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후 북한지역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국가적 기능을 행사했다. 이 위원회가 북한 거주 화교에 대해 어떤 정책을 폈는지 살펴보기 위해 1946년 3월 북한에서 진행된 토지개혁과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을 위한 헌법 제정 과정에서 화교 관련 규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은 1946년 3월 8일 조선인 및 외국인 지주가 소유하는 토지를 몰수하여 소규모 자작농과 소작농에게 분배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북한지역은 해방 이전부터 다수의 화교 농민들이 존재했고 그 대다수는 조선인 및 일본인의 토지를 소작하여 채소농사를 지었다. 일부 화교농민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했다. 화교 농민 경작지 관련 규정은 ‘토지개혁법령에 관한 세칙’(이하 ‘세칙’)에서 볼 수 있다.
사진 1 평안남도 강동군 화교학교 개교 기념사진(1949.4)
이 ‘세칙’은 1946년 3월 8일 공포되었다. 동 세칙 제2장 제8조에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즉 “외국인 토지는 조선인 토지소유자와 똑 같은 토지법령에 근거하여 시행된다.” 또한 제2장 제10조에 “조선에 입적(入籍)하지 않고 주로 도시 부근서 야채재배 하는 외국인의 소작지는 몰수하여 인민위원회의 재원에 편입한다. 인민위원회는 계약을 통해 원 소작인에게 경작권을 공여한다”로 되어 있다. 이 ‘세칙’의 제2장 제8조에서 언급된 ‘토지’는 외국인이 소유한 토지를 말하며, 제2장 제10조에서는 외국인이 소작하고 있는 토지를 말한다. 두 규정에 따르면, 해방직후 화교 경작 토지는 소유나 소작과 관계없이 모두 정부에 반납해야 했고 다만 화교 농민 소작지의 경작권만 인정했다는 것이다.
해방직후 북한 거주 화교는 약 4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45%는 야채재배를 하는 화교농민(화농)이었다. 1950년대 중반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화교연합회(朝鮮華僑聯合会)자료에 의하면 한국전쟁 직후 북한에 남은 화교 도망지주(逃亡地主, 화교 지주로서 토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피신한 사람을 말함)는 25명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해방초기 화교 소유 토지는 거의 대부분 몰수된 것이 분명하다. 화교가 경작하는 토지는 비록 모두 정부가 관리하였지만 화농은 야채재배를 계속 할 수 있었다. 한편, 화교의 농지 경영 방식은 전대(転貸), 자작, 일당제 고용의 세 가지 형태가 있었으며 이러한 방식은 1947년 초까지 지속 되었다.
사진 2 1920년대 화농이 만든 화교학교
1947년 봄 중공중앙동북국주북조선판사처(中共中央東北局駐北朝鮮弁事処)와 화교연합회의 협력 하에 북한화교의 토지분배가 실시되었다. 주북조선판사처의 책임자인 주리즈(朱理治)는 1947년 6월 27일 보고서에서 신의주, 평양, 진남포 3개 지역의 토지분배에 협력했다고 적었다. 즉, 화교에 대한 토지분배는 이 3개 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토지분배의 결과, 화교 6,260호에 970만평의 농지가 분양되었다. 전 주조선청진영사관 총영사 왕용꾸이(王永貴)에 따르면 토지는 기본적으로 농사를 짓겠다고 신청한 화교에게 무상으로 분배되었기 때문에 행상이나 소매업에 종사하던 일부 화상 가운데 농업으로 전직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야채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상점까지 다시 등장했다.
그러면 북한임시인민정부의 화교에 관한 입장은 어떠했는지 1948년 9월 8일 개최된 북한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채택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의 내용을 참고로 살펴보자. ‘헌법 승인과 그 실시에 관한 결정’ 제31조는 북한 거주 외국인의 권리에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권을 가진 소수민족은 조선 공민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그들은 자기 모국어를 사용할 자유를 가지며 자기의 민족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1947년 당시 북한 거주 외국인은 4만 1,825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97.7%에 해당하는 4만 863명은 화교였다. 따라서 헌법이 규정한 ‘소수민족’이란 화교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1948년 4월 28일 개최된 북조선인민회의특별회의에서 김두봉(金枓奉) 의장은 제31조의 결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만약 우리가 소수민족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지 않는다면 외국에 가 거주하는 우리민족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말씀을 올리면 현재 만주에는 우리 동포가 백여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헌법이 국내의 소수민족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동포의 권리에 대하여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공민권을 가진 소수민족에게 조선인민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정의이며 또한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1948년 9월 8일 개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차 대회에서 대의원 이극로(李克魯)는 “한 민족의 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 없이 여러 만년 역사 있게 여러 천 년을 두고 이루어진 결정체 입니다. …이 언어정책은 곧 문화정책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 식민지통치자의 악독한 정치는 우리가 다 같이 체험한바 우리민족에게 국어의 사용을 억압하였습니다. 놈들은 지금도 일본 안에서 거기에 있는 조선민족에게 조선인학교에서 조선어를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 제국주의가 조종하는 반동 매국적인 남조선 국회가 어떻게 올바른 언어정책을 염두에나 두고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은 민족적 평등 원칙에 서서 올바른 언어정책을 완전히 표시하였습니다” 라고 발언했다.
김두봉과 이극로의 발언이 말해주는 것처럼 해방직후 북한임시정부는 해외에 거주하는 조선동포의 권리의 획득,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대한 비판, 그리고 한국의 헌법보다 더욱 우월하다는 것 등의 여러 요인에서 북한화교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책을 실시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북한화교와 한반도 2】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