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의 말레카 (Malecca 혹은 Maleka) 라는 역사 도시에는 동남아시아 화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문화 교육 기관이 있다. 말레이시아한학원 (Malaysia Han Studies, 혹은 줄여서 Mahans “마한” 이라 불린다)1 은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는 목표로 다양한 그룹에게 평생 교육 과정을 제공한다.
마한은 유치원생부터 청소년,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여러 가지 장단기 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이는 중화문화권이 이루어 낸 문화, 철학, 종교적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동남아 화교 사회 (적어도 말레이시아 화교 사회의) 자부심과 절박함이 동시에 담겨 있는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공자학원 (Confucius Institute)을 들어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마한이 추진하는 프로그램과
목적이 언뜻 ‘중화 문화의 가치 부상과 전파’라는 점에서
공자학원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두 기관은 결정적으로 다른 데, 공자학원이 중국 정부가 직접 관여하고 추진하는 국가 전략적 대외 문화 교육 프로그램이라면, 마한은 동남아시아 화교 사회가 오랜 기간의 자발적 모금과 정치 사회적 압박 속에서 이룩해 낸 민간의 성과라는
점이다.
나미비아에 있는 불교 자선 단체에서 현지 조사를 하고 있는 필자가 말레이시아 한학원을 이야기 하는 것이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 있겠다. 사실 2022년 11월 나미비아 현지 스텝 두 명과 함께 마한의 합숙훈련에 참석하기 위해 말레카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당시의 여정을 회고해보는 현재의 시점에서도 이 ‘뜬금없음’은 어느정도 지속되고 있다. 다소 편집증적인 접근일 수 있겠지만, 이 ‘뜬금없음’의 저변을 조금만 더 들어가 보겠다.
처음 나미비아에 도착해서 현지 조사를 시작할 당시, 나는 이 조사가
잘 진행되면 이 불교 단체가 센터를 세운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을 방문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이라는 글로벌 현상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 단체의 반경 안에 있는 아프리카 나라들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면 되겠다는 그림을 그렸다. 이런 의미에서 동남아시아는 지역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내 연구의 범위에 애초에 들어있지 않았다. 2022년 마다가스카르 센터를 3개월간 방문하고 나미비아로 복귀했을
때 같은 해 11월 총 10명의 아프리카 각 센터에서 선발된
현지 직원들이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3주간 교육을 받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미비아도 두 명의 현지 직원을 보내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무작정 나미비아 직원을 따라 말레이시아로 나서기로 했다. (물론 사전에 센터의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동행한 말레이시아 여정을 시작으로 2023년에 동행한 다른 동남아시아 일정을 통해 나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글로벌 차이나의 범주와 깊이를 재정의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위에서 언급한 말레이시아라는 ‘뜬금없음’은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진출을 연구하는 데 연관이 있는 당연한 현상으로 봐야 했고, 글로벌 차이나는 한 정치 집단의, 혹은 한 국가의 의도된 노력만으로 어느 날 아침에 발생한 현상이 아님에 점점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마한을 중심으로, 그리고 2022년 마한에 파견된 10명의 아프리카 현지 직원의 여정을 민족지적인
관점으로 기술하며 동남아 화교 사회가 지속적으로 지키고 전파하고자 하는 중화 문화의 가치와 21세기
글로벌 차이나 현상을 함께 이해해 보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
마한이 말레카에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오픈한 것은 2016년의 일이다. (그 전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존재했었다.) 2019년부터 마한이 야심 차게 시작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Dizigui 6일 합숙 과정이 있다. 중국어가 능숙하지 못한 화교 가정의 신세대들이나 혹은 외국인에게 중화 문화권의 도덕과 예절을 전파하기 위해 만든 영어로 이루어진 수업이다.
마한은 유교의 도덕예절 학습서인 Dizigui (弟子規)2 를 주요 교재로 삼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접목시켜 6일간의 특별 교육 과정을 만들었다. 2019년 이 후, 펜데믹으로 3년간
중단되었던 이 프로그램이 2022년 재개되었고, 내가 속한
10명의 ‘아프리카’ 그룹은
다른 참가자 50여명과 함께 이 특별반 합숙 훈련에 들어갔다. 특별반의
수강료는 무료이지만, 수업 참가자는 가사와 직장의 의무에서6일이라는
시간을 통으로 덜어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대부분의 수강자는 말레이시아를 포함 주변의 국가에서 온
화교 직장인 그룹이었다.
개강 첫 날, 그룹이 배정되었고, Dizigui의 내용이 영어로 번역된 책자가 배포되었다. 하루 일과는 아침 기상과 산책을 시작으로 아침식사, 오전 강의, 오후 강의, 저녁 조별 토론으로 밤 10시나 11시까지 일정이 이어졌다. 강의 뿐만 아니라, 조별 시간에는 드라마를 준비하거나 포스트를 만드는 등 다른 활동이 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정신없는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복장과 걸음걸이도 수업과정 중의 하나로, 소매가 없거나 짧은 반바지는 허용되지 않았다. 뛰는 것도 큰 소리로 웃는 것도 삼가해야 했고, 수업이 시작함과 동시에 핸드폰을 보관함에 두었고, 수업이 끝날 때야 가져갈 수 있었다. 식사 전에는 함께 암송하는 예절 구절이 있었고, 음식은 모두 채식이었다.
사진 1. 마한에서 수업을 받던 강당의 풍경
아프리카에서 온 직원은 내가 속한 조직의 4개 국가(말라위, 에스와티니, 레소토, 나미비아)의 센터에서 온 그룹이었는데, 한 국가당 2명씩, 총 5개 센터에서 10명이 왔다 (참고로 말라위에는 두 개의 센터가 있다). 대부분은 각자의 센터에서 교사나 행정직을 맡고 있었고, 우리의 여정은 마한에서의 수업을 포함해 앞뒤로 거의 3주 동안 진행됐다.
마한에서의 수업 자체는 6일이었지만, 센터의 특별한 요청으로 6일 교육과정이 끝난 후, 마한은 다시 3일 동안 아프리카 그룹만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 과정을 열었다. 수업일 수를 제외한 전과 후의 일주일 정도의 시간은 투어와 쇼핑에 할당되었다. 아프리카 그룹의 대부분은 처음으로 항공기를 타보고, 처음으로 국제 공항을 경험했다고 이 여행에 대한 소감을 말했다.
사진 2. 사진 3. 마한에서의 수업은 책으로만 진행하지 않았다. 청소를 하는 법
이불을 반듯하게 개는 법도 시범을 보고 따라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수업의 내용은 유교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익숙한 내용들이었다. 충효, 우애, 믿음, 박애, 절제 등등, 7장으로 재편된 교재는 매일매일 참가자들이 포커스를 맞춰야 하는 주제를 알려 주었고, 오전과 오후 강의, 그리고 조별 토론으로 이루어지는 하루의 일정 내내 이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때로는 두 가지) 이야기했다. 한국사람 입장에서 어린이 예절 교육을 위해 쓰여진 유교 책의 충효사상이 새로울 리가 만무했다.
나는 강의 내내 솔직히 Dizigui경전의 한자가 영어로 어떻게 번역되고 어떻게 해석되고 전달되는지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아프리카 그룹의 다른 멤버들도 강의가 새롭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말라위 출신 한 참가자는 조별 토론에서 충효 사상 (부모님과 나아가 어른을 존중하는 문화)는 말라위 전통 문화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말했다.
말라위의 전통에 따르면 길에서 어른을 만나면 젊은이는 반드시 그 어른 앞에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몇몇 젊은이들은 무릎을 꿇는 것이 귀찮아서 어른이 저 멀리 보이면 일부러 다른 길을 택해
멀리 돌아가기도 한다고 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그의 설명을 크게 웃고 넘겼지만, 이 말라위 직원의 말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개의 시사점이 있다.
첫째, 마한에서 가르치는 소위 중화 문화의 가치라는 것 (예를 들어 도덕 예절)이 중국 문화권에서 특화된 가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과 말라위 문화 사이의 다른 점이 있다면, 중국 문화권에서는 이 가치를 글로 남겨 다음 세대에 전달했고 (말라위는 구두로 전했다면), 후에 마한이라는 기관이 이것을 받아 영어로 번역하여 중국인 고유의 지식/실천 체계로 만들어 세계에 전파 중이라는 것이다. 말라위에서 구두로 전해진 도덕 예절은 쉽게 흩어졌기도 했겠지만, 후에 그것을 모아 정립할 여력이 있는 강력한 국가나 민간 조직이 전무했다는 점도 지적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Dizigui가 아프리카 그룹에 전하는 상당히 상식적인 도덕 예절 규율이 2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배워야하는 내용이 되어 가는 중이라는 것이다. (아프리카 그룹이 그렇다고 이 여정을 통해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여기서는 그들이 배운 것이 센터가 의도한 것과 같지 않다고 해 두겠다. 이 부분은 아래에서 더 설명하겠다.)
지식이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이 권력과 연동하여 한
사회를 지배하는 공고한 구조가 되어가는 과정은 이미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를 대표로 하는 여러 학자에 의해 논의되어 왔다. 나는
여기서 마한이 혹은 동남아시아 화교 사회가 어떻게 특정한 지식 체계를 전유하는 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입장을 통해—아프리카의 센터의 입장과 마한의 존재와 목적을 연결하여—두 번째 시사점을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아프리카의 센터는 이 마한에서의 Dizigui교육을 위해10명의 왕복 항공편과 숙식, 관광, 쇼핑, 투어가이드 비용을 포함하는 상당한 예산을 편성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이 예산은 싱가포르 불교 신도들의 후원으로 특별히 모금된 것이었다.) 센터는 타이완 스님이 시작한 국제 엔지오 단체로 아프리카에 불교 전파를 목적으로 기숙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조직이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가난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동시에 중국어와 중국 문화 (우슈 포함), 불교를 소개하고 가르친다. 센터가 아시아에서 모금하는 금액은 거의 전액 아프리카 아이들의 교육과 생활에 퍼부어진다고 보면 된다. 학교와 기숙사 건물을 짓는다든가, 아이들의 식비, 옷비, 문구류비, 책값, 교사들의 월급등의 모든 지출 항목은 모두 아이들의 교육과 생활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빠듯하게 책정된다.
이 센터를 창시하고 이끄는 Huili 스님의 뜻에 따라 자금과 물자는 이렇게 일괄적으로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로의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그리고 모든 재정과 활동의 중심에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있다. 자선 단체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이런 처사는 당연하고 심지어 바람직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예산은 빡빡하고, 절약은 늘 강조되는 덕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10명의 직원을 선별하여 저 멀리 말레이시아까지 3주간의 도덕 예절 훈련과 여가를 겸한 출장을 보내는 예산의 편성은 그동안 필자가 경험한 센터의 운영 관행에서 볼 때 상당히 예외적인 지출이었다.
아무리 싱가포르의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특별 모금을 했다 하더라도, 상당히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
여정은 2022년 한 해로 그쳤던 것이 아니라, 매년 연례행사처럼
이어지는 것으로 2023년에도 새로운 아프리카 그룹이 마한을 방문했었고, 2024년도 예외가 없는 한, 이 여정은 그대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 직원의 입장에서 볼 때, 매년 행해지는 말레이시아 일정은 일종의 보너스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무료 해외여행에 여행비도 넉넉하게 받아 쇼핑도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어느 조직이건 그 크기가 방대해지면 소위 체계적인 직원 교육이라는 것이 필요한 때가 온다. 마한의 교육과정은 이런 의미에서 몸집이 커져가는 센터가 용단을 내린 새로운 직원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인 것인데, 직원 교육의 초점이 리더십, 팀웍, 혹은 필요한 능력과 스킬을 배양하는 좀 더 실질적이고 직접적으로 업무와 관련이 있는 분야가 아니라, 도덕 예절에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센터의 지도부가 아프리카 현지 직원들을 대상으로
중국식 도덕 예절 교육에 투자를 시작했다는 점은 중국 문화 (예절, 도덕, 철학, 종교를 아우르는)의
가치와 그 우월성에 방점을 두었다는 점이고, 그 가치를 아프리카인을 통해 아프리카에 전파해 보겠다는
의지를 말해 준다.
사진 4. 마한에서의 합숙 기간 동안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공자의 초상화 앞에서 이렇게 의례를 표해야 했다.
마한에서의 일주일 남짓 기간의 합숙 훈련이 아프리카 직원들의 태도와 인생관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곳에서 만난 다른 참가자들이 매년 혹은 해를 건너 이 훈련을 찾는 것을 보면 도덕 예절 교육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재확인을 해야 비로소 몸에 익혀진다고 보는 것 같다. 아는 것도 다시 듣고 또 들으며 가능하면 죄다 외워버리는 전통적 접근법이랄까.
사실 Dizigui 어린이반은 한자 본문을 통째로 외우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몇몇 아프리카의 센터들도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Dizigui의 본문을 통째로 외우게 하기도 한다.) 마한으로의 파견 교육이 투자 대비 어떤 성과를 보여주고 있느냐는 현재 시점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질문인 것 같다. 도덕 예절 교육이라는 것이 가지는 특성도 있고, 성과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직원을 비행기에 태워 아시아로 보내는 행위 자체가 파급하는 결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아프리카 그룹의 멤버들은 큰 공항과 항공 여행에 가슴 벅차 했고, 말레이시아 여정을 소화하면서 중화문화가 제공하는 사회-문화-경제 인프라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마한이라는 기관이 제공하는 널찍하고 모던한 시설과 강의실, 에어컨과 사운드 시스템이 잘 구비된 강당, 그곳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프로그램의 짜임새와 진행 스킬, 그리고 우리가 묵었던 쿠알라룸푸르의 빌딩 숲에 있던 고층 숙소, 화려한 쇼핑몰과 식당가, 싱가포르에서 우리를 방문한 센터 지도부들이 보여주었던 (경제적) 여유로움은 잔잔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우리 그룹 안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센터가 마한 파견 교육을 통해 얻은 성과가 있다면, 아프리카 직원들의 도덕 예절의 진보라기 보다는, 그들이 직접적으로
보고 흡수한 중화 문화의 거대한 인프라와 그 인프라를 통해 아프리카 참가자들에게 재확인되고 각인되는 중화 문화의 ‘우월성’이 아닐까? 내용
자체보다는 내용이 전달되는 세련된 폼과 통로가 내용을 재긍정하는 효과 말이다.
조영진 _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교 박사후연구원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1) https://mahans.edu.my/cn/
2) Dizigui 는 청나라 초, 아이들의 예절 교육을 위해 쓰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세 글자씩 규율을 맞춘 운문의 형식을 리듬을 타며 암송하기 편하게 되어 있다. 이 책은 첫 장 ‘효(孝)’를 시작으로 우애, 신용, 인덕, 박애, 절제, 학문으로 이어지는 데 유교의 가치관을 담고 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모두 필자가 직접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