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중국학 연구동향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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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농업 연구로 본 중국적 표준과 질서에 대한 대안적 접근(3) _ 리페이

[역자의 말]

 

지난 155호부터 <해외 중국학 연구동향> 코너에서 홍콩 농업3.0 실천에 관한 초우시총(周思中, Sze Chung Chow) 선생의 저서, 석양의 빛: 누가 홍콩에서 채소밭이 없다고 했을까?1)의 내용을 장별로 요약·번역하고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번 10월호는 이 책의 제2<채소밭의 일상: 식물의 특성과 외부 자원에 대한 통합을 통해 살펴보기>의 내용을 요약·번역했다. 제목에서 보여주듯, 저자는 식물의 특성에 맞게 채소를 재배하는 과정과 기법, 그리고 채소밭 외부의 자원에 대한 관리와 활용을 중심으로 채소밭의 일상을 드러냄으로써 일상에서 재배할 채소의 종류 선택부터 유기 비료의 공급까지의 과정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홍콩 도시주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채소밭의 일상을 알리는 것은 이 글의 목표가 아니다. 저자의 진정한 목표는 홍콩의 채소밭 농업과 농업인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 채소밭의 일상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홍콩 채소밭 농업은 전통 농업이 아니라 도시화에 따라 증가한 채소 소비 수요를 겨냥한 상업화된 농업이며, 홍콩의 농업인들은 촌스러운 외투를 입은 사업가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장 서두에서 인용된 인류학자 Göran Aijmer1960년대 홍콩 신계지역 농업연구2)에서 지적했듯, 당시 신계지역에는 채소밭을 운영했던 농업인과 종족(宗族)의 대를 이어 전통 벼농사를 짓는 동성마을들이 병존했지만, 전자는 후자와 달리 세시풍습과 종족의례에 의해 규정된 농업 관행과 농사철을 따르지 않았고, 오직 시장 수요에만 주목했다. 50여 년 이후의 오늘날에는 벼농사 마을들은 모두 사라졌고 채소밭 농업만이 유지되어 왔다. 비록 그 규모는 매우 작지만, 아직 버티고 있는 채소밭 농업의 일상에는 이들의 생존비법이 많이 담겨 있다. 이 글에서는 여러 가지 채소밭 사례를 통해 이러한 생존비법의 실마리를 찾아내고자 한다.

 

[내용요약]

 

1. 채소밭 농업 재배 작물의 기본상황

 

홍콩의 여름은 무덥고 비가 많이 내리는데, 가을과 겨울은 상대적으로 선선하고 강수량이 적다. 따라서 열대 기후이지만 홍콩에서도 계절마다 분명한 기후 차이가 있다. 따라서 채소밭에는 온대 품목에서 열대 품목까지 다양한 채소 품목들을 심을 수 있다. 또한, 한해 내내 기온이 높고 강수량도 많아서 생장기가 길지 않은 채소 품목들은 한 해에 몇 차례 수확될 수 있다. 계절에 따라 채소밭에서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의 종류는 다음 <-1>와 같다.

 

 <-1> 홍콩에서 일상적으로 재배되는 작물의 파종 계절

캡처.PNG


2. 함께 춤을 추는 채소와 농업인



아무리 사업가라고 하더라도 홍콩의 농업인들 역시 흙, 작물, 기후, 그리고 벌레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저자가 볼 때, 이러한 싸움은 농업인의 이성(理性)과 대자연의 야성(野性) 간의 싸움이라기보다는 농업인과 대자연이 함께 춤을 춘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재배할 채소의 품종 선택으로부터 수확까지 농업인들은 자신의 관찰과 이해에서 얻던 지식과 경험을 통해 합리적인 결단을 내리고, 채소는 농업인의 행동에 대응하여 자신의 야성에 따라 다르게 자라기 때문에, 어느 쪽도 대자연의 무대를 일방적으로 주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이란을 재배하는 C씨의 채소밭과 물냉이를 재배하는 H 여사와 D씨의 채소밭을 농업인이 채소와 함께 춤을 추는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했다. 이는 사실 사례연구라기보다는 채소밭 농장에 관한 민족지 연구라고 해야 할 정도로 채소밭의 일상을 매우 상세하고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농업인과 채소의 군무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하기 위해 물냉이 농사를 짓는 H 여사 사례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물냉이도 십자화과(배춧과)에 속한다. 두판채(豆瓣菜)도 물냉이의 일종이다. 이들은 모두 여러해살이의 수생식물이다. 그러나 홍콩에서 이들은 꽃도 필 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가 없기에 씨앗을 남길 수 없다. 따라서 홍콩에서 물냉이 종류를 심으려면 줄기에 막뿌리(不定根)가 생겨난 모종을 진흙에 꽂아야 뿌리(定根)가 발달하고 새싹까지 자랄 수 있다. 막뿌리가 있는 모종을 심는 것은 물냉이 재배 과정의 핵심이기 때문에 막뿌리의 특성을 잘 파악하면 물냉이 재배에 사반공배(事半功倍)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홍콩에서 물냉이 재배는 밭물냉과 논물냉이라는 두 가지 재배방식이 있다. 밭물냉이 재배는 보기 드문 편이고, 현재 대개 타이모산(大帽山, Tai-mo shan)4) 중턱의 Chuen Lung(川龍) 마을에서만 진행하고 있다5). 논물냉이 재배 방식은 훨씬 보편적인데, 물을 충분히 관개해 주기만 하면 된다


중추(추석)가 지난 후 필자6)는 운이 좋게 물냉이 모종을 심는 장면한 대형 군무 장면을 직접 관찰한 적이 있었다. 물냉이 모종을 심기 시작 전에도 많은 노동이 투입되었다. 음력 815일부터 풀을 베고 땅을 갈아엎어 대량의 생석회(농업인들이 이를 백회[白灰]라는 부름)를 땅에 뿌리고 흙 안에 있는 세균과 우렁이를 죽인 다음에 물을 몇 번 붓다가 뺀 이후 기계로 땅을 평평하게 골랐다. H 여사는 채소밭에서 직선으로 꽃생강(薑花)을 심어 아직 모종을 심지 않는 땅덩어리에 모종을 심을 때 참고할 기준선을 표시했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물냉이 모종 주문을 시작했다. H 여사와 같은 지역에서 물냉이 농사를 짓는 농업인들은 모두 중국 광둥성(廣東省)과 광시성(廣西省)에서 생산한 모종을 구매했다. 중국인 장사꾼들은 물냉이 생산 지역에서 모종을 수매하고 홍콩 농업인에게 판매했다. 필자가 현장에 머물렀던 당시, H 여사는 90박스의 모종을 주문했다. 이들 중에서 광시산 모종과 광둥산 모종이 모두 있었는데, H 여사는 광둥성 둥관(東莞)에서 나온 모종이 가장 질이 좋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보면 모종의 생산지와 품질은 농업인들이 본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문한 모종은 판링(粉嶺)의 새벽 시장(天光墟)에서 납품을 받았다. 자정쯤에 차로 시장에 가서 모종 상자를 싣고 바로 심어야 할 땅덩어리로 갔다. 땅에 도착하면 논두렁을 따라 상자를 일렬로 잘 놓는다.. 날이 밝으면 H 여사, H 여사의 남편, 그리고 3명의 고용 노동자가 논에 모여, 모종을 담는 스티로폼 상자를 자신의 뒷편 혹은 옆에 있는 아직 건조되지 않은 진흙에 놓았다.. 모두가 준비되면 모종 심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논두렁 쪽으로 향하면서 스티로폼 상자에서 왼손으로 한 움큼의 모종을 꺼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왼손에 쥔 한 움큼의 모종에서 4~5그루씩을 뽑아서 진흙으로 던졌다. 그다음 또 4~5그루씩을 뽑아서 아까 던졌던 모종 옆자리에 던졌다. 이렇게 8~10번 정도 반복한 후 점선처럼 일렬의 모종들을 심을 수 있었다. 일렬의 점선 심기가 끝난 후, 이들은 여전히 논두렁 쪽으로 향하면서도 한 걸음 후퇴하고 상자도 한 걸음 뒤로 옮겼다. 상자와 이미 심었던 점선 간의 빈 공간에서 상술한 동작을 반복하면 또 일렬의 모종들이 심어지게 된다. 5명으로 구성된 작업팀은 1인당 10피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자기가 담당하는 10피트 구간 내에서 계속 모종을 던졌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일견 매우 단순하고 대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모종을 심은 땅덩어리를 보면 모종들이 상당히 규칙 있게 심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작업을 할 때, 모종을 담는 스티로폼 상자를 항상 작업자의 뒤 혹은 옆에 놓는 이유 중 하나는, 작업이 뒤로 후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작업자들이 일렬의 모종을 심은 후 상자를 뒤로 한 걸음 밀어 옮기는 과정에서 스티로폼 상자의 편평한 밑면으로 진흙을 탄탄하게 고르는 효과도 있다. 이는 모종의 막뿌리가 진흙에서 정착할 수 있는지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막뿌리가 땅의 수분과 흙에 제대로 접촉하지 못하면 진정한 뿌리가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상자를 밀어서 뒤로 옮기는 동작은 사실상 이미 농기계로 한번 골랐던 땅을 다시 미세하게 조정함으로써 막뿌리의 정착 확률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모종 심기에서 수확까지 물냉이가 자라는 기간은 약 30일이다. 따라서 H 여사는 자신이 소유하는 20두종7)의 땅에 모종을 한꺼번에 심지 않는다. 그녀는 땅을 잘 나눠서 모종 심기와 수확 일정을 안배했다. 이로써 땅에 물냉이를 재배하지 않는 기간이 거의 없도록 효율성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뒤로 물러나면서 모종을 심는 방식은 벼의 모내기와 비슷하지만, 모내기할 때는 모종을 진흙에 잘 꽂아야 하는 반면, 물냉이 모종 심기는 진흙 위에 던지면 된다따라서 물냉이 모종 심기는 빨리 완성할 수 있고, 허리를 굽히는 노고도 면할 수 있다. 사실상 필자의 현지 관찰에 따르면, 6명의 작업팀이 약 2시간 정도면 1두종의 땅에 모종을 모두 심을 수 있었다. 한 땅덩어리에서 작업이 끝나면 바로 군대의 작전처럼 다음 땅덩어리로 이동했다


모종 심기가 군무라고 하면, 수확은 정교하게 준비된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땅덩어리의 물냉이는 중추에서 내년의 청명(淸明)까지 계속 수확할 수 있다. 그러나 모종은 한 번만 주문하면 된다수확할 때, 작업자들은 논 가운데 부분의 물냉이를 모두 뜯지만, 논두렁 주변의 물냉이는 뜯지 않는다. 이들은 다음 모작의 모종으로 남겨진다다시 말해, 한 번 주문된 모종은 두 가지 역할을 맡는다. 하나는 채소로 판매되는 물냉이고, 다른 하나는 다음 모작에 활용될 물냉이 모종이다현지 관찰에 따르면, 한번 수확된 물냉이 중에서 약 1/6~1/7 막뿌리가 생겨난 줄기들은 남겨져서 다음 모종 심기 때 사용된다

 

 

저자는 채소 농사를 짓는 과정뿐만 아니라 농사의 비용과 수익을 상세하게 계산했다. H 여사의 비용과 수익은 다음과 같이 계산되었다.

 

나이가 거의 60세인 H 여사는 일손을 구해야 한다. 11월 필자가 판링의 새벽 시장을 다시 방문했을 때, H 여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는 물냉이 판매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그때 그녀의 물냉이 납품량은 40여 바구니였다. 한 바구니당 무게는 20~508)이었다. 따라서 매번 약 1,000~2,000근의 물냉이를 납품할 수 있다고 추산할 수 있다


농업인들이 능숙한 재배기술을 갖고 있으면, 물냉이라는 품목에서 상당히 높은 생산량을 거둘 수 있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다. 필자의 관찰에 따르면, 모종 심기에는 스티로폼 상자 60개 분량의 모종들이 사용되며, 한 상자당 모종의 무게는 30kg이다. 모종 공급업체는 1근당 5.5~7홍콩달러라고 값을 부른다. 따라서 한 땅덩어리를 모두 심으려면 10,000홍콩달러 정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전체 물냉이 농사에서는 매년 약 150,000~200,000홍콩달러의 모종 비용이 발생할 것이다. 비료, 고용노동자의 노임, 그리고 다른 비용을 합산하면 H 여사가 운영하는 채소밭은 운영 비용이 백만 홍콩달러를 넘는 중소기업과 다름이 없다. 중소기업이라는 점은 적자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물냉이 도매가격이 낮을 때, H 여사는 은행에서 돈을 찾아야 한다.”고 솔직히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곧 적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일정한 수준의 경작 규모와 생산량에 도달하면, 채소밭과 같은 중소기업은 더 이상 소박하고 기쁜 전원목가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날씨, 병충해, 변화무쌍한 시장수요와 가격 등의 부정적 요인은 채소밭의 적자를 쉽게 유발할 수 있다.

 

물론 채소밭의 비용과 수익은 시장 유통을 통해 반영되지만, 저자는 채소밭에서 재배된 채소 품목과 모종의 특성이야말로 농사의 일정과 절차를 규정함으로써 채소밭 농사에서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물냉이 농사의 경우, 막뿌리가 있는 줄기로 다음 모작을 시작할 수 있는 물냉이의 특성을 활용하여 비용을 감축할 수 있는 한편, 물냉이의 짧은 생장기와 다수확 특성 때문에 날씨가 좋을 때 과잉 생산으로 인한 도매가격의 폭락 현상도 생겨날 수 있다. 따라서 저자가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채소와의 춤은, 결국 채소의 생물학적인 특성, 영농 비용, 그리고 수익 등의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된 무대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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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어진 땅에 차례로 심게 되는 모종의 모습9)



3. 외부 자원을 연결하는 허브로서의 채소밭

 

지난 호 홍콩 농업의 기본 상황에서 언급했듯, 홍콩 농업인들은 농지 면적이 부단히 축소되고 농지임대료가 계속 상승하는 열악한 영농 환경에 처해 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려면 농업인들은 다양한 외부 자원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특히, 저자는 농업생산 과정과 유통·판매 과정에서 외부 자원의 도입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생산과 유통·판매 과정에서 외부 자원을 도입할 수 있다면, 농업도 지역공동체와 연결될 수 있고, 새로운 시장적 흐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생산과 유통·판매 분야에서 외부 자원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4개의 사례를 소개했다. 소개된 사례는 각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토양학 연구자와 협력관계 맺으면서 채소 꾸러미 공동구매 사업을 추진하는 E씨의 사례는 생산분야에서 외부자원을 도입한 대표적 사례라고 불 수 있는 반면, 주변의 도시민 지역공동체와 장기적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도농공생을 실천하는 A씨의 채소밭, 그리고 사회복지 기구 혹은 비영리조직(NGO)의 급식사업을 통해 판로를 확보하는 Y 채소밭과 N 채소밭은 판매·유통 분야의 대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외부 자원 도입의 계기와 농업인이 중시하는 분야가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소개된 4개 사례는 모두 생산·유통·판매 과정 구분 없이 외부 자원의 유치와 도입에 주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자는 이들 사례 가운데 하나의 사례를 선택하여 원문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A씨의 채소밭은 최근 몇십 년 동안 채소밭 운영 모델의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현재 60대인 A씨는 2세대 농업인이다. 그의 부모는 판링에서 농사를 지었었다. A씨는 도시에서 일하다가 건강 문제로 다시 판링에서 정착해서 부친으로부터 농지를 이어받아 농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A씨의 채소밭은 재래식으로 운영되었다. 같은 지역의 농부들과 같은 방식으로 이미 보급된 몇 가지 제철 채소 품목만을 재배했다


이러한 단작화 시기에는, A씨는 7~8두종 규모의 채소밭에서 3가지의 채소 품목만 재배했고, 자동 급수장치까지 설치해서 재배 과정을 단순화·규범화시켰다. 따라서 매일 아침 손수레를 통해 수확한 채소를 인근 새벽시장으로 운반하여 판매하는 것은 A씨 일상의 전부였다 채소 판매 대금을 얻으면 가끔 마을의 잡화점에 가서 마작 놀이도 했다


홍콩 반환 이후인 1999, 정부는 신계 북동부지역에서 연기가 없는 환경보전도시라는 개발계획을 수립했고 판링 일대를 산업단지로 조성했다. 조성된 산업단지는 도로 하나를 건너면 바로 A씨의 집일 정도로 A씨의 채소밭과 인접했다. 이렇게 도시개발지역과 가까운 농가들은 정부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A씨 일가는 2000년 농사를 포기하기로 했다. A씨 부부는 공공임대주택(屋邨) 단지에서 가게 하나를 임대해서 채소 가게를 열었다. 하지만 몇십 년 동안 농사일을 해왔던 이들은 생활방식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들은 3개월 만에 채소 가게 문을 닫고 다시 채소밭으로 돌아갔다.


2010년 즈음에 변화가 생겨났다. 홍콩 현지 농업에 관심이 있는 일부 도시민들이 A씨의 채소밭을 자신이 활동하는 진지로 삼았단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생겨난 원인은, 신계 북동부 도시개발 방안이 아직 입법회에서 통과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동산 업체들이 농지의 대규모 수매를 강행함에 따라, 현지 농업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도시민은 현지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A씨가 거주하는 마을에서 주 2회의 정기시장(農墟)을 열었고, 이를 통해 주변의 농업인과 연대하면서 도농공생(城鄉共生)의 이념을 보급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A씨 부부는 채소재배 방식을 재래식 관행농법에서 유기농법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A씨 부부의 유기농법 전환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인근 공동체와의 관계의 변화였다. 과거 A씨는 주로 지역의 비료 가게(田料店)에서 비료를 구입했다. 전환 이후 그는 여전히 비료 가게에서 땅콩껍데기, 골분 등 비료를 구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처 생선가게에서 폐기된 물고기를 사들여 설탕과 혼합하여 물고기 비료를 스스로 만들었다. 또한, 그의 아들은 주변 상점에서 유기농 비료로 쓸 수 있는 폐기물을 수집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는 홍콩 사람들이 즐겨 먹는 찬 약차(涼茶)를 판매하는 다방에서 차 찌꺼기, 차찬텡(茶餐廳)에서 버려진 달걀껍데기, 커피 찌꺼기 등을 모아 퇴비로 만들었다. 유통과 판매 측면에서도 변화가 생겨났다. 기존 재래식 농법으로는 재배 품목이 한정적이었고 대부분 새벽 시장이나 합작사를 통해 소채통영처(蔬菜統營處)로 납품되었다. 유기농법 전환 이후 그는 정기시장 활동에 참여했다. 정기시장은 주변 아파트 단지 및 개인주택 단지와의 인접성으로 인해 농지와 도시 거주지역을 연결하는 매개가 되어 현지에서 생산된 신선한 채소를 직접 도시주민의 식탁까지 배송해 줄 수 있다.


정기시장을 매개로 도농공생 관계가 형성된 이후, 채소밭 경영자와 정기시장의 사회 활동가들은 다른 방식의 도농 연대와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채소밭 경영자와 정기시장의 경영자는 현지의 한 식품 가공기업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채소밭 경영자는 기업이 두부를 만들 때 생산하는 부산물과 폐기물을 비료로 활용하여 생산한 채소를 식품기업이 운영하는 직영점을 통해 판매했다. 정기시장의 경영자는 장날에 이 기업이 대리 판매한 식용유와 가공식품을 판매했다. 이와 더불어, 정기시장의 경영자는 지역공동체 및 다른 지역의 주민들과 장기적인 구매 협약을 맺고, 정기적으로 야채 꾸러미를 배송하기도 했다. 또한,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체험활동도 만들어졌다. 이들 체험활동을 통해 정기시장의 운영비용을 충당하였다는 사실에도 의미가 있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체험활동을 통해 농촌 현장에서 도농공생의 이념을 소개하고 그 실천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글의 다른 사례에서 소개된 채소밭 사례는 각자 다른 운영 주체의 특성과 운영 방식을 갖고 있었지만, 모든 사례가 일정한 사회적 책임 혹은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채소 생산 및 유통·판매 과정에서 다량의 외부자원을 도입하고 이러한 자원을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은 대동소이했다. 여기서 저자는 채소밭 배후에 존재하는 사회적 책임 혹은 이념이 홍콩 채소밭의 지속적인 발전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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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를 수확하는 장면10)



 상술한 내용과 같이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홍콩 채소밭 농업의 일상을 내·외부적인 시각을 통해 독자에게 보여줬다. 농업인들이 채소를 재배하는 기예와 채소밭 운영 과정에서의 경제적 이익 계산이 채소밭 일상의 한 측면을 구성한다면, 외부 자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채소밭 밖의 다양한 행위 주체와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채소밭의 지속 가능한 발전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채소밭 일상의 또 다른 측면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채소밭을 경영하는 농업인의 철학과 이념, 혹은 채소밭을 경영하는 사회조직이 실천하려는 사회적 책임과 사명감은 채소밭 일상을 이끌어나가는 영혼이라면, 농업인, 지역공동체 내 음식점, 비료 가게, 아파트 주민, 그리고 생물체로서의 채소 모종까지의 다양한 행위 주체들은 채소밭 일상을 구성하는 뼈와 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리페이 _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1) 중문 원본은 다음 책 참조: 周思中 著, 2022, 夕陽的光誰說香港沒有菜園, 香港: 藝鵠有限公司.

2) Aijmer, Göran (1980). Economic Man in Sha Tin: Vegetable Gardeners in a Hong Kong Valley. London and Malmo: Curzon.

3) 홍콩을 비롯한 남중국 지역, 그리고 동남아시아까지 유채꽃 혹은 다른 배추과 식물의 어린잎, 줄기와 꽃을 같이 따서 통으로 먹는 관습이 있다. 여기서 통으로 먹게 된 어린잎, 기와 꽃은 채심(광둥어:초이섬)으로 통칭한다

4) 홍콩 전역에서 가장 높은 산의 이름.

5) 이 글에서 소개된 D씨의 물냉이 농사는 바로 밭물냉이 재배 방식이다.

6) 여기의 필자는 원문의 저자임.

7) 1두종200

8) 1=600g

9) 周思中 著, 2022, 夕陽的光誰說香港沒有菜園, 香港: 藝鵠有限公司, 83.

10) 앞 책, 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