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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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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 정권의 멸망과 끝나지 않은 이야기 _ 김봉준
정성공 동상.jpg
사진 1. 정성공 동상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은 복건과 대만에서 세력을 세워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이끈 남명(南明)의 무장이자 현재는 대만의 유일한 민족영웅으로 추앙받는 역사적 인물이다. 한때 정성공의 위세는 대단해서 남명의 융무제(隆武帝)는 정성공에게 황실의 성인 주()성을 하사했으며, 이 때문에 정성공은 국성야(國姓爺)로 불리기도 했다. 남명(南明) 영력제(永曆帝) 시기에는 연평왕(延平王)으로 봉해져 남명의 마지막 희망으로 존재했으며, 복건 일대를 공략하여 적지 않은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1661, 청나라 군대의 압박으로 본토에서 세력을 유지하기 힘들게 되자 정성공은 대만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고자 직접 25천 명의 병사와 병선 수십 척을 이끌고 대남(臺南)에 있는 네덜란드 세력을 공략하여 이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대남(臺南)에 근거지를 둔 지 반년도 안된 1662년에 갑자기 사망하고 만다.

   

정성공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과 손자인 정경(鄭經)과 정극상(鄭克塽)이 정권을 이어받았으나 결국 청나라에 의해 몰락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의 기록에는 시랑(施琅)이 대만을 공격하여 정성공 일가를 멸문시켰다고 하지만, 실제 정성공의 일가는 미약하게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정 씨 정권에 의탁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만 섬을 떠나 각지로 흩어졌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의 제주도에도 도달했다고 전해진다. 아래는 현종실록에 있는 정 씨 정권의 유민에 관한 기록으로, 현종 11(1670) 5월에 표류하다 제주도에 이른 유민들로부터 청취한 사정을 담고 있다.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비밀리 치계하기를, 525일 표류한 한인(漢人) 심삼(沈三곽십(郭十채룡(蔡龍양인(楊仁) 등 머리를 깎은 자 22명과 머리를 깎지 않은 자 43명이 왔습니다. (이들은) 중국옷을 입거나 혹은 오랑캐 옷, 혹은 왜인 옷을 입고 있었는데, 정의현(旌義縣)1) 경내에 도착했으나 타고 온 배는 파손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본래 자신들은 명나라 광동(廣東복건(福建절강(浙江) 등지의 사람들로 청인이 남경(南京)을 차지한 후, 광동 등 여러 성()이 청나라에 항복하였으므로 바다 밖 향산도(香山島)에 도망쳐 나와 장사하면서 살아왔습니다. 51일 향산도에서 배를 출발시켜 일본의 장기(長崎)로 향해 가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라고 합니다. 향산도란 지금 어느 성()에 속하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향오(香澳)은 광동의 바다 밖 큰 산인데 청려국(靑黎國)에 인접하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스리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본래 남만(南蠻)의 땅으로 남만 사람 갑필단(甲必丹)2)이 다스렸습니다. 그 뒤 점점 약해져 명나라 유민들이 많이 들어가 살았는데, 대번국(大樊國)3)에서 유격(遊擊) 가귀(柯貴)를 보내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대번국은 융무(隆武) 때에 정성공(鄭成功)이라는 자에게 나라의 성씨를 하사하고 진국 대장군(鎭國大將軍)에 봉하여 청나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여러 번 물리쳤습니다. 얼마 안 되어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정금사(鄭錦舍)가 이어받아 인덕 장군(仁德將軍)에 봉해졌으며, 대번국에 도망해 들어갔는데, 그 무리가 수십만 명이 있었습니다. 그 땅은 복건성(福建省) 바다 밖 천여 리에 있는 곳으로 영력군(永曆君) 때에는 귀주(貴州)의 옛 촉() 땅에 속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나라로 장사를 다니고 있었으므로, 머리를 깎기도 하고 혹은 깎지 않기도 합니다. (우리는) 장기(나가사키)로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므로, 신이 배를 준비시켜 돌려보냈습니다." 4)

  

위의 기록에서 유민들이 언급하고 있는 대번국은 대만을 말하며, 정금사(鄭錦舍)는 정성공의 아들인 정경(鄭經)을 말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 정 씨 정권은 정경 시기부터 세력이 약해져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정 씨 정권의 사람들이 대번국으로 도망갔다는 것은 정성공 사후 정씨 정권이 복건 지역의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한 것을 의미하며, 정극상(鄭克塽)이 청에 투항하면서 정씨 정권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정극상의 투항 이후 정 씨 정권의 남은 무리는 대만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남은 무리도 나가사키 등 주변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정성공이 세운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정씨 일가는 어떻게 됐을까? 정권이 무너지기 직전 정 씨 정권의 후계자인 정경은 청에 투항했기에 일가는 대대로 청의 관직을 받으면서 살았다. 강희 22년의 기록을 보면 정 씨 일가는 청 조정으로부터 3·4품에 해당하는 품위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정총(鄭聰), 정명(鄭明)과 같은 정씨 일가의 후예들은 계속 대를 이어 복건에서 지냈으나, 일가인 정지(鄭智)와 정유(鄭柔)가 바다에서 실종되고 그의 아들인 정발(鄭發)마저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이후 강희제는 정씨 일가의 후예를 복건에서 북경으로 옮겨 살게 했으며, 심지어 팔기(八旗) 정황기(正黃旗)와 정홍기(正紅旗)에 편입시켜 주기도 했다. 그리고 나머지 정씨 일가는 각각 흩어졌으며, 일부는 대만에 남았지만, 나머지 일가는 중국 본토나 일본에도 건너가서 살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 씨 정권의 멸망하고 대만이 청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대만에 남아있는 정성공의 흔적을 지우는 일은 청나라의 새로운 과제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1699년에 강희제는, “주성공(朱成功, 정성공을 말한다)은 명 황실의 유신(遺臣)으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아니다. 관원을 보내서 성공과 그 아들 정경의 관을 남안(南安)으로 이장하라. 그리고 무덤을 지키는 사람을 두고 사당을 지어주도록 하라는 명을 내려, 정성공의 묘를 복건으로 이장시켰다.5) 그래서 대만(현재의 대만(臺灣) 대남시(臺南市) 영강구(永康區))에 있던 정성공과 정경의 묘는 현재 복건(현재의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 남안시(南安市))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당시 강희제는 정성공의 묘를 그대로 대만에 둔다면 반청복명의 반란 세력의 구심점이나 상징이 되는 상황을 우려했으며, 이에 정성공의 묘를 본토로 옮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복건에 있는 정성공의 묘.jpg 대남에 있는 정성공 묘지터 기념비.jpg

                  사진 2-1. 복건에 있는 정성공의 묘                     사진 2-2. 대남에 있는 정성공 묘지터 기념비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간 정 씨 정권의 후예들은 정 씨 성을 계속 쓰면서 살고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 아래서는 중국어 통역과 한문학에 종사하면서 일본의 중국통이 되었다. 일본에 있는 정 씨 일가의 후손은 우연히 조선에서 다시 존재를 드러낸다.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했던 1894, 나가사키 출신인 정영방(鄭永邦, 일본 이름은 테이 에이호)은 스스로 정성공의 후예임을 자처한 인물로 중국어에 능했다고 한다. 정영방은 주 청국(淸國) 일본 공사를 지낸 정영녕(鄭永寧)의 아들이자 주 천진(天津) 일본 영사 정영창(鄭永昌)의 동생으로, 동학교도의 진압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의 외교관 자격으로 조선에서 원세개와의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으로 일본이 조선 출병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는 평가가 있는 만큼 회담에서 정영방의 역할은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과 적대하고 있던 청나라에서도 정성공의 후예가 활약하고 있었다. 복건 천주 출신인 정초영(鄭超英)은 당시 청나라 해군 소속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청불전쟁에도 참전하기도 했으며, 대만의 근대화 작업에도 힘을 쏟았던 인물이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는 것으로 결정되었을 때, 황급히 대만을 떠난 관원들과는 달리 할양에 반대하면서 일본에 대한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초영은 민주국 군대를 지휘하면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결국 18951022, 옛 정성공이 터를 잡았던 대남을 지키던 도중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사하고 만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정영방 등과 같은 나가사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영녕, 정영방 일가는 정 씨 정권의 방계였으며, 이들과 달리 정초영는 정성공의 직계 후손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렇듯 정성공의 후예들은 동아시아 근대사의 격변 속에서 서로 다른 운명을 살았다.

     

지금도 정성공의 후예들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후손 가운데 정수양(鄭守讓)과 같은 이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에서 살았으며, 일본에 유학하여 어류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대만 광복 이후에는 국민당에 협력하기도 했으며, 연어 연구에 매진하여 대만 연어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또 정문도(鄭文韜) 같은 이는 시인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지금도 동아시아의 각지에는 정성공의 후예들이 계속 살아가고 있다.


1895년 을미지역-min.jpg

사진 3. 1895년, 을미지역(乙未之役)



김봉준 _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참고문헌

1) 제주도 서귀포시 동부에 있었던 현이다.

218세기 대항해시대 이후부터 유럽 각국의 해외 진출이 활성화되고 해상무역 또한 발전하였다. 네덜란드 역시 해상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동남아를 비롯해 대만에서도 대남에 거점을 두고 일대에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가 식민지를 통치할 때, 현지 사회와의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현지인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 직책을 갑필단(甲必丹)이라고 불렀으며, 네덜란드 당국과 현지인과의 중재자와 세금 징수인 역할을 해왔다.

3) 정성공의 동녕(東寧) 정권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조선 현종실록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4) 현종실록 18, 현종 11711일 을축 4번째 기사(일부 수정). https://sillok.history.go.kr/id/kra_11107011_004

5) 建國紀」, 臺灣通史』 2.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필자 제공

사진 2-1. 百度百科, https://baike.baidu.hk/item/鄭成功墓/1185030

사진 2-2. 臺南旅遊網, https://www.twtainan.net/zh-tw

사진 3. Museum of Fine Arts Boston, https://collections.mfa.org, Migita Toshihide - The Imperial Guard Defeats the Enemy in Hard Fighting at Jilong on the Island of Taiwan(Meiji Period, dated 1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