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지금 여기, 홍콩>이라는 제목으로 칼럼 연재를 시작하면서 썼던 첫 글이 “황색경제권의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였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여 희망찬 글로 2024년 칼럼의 문을 열고 싶었지만, 최근 홍콩의 선전 쇼핑 붐을 마주하면서 황색경제권에 대한 상상은 조금 더 희미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콩 내에서 자치적인 경제생태계를 구성하자는 황색경제권의 이상뿐만 아니라, 쇼핑의 천국으로 불리던 홍콩의 경제 상황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는 경제가 특정 지역에서만 작동하지 않는 글로벌한 구조적 요인과 맞물릴 수밖에 없는 현실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홍콩의 경제는 중국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에 따라 경기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도 고물가는 계속되고 있어 2023년 미국의 컨설팅 업체가 실시한 전 세계 생활비 조사 결과 홍콩은 여지없이 물가 순위 1위로 꼽혔다. 코로나19로 인해 4년 동안 동결되었던 최저임금이 2023년에 인상되긴 했지만, 겨우 2.5HKD(약 430원)가 오르면서 최소한의 생계유지도 어렵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용뿐만 아니라 별도의 노력이 요구되는 민주주의 옹호 기업의 자체 생산, 유통, 소비라는 황색경제권의 이상적인 상상은 너무 멀리 있는 것이다. 친중국 기업으로 분류되는 몇몇 대형 체인의 저렴한 음식과 공산품 앞에서 당장 주머니 사정이 급해진 사람들은 정치적 신념을 앞세우기 어렵다.
최근 홍콩에서는 인근 중국본토 도시 선전으로 쇼핑을 하러 떠나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2023년 1월 접경지역을 개방하면서 눈에 띄게 두드러진 현상이다. 홍콩이 보통 중국인 관광객의 쇼핑 목적지로 여겨졌던 예전의 상황과는 다른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홍콩 사람들은 선전을 자주 왕래했다. 7년 전 홍콩에서 홈스테이를 할 때 함께 살던 할머니께서는 종종 선전으로 쇼핑을 다녀오곤 하셨다. 선전을 다녀오실 때마다 구매한 물건을 보여주며 홍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하다고 기뻐하셨던 얼굴이 떠오른다. 반면, 할머니의 30대 딸은 선전으로 쇼핑을 간 적이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들이 큰 캐리어를 들고 홍콩에 와서 약국과 마트에서 물건을 쓸어 담아 가는 일을 눈살을 찌푸리며 비판하곤 했었다. 2019년 송환법 반대운동 과정에서도 홍콩에서 물건을 대량으로 구매하고 인편으로 옮겨 중국에서 재판매하는 병행수입업자들의 행태를 문제시 삼으며 이들의 주요 활동 지역이었던 상수이(上水)를 되찾자는 운동이 제기되기도 했다.1)
사진 1. 2018년 필자가 방문했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선전의 한 화려한 쇼핑몰 내부 모습.
당시 처음 방문했던 선전의 모습이 사뭇 발전된 모습이어서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과거의 상황을 비춰볼 때 최근의 변화는 흥미로운 것이다. 홍콩과 선전은 열차와 자차를 통해 육로로 쉽게 오갈 수 있어 상호 접근성이 높다. 홍콩 사람들은 직접 선전으로 쇼핑을 하러 가는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전 사람들이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수요를 창출하고 있기도 하다. 홍콩을 출퇴근하는 선전 주민이 홍콩에서 주문을 받아 선전에서 물건을 구매한 뒤 홍콩의 지하철역에서 만나 배송하여 건당 수수료를 받는 사업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2) 2019년에는 젊은 세대의 중국 병행수입업자에 대한 비판이 거셌지만, 이러한 새로운 서비스의 이용자들 역시 “친절하고 매너 좋은 젊은 회사원”이다.
이와 같은 역전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중국본토 도시에 대한 홍콩인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달라지고 있다거나, 홍콩에 없는 소매점과 브랜드가 선전에 많이 입점하면서 새로운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시장이 되고 있다는 점, 홍콩의 경제 쇠퇴, 중국인 관광객의 수요 변화에 따른 홍콩 방문 감소, 홍콩만을 향하던 관광객의 단선적인 흐름이 양방향으로 전환했다는 긍정적인 해석 등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중국 기업에 돈을 쓰지 않겠다는 정치적 소비 운동의 현주소는 어떨까. 민주화를 지지하는 상점들로 구성된 황색경제권을 만들자는 한 시절의 주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국내 언론의 한 보도에서 마주한 홍콩인의 인터뷰는 사뭇 인상적이다. 쇼핑을 위해 선전을 방문할 거라는 한 홍콩인은 “내 정치적 입장이 소비 선택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것에 확신이 있다면 왜 중국 본토에 가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본토의 모두가 독재를 지지하는 게 아니며 본토의 중국인 대부분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라고 말했다.3) 그동안 홍콩에서 대두되었던 중국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비민주적인 공산당을 향했지만, 안전하지 않은 식료품을 생산하는 중국과 시민의식이 결여된 일부 중국인의 태도를 향하기도 했다. 홍콩을 여행하는 중국인이 길가에 버리는 쓰레기, 목소리를 높여 하는 대화, 무질서한 모습 등에 대한 비판은 시민의식을 갖춘 홍콩인과 그렇지 못한 중국인 사이를 구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홍콩인의 사고방식은 중국 정부의 비민주적인 통치 체제하에서 고통받는 중국인에 대한 연대를 상상하기 어려운 장해물 중 하나였다.
사진 2. 2018년 당시 홍콩에 진출하지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이미 유명했던 밀크티 카페 헤이티(HEYTEA) 선전 지점의 모습.
2019년 홍콩에도 헤이티 지점이 생겨 성업을 이루고 있지만,
선전의 헤이티와 가격 차이가 큰 편이어서 선전을 방문하는 홍콩인들이 종종 헤이티를 찾고는 한다.
선전 쇼핑 붐의 상황에서 마주한 홍콩인과 중국인 사이의 연결과 ‘같은 보통 사람들’이라는 인식은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서비스 부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경제적 상호작용의 심화가 홍콩 내부의 연결을 강조하는 황색경제권의 상상을 보통의 중국인에게까지 확대하는 힘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중국 정부와 중국인 사이의 분리가 필요하지만, 여전히 구별 짓고 싶어 하는 욕구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을 확장해볼 수는 있다. 홍콩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는 비민주적 정치체제뿐만 아니라 특정 기업의 독점과 빈부격차 심화가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경제적 상호작용이 이와 같은 문제의 상호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같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유사한 현안에 대한 인식 공유로 이어진다면 어떨까.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로서 선전 쇼핑 붐이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꽤 막연해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중국인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타파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경제를 정치적 저항의 무기로 삼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던 2019년 홍콩의 시위는 끝났고, 국가보안법이 압도한 홍콩에서 활동가들은 운동을 멈추었다. 과거에는 나름 활발했던 홍콩과 중국의 노동운동 연계도 어려운 오늘날의 현실에서 둘 사이를 연결하는 쇼핑이라는 매개가 중국인을 홍콩인과 같은 입장의 보통 사람으로 보는 관점을 싹트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황색경제권의 상상은 홍콩 안에서 빛을 바래고 있지만, 중국인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하에서 또 다른 상상을 만들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빛바랜 상상 앞에 도래한 미지의 상상을 기꺼이 마주하며, 2024년의 첫 칼럼을 마냥 비관적으로만 마무리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
【지금 여기, 홍콩 12】
김주영 _ 전북대 동남아연구소 전임연구원
1) Jennifer Creery, 13 July 2019, “‘Reclaim Sheung Shui’: Thousands of Hongkongers protest influx of parallel traders from China,” Hong Kong Free Press.
2) Lin Xiaoyi and Huang Lanlan, 25 April 2023, “Increasing appeal of mainland products and lifestyle reverses flow of HK surrogate shopping, amid Bay area integration,” Global Times.
3) 윤고은, 2024.1.4., “"정치보다 경제"…홍콩서 '중국 할인매장 쇼핑여행 상품' 인기,” 연합뉴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와 표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2. 필자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