지를 많이 배분받은 농가의 농지 면적이 상대적으로 작고, 비옥도가 낮은 농지를 더 많이 배분받은 농가의 농지 면적이 상대적으로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급농지 재분배에 대한 분쟁은 여전히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 인구수에 따라 배분했기 때문에 한족 생산대가 소유했던 농지 중 일부가 인구가 더 많은 징포족에게 재배분되었고, 한족들은 이에 대해 여전히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1982년 농지도급권 재분배 이후, 농지 도급권은 같은 농가 내에서 형제간 분가(分家)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변경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촌집체경제조직(村集體經濟組織)은 증가한 인구 또는 감소한 인구에 대해 신규 도급농지 배분이나 도급농지 회수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1982년 이후에 이주한 신규 이민자는 더 이상 농지를 배분받을 자격이 없었다. 룽안촌에서 농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신규 이민자들은 다른 농가의 농지를 임차하거나 농지도급권을 임차할 수밖에 없었다. 광잉촌에서 거주하는 SDG의 이야기는 1982년 농지도급의 영향을 보다 직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81년도 미얀마 남캄(Namkham)5)에서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이듬해부터 마을에서 땅을 나누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나는 농경지과 산림지를 얻었죠. 만약 1년 늦게 돌아왔다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운이 좋아서 땅을 많이 얻었죠. 그 당시에는 원하는 땅을 말하면 마을에서 땅을 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절대 그럴 수 없죠. 당시 배분받은 땅 옆에 황무지가 있어서 조금만 더 가져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마을에서 허락해서 결국 우리 일가는 30무가 넘는 땅을 갖게 되는 것죠.”

    

1982년 도급농지 배정 이후 이주한 신규 이민자들 사이에서 농지 임대차 문제를 둘러싼 토지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현재 정부는 농가도급제 시행 이후 배정된 도급농지는 정당한 사유 없이 변경할 수 없으며, 신규 이민자에게 임대차나 도급권이 양도된 농지는 이민자 본인이 경작 사실을 확인받으면 법적인 보호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도급농지를 배정받은 농가와 임대차로 경작하는 신규 이민자의 농지 경작권(사용권)은 모두 보호되고 있다.

      

룽안촌의 가장 최근 경계 변경은 2015년에 이루어졌다. 당시 마을 중앙에 있는 못()을 농촌 관광명소로 개발하기 위한 사업이 유치되었고, 이에 따라 외부 지원을 받았다. 이 못의 명칭도 달호수(月亮湖)로 바뀌었다. 이 농촌 관광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못 주변에 있는 징포족 농가의 집터가 징수되고 철거되었다. 철거된 징포족 농가는 나중에 한족 촌민 소조 및 마이워촌의 정주 단지 근처에 신규 개발된 부지에 재정착했다. 동시에 일부 경작지도 징수되어 관광 개발을 위한 건설용 토지로 전용되었다.




리페이 _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1) 왕위에핑·장정아·안치영·녜빈 지음, 2022, 국경 마을에서 본 국가인터북스.

2) 역주: 마이워와 광잉은 현지 징포족 주민들이 사용하는 징포어에 따라 음역한 지명이다. 공식 행정 구획상의 명칭인 모워(墨窩)와 광윈(廣允) 또한 음역한 지명이지만, 실제 발음과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현지 발음에 더 가까운 음역을 채택한다.

3) 역주: 룽촨현에서 가장 중요한 강으로, 룽안 평야를 포함한 룽촨 충적 평야 지대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강이다. 룽안촌 관내의 국경 강인 난와강(南漥河)은 이 강의 지류이다. 이 강은 이라와디(Irawadi) 강 수계에 속하며, 중국-미얀마 국경의 제55호 경계비 인근에서 루이리강(瑞麗江)과 합류한다.

4) 역주: 윈난 방언에서는 기후, 지형, 토양 비옥도 등의 측면에서 한 지역의 자연조건이 우수한 것을 통틀어 하오짜이(好在)”라고 표현한다. 이글은 국어에서 이와 가장 가까운 표현인 살기 좋다로 번역했지만, ‘하오짜이에 내재된 고향마을에 대한 애착 등 감정적 요소를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5) 역주: 남캄은 또한 미얀마 북부 국경 지역에 위치하여, 루이리강을 국경으로 루이리시와 마주보고 있다. 과거 윈난 차마(茶馬)무역의 중요한 거점이었지만, 청말(淸末) 영국 식민당국에 의해 점령당한 이 지역은 1960년 중국-미얀마 국경 조약에서 미얀마의 국토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