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The First Chinese American
19세기 미국에서 중국 이민자들을 “교정할 수 없고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이라 규정하며 배제의 근거로 삼았던 것과 달리, 실제로 대다수 미국에 남은 중국인들은 주류 사회와 분리되어 차이나타운에 집거하던 상황에서도 미국화의 과정을 겪었다. 언어와 관습을 익히고 수용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미국의 법률 시스템을 활용하여 차별적 법률 적용을 수정하고 자신들의 법적 지위를 회복하고자 한 것은, 혐중론자들의 주장처럼 ‘미국의 공화정을 위협하는 내재적 정치적 위험성’ 때문이 아니라, 미국 내 성장하던 법적 평등의 가치에 동화되며 나온 행동이었다.
19세기 말 미국 자본주의 성장과 국민 구성, 인종 인식의 과정에서 인종적, 문화적, 위생적, 정치적으로 가장 위협적인(“Yellow Peril” 黃禍) 외부인으로 사회적, 법적으로 규정되며 배척되어가는 가운데, 시민 자격을 가지고 있던 소수의 중국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각각 귀화와 출생을 통해 미국 시민의 자격을 가졌던 두 중국인의 행적을 통해 당시 중국계 미국 시민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사진 2. <처음으로 ‘중국계 미국인’ 용어를 사용한 웡친푸(Wong, Chin Foo)>
웡친푸는 17세가 되던 1868년 기독교 선교회의 후원을 받아 미국에 유학했다. 1882년 중국인 배척법으로 귀화가 막히기 전인 1873년 귀화했고, 영어가 능숙하여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중국문화에 대해 그리고 미국 내의 중국인이 겪는 곤경에 대해 영어로 가장 많은 글을 쓰고 연설을 한 중국인(Seligman, 2013 참조)으로 알려져 있다. 반중국인 정서가 확산되고 있었고 ‘중국인(Chinese ethnic)=미국인(American citizen)’이라는 명제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1883년 처음으로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뉴욕에서 ‘중국계 미국인(Chinese American, 美華新報)’이라는 주간지를 창설하였으며 기고하는 글을 통해 중국 이민자들을 미국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 힘썼다. 1884년에는 첫 ‘중국계 미국인 투표자조직(Chinese American Voters’ Association)’을, 1892년에는 중국인의 이민 금지를 연장한 기어리 (Geary)법에 저항하기 위해 중국계 미국인들을 단결시킨 ‘중국계의 평등권 연맹(Chinese Equal Rights League)’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시민활동을 전개했다.
뉴욕 차이나타운의 한 방문객이 중국인은 고양이와 쥐를 먹는다고 비난하자, 웡친푸가 그걸 증명하는 사람에게 5백 달러를 주겠다고 걸어 결국 아무도 상금을 타가지 못한 결과를 보여준 일화가 있다. 당시 중국인은 초창기 상인으로 대표되는 ‘자유로운’ 존재에서 쿨리노동자로 대표되는 ‘더럽고 해로운’ 존재로 인식이 전환되며, 만평 등에 쥐의 얼굴을 하고 자유의 여신상을 갉아먹는 형상으로 그림이 실리던 때였다. 이후에도 웡친푸는 중국 음식과 종교, 연극 등 중국문화를 알리고 옹호하며 중국인에게 부당한 배제와 차별을 가하는 미국인들을 비판하는 글들을 썼다. 1887년 8월 『북미 리뷰(North American Review)』에 게재한 글, “나는 왜 이교도인가(Why Am I a Heathen?)”는 미국인의 편견과 위선을 지적한 대표적인 글이다. 다음에 요약한 논지를 통해 웡은 자신이 기독교 교육을 받았지만 왜 도덕성에 대한 유교적 이상을 더 높이 평가하는지에 대해 도발적인 어조로 서술하며 기독교의 미국이 행하는 선하지 않은 모습을 고발했다:
이교도로 태어나 성장하면서 나는 이교의 도덕적 코드를 실천해온 사람이다... 기독교에 대해 공부했지만... 대부분의 힘없는 인류에게 영원한 지옥을 예고한 자비없는 신에 대한 믿음을 발견하고 몸서리가 처졌다... 천국에 가기 위해 잠깐만 회개하면 냉혈한 살인자나 인간쓰레기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데, 평생 일해서 모은 돈으로 동료들을 돌봐왔어도 선한 이교도로 살아 예수의 구원에 대해 듣지 못하면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진다니 성경을 읽을수록 나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두렵다... 나는 내 삶이 신에 의해 오래전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라 가르치지 않고 내 삶은 나 스스로 만드는 것이며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린 것이라 가르치는 ‘이교’를 따르겠다... 이교도라지만,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 개혁이란 가면을 쓰고 비겁한 폭도를 조직해서 가차없이 침략하고 살인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엄청난 교회를 세우고 길게 기도하지만, 뉴욕의 천 명 단위 거주지에서 나오는 범죄가 교회도 없고 설교도 없는 백만명의 이교도 지역에서보다 많다... 남이 네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은 남에게 하지 말라, 혹은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이는 기독교인과 이교도가 모두 견지하는 신의 법칙인데, 기독교인들은 이교도에 대해 이를 무시하고 있다. 나는 이교도로 남을 것이고, 당신들도 이교도에 합류할 것을 팔 벌려 환영한다(Wong, August 1887, pp. 169-179)
웡친푸는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극에 달했던 시기,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미국인으로서 미국 사회와 소통하고 권리를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선구적인 시민활동가이다. 한편으로는 여러 번 암살당할 위기에 처했을 정도로 차이나타운 내부의 갱단 등 어두운 면을 자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인에게 동조하는 미국인들을 규합하고 1893년 의회 위원회 앞에서 증언하는 등 중국계의 시민적 권익을 이해시키고 제고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사진 3. <미국 출생시민권(birthright citizenship)의 법적 선례를 남긴 웡킴아크(Wong, Kim Ark)>
웡킴아크는 187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하여 차이나타운에서 성장했다. 미국 출생의 미국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중국 여행길에서 돌아오던 1895년 입국을 거부당한 데 대해 소송을 걸었으며, 3년간에 걸친 법정 투쟁의 승소는 출생시민권을 승인한,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대법원 판례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이민 검사를 담당했던 검사관 존 와이즈는 1882년의 배척법을 확대해석하여, 미국에서 태어났다 해도 부모가 중국국적자이니 중국인 배척법이 논하는 시민권 취득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므로 시민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웡 출생 2년 전인 1868년에 비준된 제14차 헌법 개정안은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한 모든 사람과 그 관할권의 대상은 미국과 그들이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다"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1890년대 중후반, 미국 정부는 여전히 중국 태생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중국의 관할권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미국에서 났어도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었고(이는 사안에 따라 일부 유럽 출신 부모에게서 난 아이에게도 적용되었다. 즉, 출생시민권이 공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중국혈통인들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말을 듣는 것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특히 중국인 적대감이 치솟던 시기에 출생한 웡의 성장기 내내 반중국인 인종차별 폭력이 증가하여 부모는 7세 때 중국으로 돌아가 돌아오지 않았고, 웡이 10살 때부터 그릇 닦고 요리 배우며 미국에서의 삶을 이어가던 와중에 1882년 미 의회는 중국인 배척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배척법의 규정으로는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이 중국에 갔다가 다시 입국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웡은 1889년 첫 중국 여행에서 신부를 얻고 다음 해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왔는데 1894년 중국 방문 후에는 미국 입국이 거부된 것이다. 웡은 소송을 제기하여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가 미국 시민이며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라 규정한 수정헌법 14조 1절에 의거하여, 미국 시민이라는 지위에 따라 재입국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캘리포니아 북부 지방법원에 이어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 그레이(Horace Gray)도 수정헌법 14조에 의거한 웡 측의 주장에 동의하여 6대2로 적법한 시민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소송은 단지 웡킴아크의 승리가 아니고, 인종이나 혈통과 관계없이,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시민이고 시민됨이 정하는 모든 권리가 있다는 출생시민권을 확인시킨(United States v. Wong Kim Ark, 1898) 기념비적 판례가 되었다.
웡킴아크 판결은 주요한 선례가 되었고 미국의 이민법 법리의 발전을 이끈 계기로 여겨진다. 그러나, 미국에 살고 있는 중국계 시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지 못했고 중국인 배척법은 제2차 세계대전 중까지도 유효했다. 웡도 이 판결을 통해 재입국시 문제를 겪지 않을 권리를 법적으로 확인하였지만, 당시 모든 중국 이민자 및 중국계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법적 거주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명서를 지니고 다니라는 기어리법의 추가조항으로 인해 완전히 평등한 시민으로 살지는 못했다. 또한 불과 3년 후에 텍사스의 이민청 직원들에게 4개월 동안 구금당하고 추방 위협을 들으며 시민권 확인 후 풀려나는 일을 겪기도 했다.
2023년은 웡킴아크가 제기한 출생시민권에 대한 대법원의 획기적인 판결이 내려진 지 125주년이 되는 해로서, 그의 출생지인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3월 25일에 승리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그런데 연방 대법원을 통해 각인된지 100여년을 훌쩍 넘긴 현재에도 이민자의 출생시민권에 종종 의문을 제기하는 정치 세력과 지지자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미국 전 대통령 트럼프와 반이민주의자들은 불법 이민으로 들어와서 미국에서 아이를 낳아 시민권을 부여받는 것을 ‘앵커 베이비(anchor baby 시민권을 낚기 위해 닻을 놓는 전략)’라 부르며, 불법 이민이 아닌 이민자 자녀의 출생시민권 인정까지 미친 짓이라 비난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자메이카 출신인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와 어머니가 인도 출신인 현 부통령 카밀라 해리스의 시민권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미국의 중국인 8】
정은주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은 2022년 졸고 「중국계 미국인의 정치성 담론에 대한 검토: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 내 중국인의 시민적 저항 활동을 중심으로」, 『다문화사회연구』 제 15권 3호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글이다.
** 참고자료
Seligman, S. D. (2013). The First Chinese American: The Remarkable Life of Wong Chin Foo. Hong Kong University Press.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사진 2. 美華新報(The Chinese American) 첫 호, MOCA
사진 3. Wong Kim Ark 이민서류들, National Archives(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