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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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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나이의 옹섬핑 _ 정찬학

중국 고문헌에 등장하는 섬라(暹羅) · 점성(占城) · 유구(琉球) · 조와(爪哇) · 발니(浡泥) 등으로 대표되는 동남아는 중국인의 이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동남아 지역으로의 중국인 이민은 송나라 시기 북방 교역로의 폐쇄로 인한 해상 무역로의 개척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민자의 대부분은 상인이나 장인, 노동자 등이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중국인 이민자들은 주로 출신 지역과 방언 집단을 중심으로 모여 살며 경제적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동남아시아 각지에서는 현지 중국인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이러한 중국인 공동체의 대표를 까삐딴 차이나(Capidan china)라고 부르며 일종의 정치적 대표권 및 해당 지역의 징세권 등을 인정하였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왕족의 일부로 편입되거나 실제 왕족의 조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브루나이(Brunei)의 초기 역사에 등장하는 옹섬핑(Ong Sum Ping)이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브루나이는 중국 역사서에서는 파라(婆羅) · 발니(浡泥, 渤泥) · 문래(文萊) 등으로 불리었다. 명사 외국전에서 브루나이와 관련하여 파라(婆羅) · 발니(浡泥)에서 각각 다루고 있는데, 이는 당시 보르네오섬(Borneo)에 있던 브루나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여 생긴 오해로 보인다. 주로 파라에 대한 기술은 보르네오 섬 전체에 대한 기술로 보이고, 발니에 대한 기술은 브루나이에 대한 기술로 보인다. 먼저 명사 외국전에 실린 파라에 관한 기술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파라는 문래라고도 하며, 동양의 끝이자 서양이 시작되는 곳이다. 당나라 때 파라국이 있었는데, 당 고종(高宗) 때에 늘 조공하러 왔다. 영락 3(1405) 10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서와 채색 비단을 가지고 가 그 나라 왕을 위무하고 깨우쳤다. 영락 412월에 그 나라 동왕과 서왕이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고 조공하였다······만력 연간에 왕이 된 자는 복건 사람이었다. 정화가 파라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어떤 복건성 사람이 그를 따라 갔는데 그 곳에 남아 살고 있다가 그 후예들이 마침내 그 나라를 점령하여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다음은 발니에 관한 기록이다.

 

발니는 송 태종(太宗) 때에 처음으로 중국과 교통했다. 홍무(洪武) 3(1370) 8월에 어사 장경지(張敬之)와 복건행성(福建行省) 도사(都事) 심질(沈秩)에게 명하여 사신으로 가게 했다. 천주(泉州)에서 배를 타고 반년이 걸려 사파(闍婆)에 이르고, 다시 한 달이 걸려 그 나라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 왕 마합모사(馬合謨沙)는 오만하여 예를 행하지 않았는데, 심질이 꾸짖자 비로소 자리에서 내려와 배례를 하고 조서를 받았다······홍무 48월에 장경지 등을 따라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

 

만력연간에 왕이 된 복건성(福建省) 사람의 기록은 실제 관련 자료가 부족하여 그 진위를 판별하기는 어렵지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당시 중국인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곳이 바로 오늘날 북부 보르네오의 사라왁주(Sarawak), 사바주(Sabah) 등이었는데, 당시에는 브루나이의 통치 지역이었다. 특히 사바주는 위치상 가장 북쪽에 위치하여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곳인데, 이곳에는 키나발루(Kinabalu), 키나바탕안(Kinabatangan) 등이 유명하다. 키나발루는 중국인 과부의 산이라고 번역되며, 키나바탕안은 중국 강으로 번역되는 등, 중국과 관련한 명칭으로 미루어 이 지역이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중국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지역의 중국인 집단 대표자였던 옹섬핑은 마자피힛(Majapahit)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브루나이를 건설한 술탄 무하마드 샤(Sultan Muhammad Shah13631402 재위)의 딸 라트나 데위 공주(Puteri Ratna Dewi)와 결혼하여 펭기란 마하라자 렐라(Pengiran Maharaja Lela)라는 칭호를 받고 술탄의 사위가 된다. 무하마드 샤는 바로 위의 발니 관련 기록에 등장하는 마합모사(馬合謨沙)이다.

  

옹섬핑은 복건성 출신으로 황삼병(黄森屏)의 복건 발음이라고 한다. 그는 또 황총병(黃總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를 군인으로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옹섬핑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중국 문헌 기록의 부재로 인해 현지의 민간전승이나 브루나이 왕실 계보의 기록에 근거해서 추측해 볼 수 있다. 20세기 이후 중국인 학자의 기록 가운데에서도 옹섬핑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현지 민간전승과 브루나이 왕실 계보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옹섬핑을 복건인으로 보는 것은 초기 중국인 이민자의 대부분이 복건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문이 없다. 다만 그가 언제 도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대략 3가지 의견이 제시된다. 첫째는 1292, 원나라 지원(至元) 29년에 세조(世祖) 쿠빌라이칸의 명에 따라 북 보르네오에 행성(行省)을 설치하고 총독을 파견하였는데 그 공식 직위가 총병(總兵)이었을 것이며, 그 이름이 복건 발음으로 Ong Sum Ping, 곧 황승평(黃昇平)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둘째는 위의 『명사(明史)』 기록에 나온 시기로, 명나라 홍무(洪武) 3(1370)에 파견한 사신을 따라간 인원 중에 일부가 현지에 정착한 것으로 대략 1375년으로 추정한다. 셋째는 1406-1433년 사이의 일로, 정화(鄭和)의 함대 가운데 한 부대가 보르네오를 방문했으며 그 사령관이 왕경홍(王景弘)으로 왕총병(Wang Zhong Bing)이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시기적으로 너무 늦어 맞지 않다. 위의 설은 각각 중국인과 브루나이의 접촉이 가장 격렬했던 순간들이다. 그러나 그 설을 종합해보면, 대략 1375년경 명나라 사신을 따라왔다가 현지에 정착한 중국인일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브루나이 왕실 계보의 설명에 따르면 옹섬핑을 중국 황제의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원명대(元明代) 황실의 성씨를 살펴보았을 때 불가능한 일이다. 현지 중국인 집단의 수장이 된 인물이었기에 존중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브루나이 왕실을 개창한 무하마드 샤의 입장에서는 불안정한 왕실의 입지를 다지는 데에는 브루나이 왕국이 있는 보르네오섬 북부 지역 중국인 이민자들의 협력이 절실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옹섬핑은 그의 누이 키나바탕안 공주(Puteri Kinabatangan)를 무하마드 샤의 형인 술탄 아흐마드(Sultan Ahmad, 1408-1425 재위)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이 술탄 아흐마드는 무하마드 샤의 형이 아니라 바로 옹섬핑 자신으로 장인인 무하마드 샤의 뒤를 이어 술탄의 자리를 이었다고도 한다. 이렇게 브루나이 왕실 계보를 살펴보면 약간의 혼선이 보이는데, 특히 옹섬핑과 관련된 시기의 기록이 그러하다. 왕실의 공식 계보(Silsilah Raja-raja Brunei)에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고, 점토판 계보(Batu Tarsilah)와의 불일치, 지역 민간전승과의 불일치 등이 이러한 혼선의 원인으로 보인다. 아흐마드를 무하마드의 형으로 쓴 것도 있고, 사위로 쓴 것도 있는데, 만약 아흐마드가 옹섬핑이었다면 브루나이 왕실 계보에 중국인이 끼어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므로 정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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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2012년 이전 계보                        그림 2. 현재 왕실 계보



심지어 왕실 공식 홈페이지의 계보 또한 최소한 한 차례 수정이 이루어져 지금 보이는 계보에는 1402년부터 1408년까지의 술탄이 빠져 있는데, 2012년까지의 계보에서는 존재하였다. 본래 이때의 술탄은 무하마드 샤의 아들인 술탄 압둘 마짓 하산(Abdul Majid Hassan, 1402-1408 재위)으로 마하라야 카르나(Maharaja Karna, 麻那惹加那, 麻那惹加那乃)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14088월에 당시까지 명의 수도였던 남경(南京)에 와서 성조(成祖, 永樂帝, 1402-1424 재위)를 알현하고 몇 개월 머물다가 병에 걸려 10월에 28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남경의 발니국공순왕묘(浡泥國恭順王墓)가 바로 그의 묘지이다. 명사의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월에 왕이 회동관(會同館)에서 죽었다. 황제는 슬퍼하며 사흘간 조회를 중단하도록 했고,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도록 했으며, 비단을 부의로 보냈다. 황태자와 친왕 모두 참배하러 갔고, 담당 관원이 관곽과 명기를 갖추어 안덕문(安德門) 밖 석자강(石子岡)에 안장하였으며, 묘에 이르는 길에 비를 세웠다. 또 묘 옆에 사당을 세워 관리로 하여금 봄과 가을에 소뢰로써 제사를 올리게 했으며 시호를 공순(恭順)이라 했다. 그의 아들 하왕(遐旺)에게 칙서를 내려 위로하고 그 뒤를 이어 국왕에 오르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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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발니국공순왕묘(古浡泥國王麻那惹加那乃之墓)


이렇게 불행히 중국에서 죽은 압둘 마짓 하산 외에 딸밖에 없었던 무하마드 샤의 다음 술탄으로 그의 형인 아흐마드가 자리를 이었다고 하는 것이 공식적인 계보이다. 하왕(遐旺)은 아버지가 죽은 해에 겨우 4살이었기 때문에 영락제의 성지를 따라 술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할아버지 무하마드 샤의 형, 혹은 사위인 아흐마드가 술탄의 지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이어 술탄 아흐마드마저 딸밖에 없었기에 그 다음 술탄 또한 아흐마드의 사위인 아랍 출신의 샤리프 알리(Sharif Ali, 1425-1432 재위)가 자리를 이었다.

 

옹섬핑과 관련한 민간 구전 또한 흥미롭다. 사바에 있는 키나발루산에 사는 용이 지키고 있는 보석을 훔치기 위해 중국 황제가 옹섬핑과 왕콩(Wang Kong, 王剛)을 보냈다. 키나발루산에 사는 그 용은 수많은 중국인을 잡아먹은 것으로 유명했다. 옹섬핑은 유리 상자에 양초를 넣어 용에게 먹이를 주는 순간 보석과 바꿔치기를 하였다. 왕콩이 공을 독차지하고자 보석을 훔쳐서 중국으로 달아나자, 옹섬핑은 화가 나서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서 다시 브루나이로 항해하여 도착한 뒤 무하마드 샤의 딸과 결혼하여 두 번째 술탄인 아흐마드가 되었다고 한다.

 

브루나이 왕실 계보를 서구에 소개한 휴 로우(Hugh Low, 1824-1905)와 같은 이는 사라왁 지역 전설을 참고하여 브루나이의 건국 자체가 중국인 정착지에 근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사라왁 이외에도 동남아시아의 지역의 민간전설과 기록을 통해서 보면 동남아시아 지역에 중국인 정착지와 그 영향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포르투갈과 영국, 네덜란드 등의 근대 제국주의 식민통치 과정 속에서도 까삐딴 차이나를 통한 중국인 정착지와 화교 집단의 지배, 원주민의 통제와 징세가 이루어졌다. 이는 이후 식민지배의 종식과 독립 이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불어 닥친 민족주의적 정서로 인해 동남아시아 화교에 대한 배척과 동화 정책을 이끌어냈고, 중국인 이민자들로 하여금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우고 현지인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현재 말레이 등지의 중국인 화교들은 토생화인(土生華人)이라는 뜻의 뻐라나깐(Peranakan)으로 불리며 중국 문화와 말레이 문화 및 식민 지배 시절의 서구문화가 혼합된 문화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지워지고 있던 옹섬핑의 이름은 20세기 초에 중국인 학자들에 의해 다시 등장한다. 중국인 상인 황줘루(黄卓如)가 한문으로 황총병지묘(黃總兵之墓)라고 새긴 비문이 있는 무덤을 브루나이(婆羅泥)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한 것이『남양화교통사(南洋華僑通史)(温雄飛, 東方印書館, 1929)에 보인다. 또 광동성 출신 무역업자 황쭤지(黄作基)1942년에 우연히 그의 무덤을 발견했으며 브루나이 왕실에서 청명절(淸明節)에 중국식 예법으로 기리고 있었는데, 희미하게 황삼병지묘(黄森屏之墓)라고 쓰여 있었다고 주장한 기록도 보인다. 1947년에는 중화민국(中華民國) 정부에서 남중국해의 암초에 삼병초(森屏礁, Senping reef)라는 이름을 붙였고, 브루나이 수도인 반다르 세리 베가완(Bandar Seri Begawan)에서는 거리 이름(Jalan Ong Sum Ping)으로 그의 이름이 쓰이고 있다. 1991년 브루나이와 중국의 수교 이후 공식 성명에서 옹섬핑을 양국 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주요 인물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옹섬핑에 대해서는 일부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옹섬핑이 술탄 아흐마드인가에 관계없이, 또 심지어 실존인물이 아니더라도 그가 이미 상징적인 인물로 기능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정찬학 _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참고자료

明史「外國傳」
『澳門紀略』
溫雄飛, 『南洋華僑通史』, 東方印書館, 1929
李長傅, 『南洋華僑史』, 商務印書館, 1934
陳烈甫, 『東南亞洲的華僑、華人與華裔』, 正中書局, 1979.5
Hugh Low, Selesilah(Book of the descent) of the Rajas of Bruni, Journal of the Straits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No.5, June, 1880
Johannes L. Kurz, Making history in Borneo: Ong Sum Ping and his others during the late Yuan and early Ming Dynasties. International Journal of Asia Pacific Studies, Vol. 14, No. 2, 2018
Lee Khoon Choy, Golden Dragon and Purple Phoenix: The Chinese and Their Multi-ethnic Descendants in Southeast Asia, World Scientific Publishing, 2013
Ooi Keat Gin, Hoang Anh Tuan, Early Modern Southeast Asia, 1350–1800, Routledge, 2016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https://archive.md/20120805141750/http://www.pusat-sejarah.gov.bn/sultanbrunei.htm

그림 2. http://www.pusat-sejarah.gov.bn/Info%20Sejarah/Sultan%20-%20Sultan%20Brunei.aspx

그림 3. https://en.wikipedia.org/wiki/Abdul_Majid_Hassan#/media/File:Tomb_of_the_Sultan_of_Brunei_-_stele_-_P106076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