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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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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온 비(非)화교 – “찐 허” (2) _ 현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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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미 중앙정보부가 1974년에 제작한 태국의 소수민족 분포도

      

태국의 중국비()정규군과 싼티키리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전 세계는 식민주의 체제가 붕괴하는 가운데 탈식민화 시대에 돌입했고, 동시에 흔히 냉전으로 명명되는 미소대결이라는 새로운 국제체제 안으로 급격히 편입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곧 국공내전이 재개되었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새로운 민족국가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탈식민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과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내전에서 새로이 주목받기 시작한 사람들이 바로 변방인,” 즉 국경 지역 사람들이었다. 식민주의 시대에 그려진 국경선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이 국경선을 기준으로 다수민족과 소수민족이 새로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식민 통치를 경험하지 않은 태국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32년 인민당 혁명을 주도해 절대왕정을 종식하고 입헌군주제를 세운 피분 송크람 장군이 1938년 총리 취임과 동시에 실행한 12개의 랏니욤이라고 불린 국가주의 정책 첫 번째가 바로 국명을 시암타이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쁘라텟 타이(태국, Thailand)”로 바꾸는 것이었다. 시암 보다 특정 민족의 종족성이 강조된다는 비판을 피분은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기반으로 외세의 침략으로 축소된 대타이제국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19세기 말, 그리고 1940-41년 사이 프랑스와의 국경 분쟁에서 잃은 태국과 캄보디아, 태국과 라오스, 그리고 태국과 버마 사이의 국경 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피분은 동남아시아 침략 전쟁을 단행하고 있던 일본과 손을 잡게 되고, 일본은 그 대가로 프랑스 인도차이나령에 있는 땅 다수를 태국령이라고 인정한다. 일본의 지원에 힘입어 피분은 샨주에 태국군을 파병한다. 19426, 파병군은 샨주의 주도인 껭뚱 지역을 점령하고 타이 연합국을 세운다. 종전 이후에 이 국경 지역들은 다시 각자의 나라로 환원된다.

 

1948년은 동아시에서도, 동남아시아에서도 갈림길과 같은 시점이었다. 1948년 독립 이후 미얀마 초대 총리였던 우 누는 불교식 사회주의를 주창했고 바마(버마) 민족 중심의 미얀마 통일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버마 공산당을 비롯한 다수의 소수민족들과의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던 차에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중국인들의 대량이주가 시작되었다. 육로로 이주한 이들 대부분은 윈난성과 맞닿아 있는 샨주 국경 지역에 정착하거나, 살윈(버마어로 딴륀”)강 주변에 이미 형성된 윈난 공동체로 이주하면서 샨주의 주도인 껭뚱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다. 대만 국방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951년 말 약 14,000명의 국민당군이 샨주로 이주한다. 이들 중 윈난 출신 한족이 70% 이상을 차지했다. 국민당군 다수가 공산당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게릴라군이 되거나 민병대에 들어갔고, 이들과 함께 이주한 윈난 출신 민간인 일부도 저항군에 합류했다. 대만에 있던 국민당 정부와 미국은 이들에 대한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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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국공내전 이후 버마로 후퇴한 국민당군

 

버마 공산당과 소수민족들의 우누가 이끄는 정부에 대항하는 투쟁을 지속하는 가운데, 북부 국경지대를 무단 점령하고 있었던 중국의 국민당 잔류자들은 버마정부에게 매우 불편한 존재였다. 특히나 비동맹운동에 합류한 우누에게 있어서 중국을 적으로, 미국과 태국을 친구로 둔 국민당 잔류군은 국가안보를 위협할 뿐만이 아니라 악화되고 있던 비()버마민족들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힘을 더할 것이라 믿어졌다. 결국 1950년 버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제적 위치를 인정하는 동시에 버마내에 이주한 국민당 잔류군에게 버마 영토를 떠나라고 선포했다. 이에 국민당 지도자들은 저항했고, 샨주를 전초기지 삼아 윈난 침투를 단행했다.

 

결국 19533월 버마정부는 UN에 국민당군의 대만으로의 철수를 공식적으로 요구했고, 반년간의 철수 과정을 통해 총 16,068명의 국민당군과 민간인 중 6,750명이 대만으로 이주했다. 여전히 다수의 국민당 게릴라군은 대만 철수에 저항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대만은 작은 섬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들의 고향과도 너무 먼 곳에 떨어져 있었다. 1차 철수가 종료된 지 3개월 만에 이들은 다시 게릴라 활동을 재개했고, 대만 정부도 조용히 이들에 대한 지원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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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1960년대 버마에서 태국으로 이주한 국민당군
 

이에 1960년 버마군은 중국의 공산당과 공조하여 국민당 잔류군과 게릴라를 몰아내는 대대적인 작전을 감행했고, 이듬해 2차 철수가 이루어지지만 여전히 만 명 이상의 이주민 중 4,000여명의 군인과 민간인만 대만으로 향했다. 나머지는 버마에 잔류하거나 태국으로 이주했다. 이미 버마와 국경이 맞닿은 치앙라이나 치앙마이에도 윈난 출신 중국인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이들의 태국 정착은 커다란 혼란 없이 이루어졌고, 태국 정부 역시 눈에 띄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태국 정부는 왜 이 잊혀진 군대(lost army)”라고 알려진 국민당 잔류군을 받아들였을까?

 

1946UN 가입 이후 태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에 전쟁을 선포했던 과오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1948년 다시 총리로 정계에 돌아온 피분 송크람은 미국과의 동맹강화와 이를 통한 경제원조 확대로 이미 한차례 꺾여버린 자신의 권력 기반을 회복하려 고군분투했다. 신생 민족국가들이 하나둘 등장하던 가운데 공산주의 확대를 두려워했던 미국과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은 중국의 공산화를 적극적으로 저지했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중국과 국경이 맞닿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그리고 이들 국가에 둘러싸인 태국은 말 그대로 다음 도미노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산악지대로 이루어진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국경지대에는 이미 19세기부터 이곳에 정착한 중국에서 내려온 소수민족 혹은 고산족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에 곧 경도될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들을 경계하게 된다. 이에 미국은 태국의 북부지역을 마지노선으로 보고 피분 정권의 소수민족 공동체에 대한 동화정책 및 감시와 통제 강화를 위한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증대한다.

 

국경지대 소수민족 공동체에서 공산주의 확산에 위협을 느낀 것은 태국 군부도 마찬가지였다. 피분의 정계 복귀를 도왔던 것은 1947년 쿠데타를 주도했던 군부 세력의 특이점은 1946년 영국에게 반납한 샨주 파병군 지도자들이 다수였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샨주 파병 경험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었지만, 특히나 앞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소수민족에 대한 일차적 경험들이었다. 1949년 겨울부터 다수의 윈난 출신 중국인들과 국민당 잔류군이 버마의 샨주로 탈출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태국의 군부 역시 긴장했다. 하지만 곧 반공주의로 무장한 국민당 잔류군이 게릴라군과 민병대를 조직하고 이를 대만과 미국이 지원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이들이 중국과 태국 사이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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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치앙라이 치앙센에 있는 황금 삼각지 (골든 트라이앵글).

1950년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아편 생산과 유통량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짐.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바로 아편 무역이다. 1947년 쿠데타를 주도한 태국의 신군부 세력 중 1950년대에 눈에 띄게 정권을 장악한 이가 태국 경찰청장이었던 파오 시야논인데, 그는 미국의 중앙정보부(Central Intelligence Agency)와 합작하여 샨주에서 국민당 잔류군과 윈난 출신 중국인들이 재배하고 유통하던 아편 무역에 가담하게 된다. 1950년 중국의 공산당 정부가 윈난을 점령하고 이 지역에서의 아편 재배를 완전히 금지하면서 샨주는 아편 생산과 유통의 핵심지역으로 떠오른다. 특히 국민당 게릴라군과 민병대들이 아편을 운송하는 캐러밴 무역상을 경호하거나 재배와 판매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하면서 아편 무역은 국민당 잔류군의 반공투쟁에 핵심적인 재원이 된다. 국경 지역에서의 국민당 게릴라군과 민병대의 불법행위를 눈감아주고 샨주의 아편의 유통경로를 보호하면서 파오 시야논은 아편을 대량으로 들여올 수 있었고, 이는 곧 그가 태국 정계에서 권력을 축적하는 데 필요한 재원과 인적 네트워크를 마련해주었다. 아편의 대가는 국민당 게릴라군과 민병대에게 간절했던 무기, 탄약, 연료, 약 등이었다.

 

1961년 대만으로의 2차 철수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수천 명의 국민당 잔류군이 샨주에 남아있었다. 이들 중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부대는 리웬후안(李文煥)이 이끌던 제3연대와 두안시웬(段希文)이 이끌던 제5연대였다. 더 이상 버마에서의 군사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이 두 장군은 3,200여 명의 잔류군중 2,600명의 군을 이끌고 태국으로 이주했다. 두안시웬과 제5연대는 치앙라이에 있는 매쌀렁 지역에 정착하고, 리웬후안과 제3연대는 치앙마이의 팡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이 두 지역 모두 버마와 중국 국경 지역에 인접해 이전부터 중국계 이주민들이 공동체를 형성한 곳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샨주와 가까워 캐러밴 무역을 통한 아편의 유통이 수월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선택됐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눈여겨봐야 할 점은 국민당 잔류군이 선택한 두 지역 모두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여서 아편재배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두 지역에서 아편재배가 이루어졌고 1970년대에는 전 세계 아편 생산-유통의 허브가 되기도 했다.

 

1960년대에 태국과 대만 정부는 태국 국경 지역의 국민당 잔류군의 법적 위치와 정착에 대한 논의를 여러 차례 진행했지만, 합의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국민당 잔류군들은 여전히 아편 재배와 무역에 의지하고 있었고, 대만으로 이주하는 방안에는 완강히 저항했다. 결국 이들이 찾은 합의점은 국민당 잔류군이 태국 정부의 공산당 진압 작전을 지원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이들의 정착지와 태국 영주권 혹은 시민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민당 잔류군 외에도 윈난 출신 중국인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사이에 리웬후안과 두안시웬이 이끌던 국민당 잔류군이 버마에서 태국으로의 이주를 도운 윈난 출신 중국인만 해도 만 명 가까이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은 각각의 장군이 실질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었던 정착지와 그 주변에 자리를 잡았고, 국민당 잔류군이 세운 공동체의 규범을 따르고 중국인 학교에서 중국어와 역사, 문화에 대해 교육받았다. 태국 북부지역에서의 국민당 잔류군과 중국인 공동체의 이러한 끈끈한 관계 때문에 지금까지도 태국에서 찐 허라고 알려진 윈난 출신 중국인들에 대한 이미지에는 아편 밀거래상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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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도이 매쌀렁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두안시웬의 제5연대


그럼에도 태국 정부가 처음부터 국민당 잔류군과 윈난 출신 중국인들의 태국 이주를 강하게 반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고산지대 소수민족과 달리 이들에 대한 반감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 정부의 공산당 진압 작전을 지원하기로 결정되면서 국민당 잔류군은 중국 비()정규군(Chinese Irregular Forces)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들은 태국의 국경수비대나 정규군과 공조하여 다수의 작전에 동원되었다. 국민당 잔류군은 여전히 아편 무역에 관여하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했지만, 태국 정부는 이를 알고도 묵인했다.

 

1970년대 말부터 태국에서의 공산당 활동과 소수민족들의 반란은 쇠락하기 시작했고, 1980년 태국 정부는 공산당에 대한 무력 진압이 아닌 정치적 회유 전략을 취할 것임을 공표했다. 이에 따라 국민당 잔류군의 대공산당 진압활동 역시 축소되는데, 태국으로 이주한 국민당 잔류군들 역시 노쇠해지면서 전역을 하거나 새로운 생계 수단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태국 내 공산당의 위협이 거의 사라졌다고 여겨진 1980년대 초부터 태국 정부는 중국 비정규군에 대한 지원을 줄여나가기 시작했고, 비무장화를 촉진했다. 두안시웬은 1981년 사망했고, 리웬후안은 2000년에 사망하지만, 여전히 이들은 찐 허공동체 내에서는 전설적인 구원자로 남아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젊은 세대들이 국민당 잔류군에 매력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태국에 자리를 잡은 구세대나 태국에서 태어난 다수가 중국으로, 고향으로의 귀환보다는 완전한 정착과 신변 보장, 그리고 태국에서의 더 나은 미래에 희망을 걸었고, 이에 따라 비무장한 이들에게 시민권과 토지 배분을 보장한 태국 정부의 동화정책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5연대는 1987년에, 3연대는 1989년에 해체되면서 태국 내 국민당 잔류군의 지배는 실질적으로 종결된다.

 

중국 비정규군의 비무장화와 동시에 태국 정부가 시행한 것은 바로 이들 공동체가 집중된 치앙라이의 매쌀렁 지역과 치앙마이의 팡 지역에서의 아편재배와 유통 통제정책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두 지역은 외국인뿐만이 아니라 태국인들에게도 금지지역과 같았다. 이는 곧 찐 허공동체의 고립과 이들에 대한 두려움과 편견의 지속을 의미했다. 이렇게 아무도 찾지 않은 산속 깊은 곳에 자리한 마약 천국에 국경수비대를 위시한 태국 왕실이 왕립 개발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아편 대신 커피, , 고랭지 채소와 과일 등을 심게 하고, 고산지역의 경치와 소수민족의 이국적인 삶의 터전을 기반으로 한 관광업의 확대를 추진했다. 주변에 분포하고 있었던 아카, 리수, 몽 등의 공동체도 이 왕립 개발프로젝트에 동원되기 시작하면서 매쌀렁은 평화의 언덕을 의미하는 싼띠키리로 이름이 바뀌고, 팡 지역의 전 국민당 잔류군 정착지는 도이앙캉이라고 불리는 왕립 개발프로젝트단지 안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찐 허라는 명칭은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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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매쌀렁 지역 반나또 마을의 중국 학교

   

십여 년 전 필자는 태국의 국경수비대원과 함께 매쌀렁 지역안에 위치한 반텃타이 (예전 이름은 반힌떽)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마약왕 쿤사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이 마을로 들어가는 좁고 울퉁불퉁한 시멘트 길을 올라가며 잔뜩 긴장했었다. 이전에 조사차 방문했었던 여타 국경 지역 마을과 크게 다른 점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군데군데 남아있는 중국어 간판은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국경수비대 대원과 마을 주민들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나니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한 국경수비대 대원이 다소 흥분한 듯 필자를 반기며 스페셜 이벤트를 준비했다고 했다. 그녀의 특별이벤트는 바로 코리언 바베큐였다. 지금은 태국에서 무까타로 알려진 한국식 삼겹살 구이 가게로 필자를 인도하던 그녀의 어머니는 리수인이었고 아버지는 찐 허였다. 달달한 태국식 과일 위스키 스파이를 몇 잔 들이키자, 필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어느 종족 출신이에요?” 얼굴에 홍조가 가득한 그녀는 잠시 미소를 거두었다. “저는 태국인인데요.” 예상치 못한 답을 들은 필자의 볼이 그녀의 잔에 담긴 과일 위스키보다 더 빨개지는 순간이었다. 그 홍조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오늘까지 필자는 그날의 대회를 계속 곱씹어 보며 왜 나는 그녀의 출신을 굳이 묻고 싶었는지를 생각한다. 나도 그녀를 태국인이 아니라 소수민족으로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전호에서 계속 2/2]



현시내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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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Wen-Chin. “Identification of Leadership among the KMT Yunnanese Chinese in Northern Thailand.” Journal of Southeast Asian Studies 33 no. 1 (February 2002): 12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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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emmanee Charoenwong. “The Evacuation of the Nationalist Chinese (Kuomintang/KMT) Troops in Northern Thailand from the 1950s to Today.” Asian Cultural Studies 30 (March 2004): 159-175.

Kaufman, Victor S. “Trouble in the Golden Triangle: The United States, Taiwan and the 93rd Nationalist Division.” China Quarterly no. 166 (June 2001): 440-456.

Qin, Amy. “In Remote Thai Villages, Legacy of China’s Lost Army Endures.” New York Times, January 14, 2015.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위키커몬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hailand_ethnic_map.svg

사진 2 & 3. 인터넷 아카이브 Wayback Machine-Shan Herald Agency for News (S.H.A.N)

https://web.archive.org/web/20070928095143/http://www.shanland.org/general/NinP/The-Kuomintang/

사진 4. 위키커몬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olden_Triangle_Mekong_at_Doi_Pu_Khao_06.jpg

사진 5. Bridgeman Images

https://www.bridgemanimages.com/en-US/noartistknown/thailand-kuomintang-soldiers-training-at-doi-mae-salong-santikhiri-in-northern-thailand-c-1965/nomedium/asset/1183787

사진 6.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