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 M. Chu 감독의 영화 Crazy Rich Asians (2018) 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싱가폴 최대 갑부 집안의
아들과 미국에 거주하는 서민 출신 이민자 가족의 딸 사이의 러브스토리를 그린 이 영화에는 정말로 “미치게” 부유한 아시아인들이 많이 나온다. 여기서 이 영화의 작품성이나 흥행
정도를 논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다만 이 영화가 상징하는 “떠오르는
부유한 아시아” 현상에 국제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을 뿐이다. 다시 말해 헐리우드의 감독은 Crazy
Rich South Americans나 Crazy Rich Europeans같은 영화를 만들지 않았고 Crazy Rich Asians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앞의 제목은 아직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해서일 것이고, 뒤의 것은 아마도 신선감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미비아에서 현지 조사를 하는 동안 필자는 영화에서 나왔던 정도의 부를 이룬 사람들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그런 인물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으니), 경제적으로 편안한
삶을 사는 아시아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사진 1. Jon M. Chu 감독의 영화 Crazy Rich Asians (2018) 공식 포스터
아프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 불교 교육 자선 단체로서, 나미비아의 센터는 연중 많은 외부 손님을 맞는다. 여기서 외부 손님이란 나미비아 밖에서 방문하는 외국 국적자로 제한하기로 한다.1) 펜데믹 기간 중에 중단되었던 이 손님 맞이가 2024년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재개 되었다. 이 손님들은 대부분 “중화권” 출신들인데, 여기서 말하는 “중화권”이란 타이완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화교 그룹을 말한다. 중국 대륙에서 직접 나미비아로 방문하는 손님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2) 센터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따라서 타이완이나 동남아시아의 나라에서 (주로 싱가폴과 말레이시아 등 화교 사회가 상대적으로 튼튼한 국가들) 직간접적으로 센터를 돕고 있거나, 센터가 아시아 지역에서 행하는 각종 모금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거나, 혹은 그들의 지인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방문하기보다, 그룹을 지어 (20~30명씩) 오는데 이렇게 한 그룹이 센터를 방문하면 센터의 아이들과 스태프들은 손님맞이로 정신없는 한 주를 보내게 된다.
사진 2. 싱가폴 손님들을 태운 버스가 센터의 정문을 통과하는 장면.
스태프과
아이들이 환영하고 있다. (나미비아2024년 5월)
간혹 북미지역이나 그 밖의 지역에서
소수의 손님들이 방문하기도 하는데 이들도 대부분 중화권에서 이주해 현지의 나라에 정착한 중국계 이주민과 그들의 후손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미비아의 센터에서 현지 조사를 하며 이렇게 오고 가는 많은 손님들을 보고 있으면 이 손님들을 한 번에 아우를
수 있는 공통 개념 하나를 떠올려 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결국 이 손님들, 혹은 더 정확하게 이들이 대표하는 그룹의 사람들, 그들의 탄탄한
경제력과 종교적 열정 혹은 헌신 등에 의해 지난 20년간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 7개의 학교가 지어진 것이고, 불교,
유교, 중국어가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소개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우선 머리속에 떠오르는 개념은 센터의 창시자인 Huili(慧禮)스님이다. 다시 말해 스님을 알거나 그의 불교적 행보에3) 동참해온 사람들의 그룹으로 이들을 묶어 볼 수 있겠다. 타이완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오는 손님들은 스님의 오래된 후원자들이며 센터가 말라위에 첫 학교를 세운 2004년부터 센터의 발전을 지켜보고 지지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북미 쪽에서 오는 손님들은 스님과의 개인적 인연이 미미한 경우가 많고 센터와 오래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스님을 공통 분모로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어 보인다. 이 손님들은 또한 지리적으로 방대한 지역, 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 지리적 (예를 들어 아시아) 라고 묶기에도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지역과 인맥을 넘어선 더 큰 카테고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내어 열거해 보는 작업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 방문자들은 중국어(만다린을 비롯 호켄, 광둥지역 방언들을 포함하여)를 주요 언어로 구사하며, 불교 신자이거나 적어도 불교 친화적이며
동아시아 전통 문화사상에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이들은 대부분 중장년의 나이대로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나라에서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센터를 위해 상당한 금액의 기부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 사람들임을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이 손님들을 “불교 친화적인 부유한 화교들” 이라고 명명하는 건 어떨까. 이 명칭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묘사에만 치우쳐 있다 보니 분석의 틀로 사용 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이쯤에서 몇 년 전 Fenggang Yang (2018)이 제창한 Global East 라는 개념을 고찰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먼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학계에서는 이미 Global North와Global South 라는 두 대립 되는 개념 틀로 “발전한 국가들”과 “발전중 (혹은 저발전) 국가들”을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이 통용되어 왔다. Global South는 “제3세계” 나 “주변부”등의 용어를 대체하면서 사용 되기 시작한 개념으로 식민주의, 탈식민주의, 국제적 힘의 불평등의 역사성과 정치성을 수반하는, 의미가 묵직하게 중첩된 용어이다.4) “북”과 “남”은 북반구와 남반구의 나라들이 대체적으로 보이는 사회경제 정치적 발전 정도를 구분하는 지표로, 예를 들어 북반구에 발전한 나라들(북미와 유럽 중심)이 대부분 포함되고, 남반구에 발전중 (혹은 저발전)에 있는 나라(아프리카나 남미중심)들이 많이 있다는 거친 구분법이다. 이 개념은 오세아니아 지역(남반구) 혹은 아시아의 발전중인 지역 (북반구)을 제대로 포섭하지 못하는 약점이 처음부터 내재 되어 있었다. 이 개념은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라도 하는 듯, 그 후로 지역에 국한된 지역 개념의 용어라기 보다는 “부유한 국가-자원을 가져다 쓰는 국가-국제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가진 국가” 대 “가난한 국가-자원을 제공하는 국가-국제 정치경제적으로 주도권을 가지지 못한 국가” 등의 인식적 카테고리로 더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는 듯 하다. 다시 말해 “북”과 “남”의 지리적 구분보다는 국제 사회에서의 힘의 불균형을 지칭하는 쪽으로 무게가 실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틀을 “북” 과 “남”이라는 말이 근본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지리적 편파성이나 내재된 북미 서구 중심적 입장을 완전히 지우고 “중립적”인 개념의 카테고리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미비아를 방문하는 화교 손님들과 그들이 매년 보내는 기부금을 기존의 카테고리인 부유한Global North 에서 가난한 Global South로의 물자, 돈, 사람의 흐름으로 이해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미비아가 “가난한 남(South)”에 속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센터에서 현지조사를 하며 만난 화교 지지자들을 “부유한 북(North)”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들이 부를 쌓아온 과정과 문화, 사회, 종교를 발전시켜온 과정이 서구의 그것과 너무나 다르다. Yang (2018)이 제기한 Global East는 이 지점에서 시사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Yang 은 Global East 를 우선 사회 문화적 개념이라 못박고 (지리적 개념이 아닌), 이 개념이 (1)동아시아 사회들과 (2)전세계에서 동아시아의 문화 전통을 보존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동아시아 민족 커뮤니티들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Yang 은 이 개념을 글로벌 동아시아의 종교 연구를 하는데 필요한 개념으로 발전시켰는데, 동아시아 국가들의 종교적 정체성과 그 정체성의 형성 과정이 서구의 단일신 중심의 종교 정체성의 발전 과정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지적하고 있다.
비단 종교적 정체성의 발전 차원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전 방면에 있어서 동아시아가 세계 무대에서 부각을 나타내고 있는 방식과 과정은 서구의 그것과 다르다. 동아시아
특수성에 대한 논의는 다케우치 요시미등이 주창하고 그를 연구한 후세 학자에 의해 “Asia as Method” 라는 이름 하에 진행되어 왔다.5) Yang의 Global East 도 큰 틀에서 이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라는 주제에 수렴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학자들의 논의는 현재
나미비아에서 혹은 남부 아프리카에서 필자가 관찰하고 있는 불교 자선 단체의 활동에-다시 말해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이라는 광범위한 주제에-새로운 분석적 틀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반대방향으로 필자가
경험하고 있는 현재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일련의 사건들이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프로젝트에 새로운 화두와 영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은 서구가 1세기 전에 아프리카 대륙에 행했던 식민지 약탈과 자주 비교 혹은 대조되곤 한다. 중국위협론이라든지 중국책임론 등은 모두 이 비교/대조의 맥락에서
발전되고 진화한 담론들이다. 이런 담론들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이런 담론들이 생성되는 바탕인 비교/대조의 기준은 늘 언제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서구였음을 지적하고 싶다. Crazy Rich Asians 는 떠오르는 부유한 아시아라는 새로운 국제적 공감을 집어내는 영화였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새로움”을
주었던 이유는 이 새로움을 가능하게 하는 “항상성”—부유하고
힘이 있는 서구—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큰 규모의 기부 행사를 진행한다. (나미비아 2024년 5월)
(소년의 얼굴은 초상권 보호를 위해 특수 처리)
조영진 _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교 박사후연구원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1) 나미비아인들도 센터를 방문하지만 그들의
방문 목적과 활동은 외국에서 온 손님들과 상당히 다르다. 대략적으로 나미비아인들의 방문은 정부 기관들의
관리직을 맡은 사람들이 (예를 들어, 교육부나 한국으로 치면
여성가족부에 해당하는 부서 등) 시찰의 목적으로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2) 이것은 중국 대륙으로부터 개인 차원에서 들어오는 기부금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미비아 내의 중국 기업들의 센터에 대한 물품 기부는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3) Huili스님은 인간불교 (人間佛教)라 불리는 불교 교단/운동의 대표적 사찰인 Foguanshan (佛光山) 출신이다. 하지만 현재 센터는 Foguanshan교단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간 불교의 뿌리는 중국의 불교 개혁가Taixu (太虛, 1980-1947) 스님으로 올라가지만, 인간 불교의 꽃은 타이완으로 이주한 Taixu의제자들에 의해20세기 타이완에서 본격적으로 꽃을 피었다고 봐야 한다. 타이완에는 Foguanshan과 더불어, Fagushan (法鼓山), Tzu chi (慈濟) 등 국제적으로 활약을 하는 인간불교 단체들이 있고, 이 단체/교단들은 불교가 인간의 이생의 삶을 돕는 데 강하게 관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Huili 스님이 아프리카에 와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짓는 것도 결국 인간불교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타이완에서의 인간 불교의 발전에 대해 더 참고할 만한 문헌으로는 Pacey (2005) 와Schak and Hsiao (2005) 등이 있다.
4) 안토니오 그람시의 저서 The Southern Question (2005) 에서 그람시는 “Southern” 이 무엇인이 질문을 던졌고, 그 후 인문사회학의 저술에서
“South”는 지리적 위치를 말하는 단순 지시어를 넘어서게 되었다.
5) 이 논의는 한국에도 이미 번역된 쑨거 (孫歌)의 여러 저서들을 참고할 수 있다. 또한 Kuan-Hsing Chen(2010) 도 그의 저서에서 본격적으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논하고 있다.
**참고문헌
Chen,
Kuan-Hsing. 2010. Asia as Method: Toward Deimperialization.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Pacey, Scott. 2005. “A
Buddhism for the Human World: Interpretations of Renjian Fojiao in
Contemporary Taiwan.” Asian Studies Review 29:61–77.
Schak, David, and
Hsin-Huang Michael Hsiao. 2005. “Taiwan’s Socially Engaged Buddhist Groups.” China
Perspectives 59:43–55.
Yang, Fenggang. 2018. “Religion in
the Global East: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for the Social Scientific Study
of Religion.” Religions 9:305.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모두 필자가 직접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