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 가사가 아니다. 문혁이 시작된 직후인 1966년 7월 8일 마오쩌둥이 장칭(江靑)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 질 때까지 천하를 혼란시킨다. 칠팔년이 지나면 다시 한 번 한다(天下大亂達到天下大治, 過七八年又一次)”는 구절의 일부이다. 중국공산당의 일선 책임자로서 문혁을 이끌던 류샤오치(劉少奇)가 1966년 7월 29일 문혁 적극 분자들에게 한 연설에서 “당신들이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서 우리에게 혁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솔직히 나도 잘 모른다”고 했던 그 문혁에 대한 마오쩌둥의 구상을 표현한 것이다.
마오쩌둥의 구상은 칠팔년에 한 번씩 반복되는 ‘대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혁명을 통하여 건설한 국가에 대한 반복적인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혁명을 통하여 국가를 건설한 혁명가에 대한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혁명을 위하여 마오쩌둥은 “혁명은 손님을 모셔서 밥 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1920년대의 자신의 구호를 다시 불러냈다. 혁명은 말 그대로 프랑스 혁명의 단두대처럼 “목(命)을 자르는(革)”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혁명으로 건설된 국가에서 다시 “목을 자르는” 혁명을 부활시킨 것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이었다. 그러한 혁명과 혼란을 통하여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질 수 없음은 문혁이 실천을 통하여 증명한 바와 같다. 그러나 여기서 논하려고 하는 것은 문혁이나 문혁의 실패가 아니다. 중국에서 문혁은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비극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문혁의 모든 것이 단지 반면교사일 뿐이거나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진 폐물은 아니다.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할 비극이 단지 광기나 광란으로만 여겨진다면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 군상들은 물론 희생자들의 희생이 너무나 덧없지 않겠는가?
문혁이 비극으로 귀결되었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자신을 던졌던 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혁명으로 건설된 국가에서 다시 “목(命)을 자르자는(革)” 시대착오적인 호소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려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혁명으로 건설된 국가가 어느덧 혁명을 통하여 파괴시킨 과거의 국가와 닮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듯, 혁명으로 건설된 국가에서도 새로운 지배계급과 억압이 출현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당과 국가의 관료들이 소련의 노멘클라투라와 같은 새로운 계급이자 새로운 억압자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궁극적 목적과 의도가 무엇이든 마오쩌둥의 혁명가적 본성은 바로 그것에 대한 인민의 불만을 “혁명한 자”에 대한 혁명으로 불러내었고 그것에 인민들이 호응한 것이 문혁이었다.
혁명으로 건설된 국가가 혁명을 배반한 데 대한 아래로부터의 해결책이 바로 마오쩌둥의 구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또 다른 “목을 자르는” 낡은 혁명의 소환은 결국 혁명 국가 중국에서 혁명이 거세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문혁은 혼란을 통한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혼란과 혁명 공포의 결과로 낡은 관료질서의 부활과 공고화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당과 국가의 관료가 문혁의 유일한 승리자가 되었으며, 아래로부터의 낡은 혁명의 부조리는 모든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냈다. 문혁의 역설은 아래로부터의 혁명뿐만 아니라 모든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민주가 중국에서 비교적 오랜 기간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9년 베이징의 봄이나 1989년 천안문사건에 대한 진압은 바로 그러한 문혁의 공포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당과 국가의 관료에게 문혁의 공포를 불러오게 하였으며, 관료들은 대중들에게 문혁의 공포에 대해 환기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진압을 정당화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공포는 중국이 민주를 제한하게 하며, 아래로부터의 감시와 감독이 필요한 영역도 위로부터의 정치운동으로 해결하려고 하게 한다.
문혁은 중국에서 아래로부터의 혁명과 민주를 장기적으로 불가능하게 한 요인이었지만, 그것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나 민주의 무용(無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와 관료의 지배계급화는 비단 혁명국가뿐만 아니라 민주제를 통한 위임 국가에서도 정도의 문제일 뿐 마찬가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발생한 우리의 문제는 선출된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얼마나 괴리될 수 있는지, 삼권 분립의 균형과 견제의 원리가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 심지어는 민간의 사회적 감시기구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이 국가권력과 얼마나 결탁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같은 당-국가체제인 혁명 국가뿐만 아니라 선거를 통하여 권력이 위임된 민주국가에서도 국민이 선거일에만 자유롭다는 문제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직접민주주의이다. 직접민주주의가 대의제를 대체할 수는 없을지라도, 직접민주주의로 감시되고 보완되지 못하는 대의제에서의 위임은 위임이 아니라 “국민의 고유한 주권을 소수의 권력자에게 상납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마오쩌둥이 “칠팔년에 다시 한 번”이라고 한 것은 단지 중국의 당 관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한 선지자적 묘사였다고 할 수 있다. 길게는 4.19, 1964년 6.3사태, 그리고 1980년 광주항쟁과 87민주화투쟁을 비롯하여, 민주화 이후에도 주기적인 대규모 시위가 있었으며, 가깝게는 2004년과 2008년에도 대규모 촛불 시위가 있었다. 이러한 주기적 직접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통하여 한국의 민주가 만들어졌으며 민주주의가 지켜지고 새롭게 만들어져 가고 있다.
문화대혁명에서 “목을 자르는” 20세기의 낡은 혁명 방법이 중국에서 혁명뿐만 아니라 대민주(직접민주)에 대한 사망선고였지만, 새로운 ‘문화적’ 혁명이 우리 사회에서는 반복되고 있다. 혹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문화’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문혁은 문화대혁명이 아니라 ‘무화(武化)대혁명’이었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이 땅에서의 민주 혁명은 촌철도 없는 맨주먹의 혁명이었다. 때로는 가공할 폭력 앞에 어쩔 수 없이 폭력으로 저항하기도 했지만, 주기적으로 재생된 맨주먹의 ‘문화’ 혁명이 이 땅의 혁명을 이끌었다. 지금 이 땅에서는 위임받은 권력과 그 부역자들에 의한 반민주를 치유하기 위한 진정한 새로운 ‘문화’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 무기력과 민주의 타락에 대한 정화를 위한 절제되고 정제된 혁명, 새로운 질서와 비약을 위한 ‘문화적인’ 민주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어느 학자는 한국의 민주가 동아시아의 공통적인 자산이라고 한다. 우리의 민주가 동아시아의 민주주의, 아마도 중국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수 있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리라. 어쩌면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대의제보다는 ‘직접민주주의에 의한 대의제에 대한 주기적 정화’인지도 모른다. 낡은 혁명, “목을 자르는” 혁명의 공포에 의하여 거세된 문혁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내면의 염원이 우리의 주기적인 ‘문화적’ 민주 혁명에 주목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현재 이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화적’ 민주 혁명을 통한 민주의 회복과 새로운 질서의 구축은 비단 우리의 민주의 진전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진전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안치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 중국학술원 중국자료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